낙원동 아트시네마에서 이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정성일, 허문영, 김홍준 평론가가 오픈토크를 진행했었죠. 저는 직접 현장에 있진 못 했지만 블로그 이웃이신 김지환님이 수고해주신 덕분에 녹취본으로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저 세 분을 함께 모신 기획력에 비하자면 좀 심심했다고나 할까요. 아저씨들의 옛날 얘기처럼 시작한 대목부터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요.
- 허문영, 김홍준, 정성일의 서울아트시네마 아듀 오픈토크 (2015. 03. 28)
전체적으로는 시네필 문화와 비평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정성일 평론가는 평소에 꾸준히 주장하시던 바를 정리해주셨고 허문영 평론가는 바로 전 주에 <경멸> 상영 이후 이어졌던 시네토크에서 유운성 평론가께서 지적하신 맥락을 지금/현재 한국의 상황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 느낌이었습니다.오히려 약간의 거리감을 두고 계신 듯한 김홍준 감독/평론가/교수님이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거시적 차원의 통찰로 확장시켜 전개하는 방식이 흡입력 있었습니다.
말씀해주시는 내용도 가장 신선한 면이 많았고요.정성일 평론가는 이 장소(아트시네마:편집자 주)가 게토화 되고 심지어 바로 옆에 이웃으로 붙어있는 실버영화관과도 유리되어 있는 현상을 걱정하면서도 비평과 이론에 관해서는 일견 경도되고 폐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장을 하시는 왔다갔다하는 면모를 보여주시더군요.
가뜩이나 옆자리에서 김홍준 평론가가 영화제와 시네마테크를 홍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허문영 평론가가 지적허영심을 통해서도 충분히 영화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말씀하시는 것과 대비되어 특유의 도그마적인 태도가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비평의 몰락에 대해 말씀하시는 대목에서는 내용의 동의 여하와는 별개로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고요.
사실 저는 정성일 평론가의 왜 한국의 시네필이 분산되었을까, 라는 질문의 대답이 될 수 있는 가설이 정성일 평론가 본인의 행보와 아트시네마 그 현장에 일정 부분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정성일 평론가께서 “아이맥스 시네필”이라는 단어를 말하자 이를 비웃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곳의 분위기 말이죠. 정성일 평론가도 이들이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지만 과연 일말의 조롱의 뉘앙스도 없었는가 한다면 의문이죠.
SNS의 시대를 우려하는 정성일
정성일 평론가는 트위터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셨고 이는 그간 그 분이 주구장창 주장하셨던 바이기 때문에 그닥 놀라운 건 아니지만 “저는 비평가라는 이름을 단 사람이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 나와서 자기 트위터에다 본 영화평을 올리는 건 자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비평가입니까? 자기가 감히 영화를 보자마자 비평을 쓸 수 있다고?”라는 과장된 수사 덕분에 얼마간의 논쟁을 피할 수는 없었을 테죠. 예상한 대로 약간의 논란과 비아냥이 덧붙여졌습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비판하는 것이 영화를 보자마자 평을 쓰는 것 자체는 물론 아닐 겁니다. 본인도 영화 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직관이라는 말씀을 하신 바 있고 “영화를 본 다음 감흥의 감각이 잠들기 전에 비평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마니 파버의 글을 인용하기도 했으니까요.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하시는 트위터의 문제(라기보단 특성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는 빠르게 비평이 시작되는 만큼 빠르게 비평이 끝난다는 것이겠죠. 사유의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겁니다.
SNS는 지나치게 휘발적인 매체입니다. 타임라인이라는 홍수 속에서 재빨리 정보들을 빨아들이고 재빨리 잊어버리죠. 소형 비디오카메라가 처음 보급되던 시기에 고다르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카메라를 쉽게 잡을 수 있는 만큼, 카메라를 쉽게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성일 평론가의 입장에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입니다.
몇몇 분들은 “영화에 대한 즉각적인 인상을 트위터에 기록해두고 정식 평을 쓸때 참고한다.”고 변호하시지만 저로서는 트위터라는 매체가 메모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가령 블로그에서 트위터로 넘어간 수많은 분들이 더 이상 제대로 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그 근거겠지요. 트위터는 말의 형태지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전히 블로그가 더 좋고, 아직도 나쁘지 않은 플랫폼이라고 봐요. 너무 급속도로 구닥다리 취급 받아 마음이 아프지만. 일단 하나하나 기록 된다는 느낌이 마음에 들고 고정점이 확실하게 있으니 안정적이죠. ‘팔로워’나 ‘친구’ 혹은 ‘일촌’이 아닌 ‘이웃’이라는 작명도 예뻐요. 일정한 친근감과 거리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매력적인 단어예요. 무엇보다 제가 쓰는 긴 글을 호의를 가지고 수고를 들여 읽어주는 독자가 있으니 불특정 다수가 읽는 커뮤니티나 SNS에 비해 편하기도 하고요.
SNS에 대한 정성일의 과민반응
그러나 과연 트위터에 대한 정성일의 비판이 비평이 놓여있는 작금의 상황에 합당한지는 의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성일이 말하는 ‘영화를 보자마자 즉각 나와서 자기 트위터에다 본 영화평을 올리는 자판기’ 평론가가 정확히 누가 있습니까. (이동진 평론가가 잠시 쉬고 있는 지금 상황에) 지속적으로 개봉영화에 대해 빠르게 반응하고 평을 쓰는 비평가가 듀나 말고 또 있던가요.
저는 정성일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강조하기 위해 가상의 적을 부풀려 표현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듀나는 즉각적으로 트위터에 기록하는 메모에서 멈추지 않고 본인의 사이트에다 리뷰를 주기적으로 쓰는, 앞서 말한 트위터의 순기능적인 면모를 몸소 수행하고 있는 유일한 평론가 아닙니까. 정성일은 ‘비평가’라고 지칭했지만 이는 허수아비 공격에 가깝다고 봅니다. 정확히는 비평가 행세를 하는 저널리즘 기자들이나 스노브한 태도를 지닌 특정 관객들을 겨냥했다고 말하는 게 솔직하겠죠.
덧붙여서 저는 ‘전영객잔’ 이후의 정성일 평론가가 과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적절한 행보를 보이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임권택에 대한 비평과 각종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건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개봉영화에 대해서는 트위터에 140자로 감상을 쓰는 이들보다도 더 무관심하지 않았습니까(대신 시네토크가 잦아졌습니다. 저는 최근에 그 분이 왜 비평을 쓰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상대로 하는 강의에 집중하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정성일 평론가의 소신에 따르자면 전자는 감독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특정한 몇몇 관객을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아무런 평도 없이 연말에 베스트 리스트만 쏠랑 올리는 태도가 뭐 그리 대단한 예의가 있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설국열차>와 관련해서 영화에 대한 평이 아닌 그 영화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대해서 쓴 것도 그렇고요. 물론 개별 영화에 대한 비평에 흥미를 잃은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정작 본인도 비평을 발표하지 않으면서 트위터라는 경향을 물고 늘어져 책임을 넘기는 건 좀 민망하지 않냐는 거죠. 별점과 20자평, 그리고 트위터의 140자평에 의해 비평이 몰락했다고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이를 탈피하고 보다 깊은 담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적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 정성일 평론가가 취하는 전략은 고작 ‘비평이 무너졌고 그로인한 결과로 영화의 수준이 무너졌다’는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죠. 물론 정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뭐랄까, 제겐 무관해보이는 두 개의 역사를 몽타주해서 결합시키려는 시도처럼 보여요. 비슷한 맥락의 주제를 다룬 시네토크에서 유운성 평론가는 “비평의 몰락이 아니라 특정 비평가의 몰락이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죠. 유운성 평론가가 지목한 특정 비평가가 누구이며 왜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저널리스틱한 과장을 사용하는 세력이 있는지 짐작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좋은 글은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좋다
저는 글의 길이가 담론의 깊이와 탁월한 감식안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도 고작 글의 길이라는 단순한 맥락에서 지적하신 바는 아니겠지요. 그냥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글은 어떤 곳에서 어떤 형태로 있든 좋습니다. 이용철 평론가는 위에서 말한 시네토크에서 “긴 글을 써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그건 긴 글이기 때문이 아니라 별로 좋은 글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줄 수 있는 탁월하고 신선한 관점이 거기 있다면 트위터에서든, 커뮤니티에서든, 블로그에서든 화제가 될 겁니다. 같은 신 전영객잔이라도 김영진 평론가의 글이 항상 그냥저냥 넘어가는 반면, 허문영 평론가의 글은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반향과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처럼요.
그러한 맥락에서 지면의 실종을 걱정하는 평론가 분들이 왜 블로그를 하지 않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이 곳이 아직도 충분히 긴 글을 읽고 담론을 전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평론가라는 직함을 지닌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글을 씀으로써 블로거들의 연결고리 겸 구심점 역할을 해준다면 더더욱이요. 저는 왜 온라인 안에서조차 평론가들이 동등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군림하듯 존재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담론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낡은 단어가 되었고, ‘취향존중’이 견해를 나누는 마지노선이 된 느낌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결국 이를 탈피하는 것도 새로운 매체나 플랫폼이 아닌 ‘글’ 자체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선하고 탁월한 시각의 글은 어떠한 새로운 매체나 커뮤니티보다 새로울 겁니다. 이에 따르면 비평이 몰락한 원인은 어디 다른데 있는 게 아닙니다. 훌륭하고 흥미로운 비평글을 써내지 못한 낡고 고리타분한 비평가들에게 있는 거죠. 일반 대중들 뿐 아니라 (흔히 말하는) 시네필 사이에서도 만연한 비평가에 대한 불신은 이렇게 밖에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키노’를 다시 만들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보단 ‘나는 B평가다’[1]가 재개되는 게 훨씬 생산적일 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원문: 영화 얘기를 합니다
- 나는 가수다의 형태로 네이버 영화블로거들이 진행한 온라인 비평 콘테스트 프로젝트. 2011년 9월부터 시작하여 2012년 7월까지 4라운드 총 7차례까지 진행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