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말 대선이 끝난 며칠 후, 잘 안 나가는 영세 출판사 사장과 그저 그런 일용직 글쟁이가 만났다. 잘 지냈냐, 로 시작되는 근황 보고부터 마치고 바로 대선 후유증으로 넘어갔다. 답답하더라, 여기저기 멘붕으로 난리가 아니더라, 앞으로 파란만장할 것 같다 등등. 그러다가 출판사 사장이 급소를 찔렀다. 뭐 문이 돼 봐야 똑같지 뭘 우리 같은 놈들은 이거나 저거나 아무 것도 없어. 오히려 문 되면 거기 붙어서 해 처먹는 놈들이 더 짜증나고 기분 나빠. 정의로운 척 하고, 지들이 옳다면서 지들끼리 무리지어서 다 해먹었잖아, 전에도.
음…그렇지, 라고 짧게 답하고는 웃었다. 101% 동의.
5년, 아니 6년 전 대선 때 투표를 안 했다. 이명박이나 정동영이나, 한나라나 민주당이나 다 싫었다. 1987년 대선부터 기다렸던 정권교체가 1997년 마침내 DJ로 되었을 때는 사실 감격했다. 그건 최초이고, 최소한의 승리였으니까. 하지만 서서히 감동은 잦아들었고, 다음 대선 때에도 거부하고픈 마음이었다. 노무현도 별로였지만, 이회창이 정말 싫은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대선 전날 정몽준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느지막히 일어나 씨발씨발하며 가서 투표를 했다.
감격은 없었고 이회창이 안 된 것 정도에 만족. 하지만 그 후 5년은 정말 싫었다. 대추리 등 여러 사건들도 있었지만, 친구 말대로 청와대와 참여정부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자기 것, 자기 집단 것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 인간들이 정말 싫었다. 진보니, 민주화 세력이니 등등이 정신을 차리려면 한번 쓴 맛을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명박이 되었을 때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
그런데 난리였다. 정권이 바뀌고 지난 정권 때 임명된 사람들을 내쫓는다 어쩐다 말이 많았다. 그런데 보면, 그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투사들이고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소위 민주정부 10년간 저지른 실수나 잘못 혹은 부패에 대해서는 한 마디 반성도 없었다. 자신들은 너무나 잘하고 공정하게 했는데, 정권이 바뀌니 우리들을 내쫓는다, 로만 선전했다. 그들이 공정함을 말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역겨웠다. 그런 놈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대체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다만 이익과 권력이 좀 줄어들었을 뿐, 이곳저곳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1년도 안 되어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그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그러니까 민주, 진보세력은 반성 같은 것 없이 그저 ‘절대악’인 이명박을 욕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찾은 것이었다. 5년 내내 그랬고, 지난 총선과 대선 때에도 한결 같은 욕설과 조롱뿐이었다. 저 놈은 나쁜 놈이니까 우리를 찍어야 해. 하지만 보기에 그들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뭐, 좌파라는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진보’라는 이름이 붙은 당이 세 개나 난립하고, 진보신당은 소위 ‘정당’에서 후보도 내지 못하면서 ‘노동자 후보’란 이름으로 두 명이나 등록했다. 대체 뭐하자는 건지.
이미 여론의 동향은 분명했다. 후보 단일화가 대단히 감동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기운을 모으면서 합쳐진다면 승부를 걸 수도 있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기묘한, 단일화 아닌 단일화로 결론이 났을 때 이미 박근혜의 당선은 결정된 것이라고 봤다. 이곳저곳의 여론조사들도 그랬고. 막판 사흘 동안 힘이 좀 붙으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긴 했고 투표도 했다. 아무나 되라, 는 심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출구조사를 보고는 역시나, 라 생각했고 개표방송도 보지 않았다. 밤새 일을 했다.
멘붕은커녕 크게 낙담하지도 않았다. 이미 예상하기도 했었고, 친구 말대로 우리 같은 놈들은 이나저나 똑같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힘들어지겠지만 그건 언제 어디나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척 하면서 지들 패거리만 싸고도는 놈들이 잘나가는 꼴을 보지 않게 되었다는 걸 ‘정신승리’의 동력으로 삼으면 된다. 역시나 대선이 끝나자마자 깨시민을 까고, 50대를 까고, 지들끼리 서로 공격하고, 조롱하고, 비웃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는 한국도 일본처럼 보수 양당이 지배하는 곳이 될 가능성이 크고, 일본 사회당이 붕괴한 것처럼 진보도 정말 한줌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냥, 일단은 나 혼자 잘 살아가면 된다.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냥 ‘잘.’ 과거에는 시스템을 바꾸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을 바꾸겠다는 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개인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커녕 시스템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개인이 먼저 변해야 사회도 변한다, 는 것이 지금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5년 동안 힐링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대통령이 누가 되고말고, 로 상처받을 일도 없다.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잠이나 푹 자자. 요즘 내 바램은, 불면증이 좀 나아져서 잠을 푹 자는 것뿐이다. 그것만 나아지면 세상 따위 어떻게 되던 그 다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