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봄이라는 계절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4·19의 함성과 총성 속에 스러져간 목숨들의 봄이 그랬고, 5·18 광주로 대변되는 80년의 봄도 그랬다.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2천년 전 중국 여류 시인 왕소군의 시구는 한국의 봄을 맞아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되곤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떠올리기조차 싫은 봄을 들라면 나는 1991년의 봄을 들겠다.
1991년 초, 서울 명지대학교는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그해 2월 명지대학교 당국이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안을 발표한 것이다. 당시 대학교마다 들끓었던 ‘학내민주화 투쟁’이 명지대학교에서도 벌어졌다.
그런데 4월24일,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대학을 방문하여 지지 연설을 하고 돌아오던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연행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틀 뒤인 4월26일에도 명지대학교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한창 공방전이 오가던 즈음, 일단의 사복 체포조가 학생들의 뒤통수를 치려고 돌아들었다. 1학년 신입생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교문 앞에서 싸우던 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달음박질쳤고 전경들은 그를 추격했다.
신입생은 사력을 다해 달렸지만 학교 담장 바로 밑에서 전경들에게 따라잡히고 만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바짝 독이 올랐던지 사복 체포조들은 무자비한 쇠파이프질을 퍼부었다. 너무나도 순하고 착했던 청년.
아버지가 “너 이 녀석 고추 좀 보자!”고 짓궂은 농담을 하자 그게 농담인 줄도 모르고 바지를 훌러덩 벗으며 “인제는 보여 달란 말씀 마세요” 하고 억울해하던 고지식한 청년은 전경들이 자리를 뜬 이후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그의 이름은 강경대였다.
백주에 경찰이 학생을 때려죽였다! 음습한 고문실도 아니고 경찰서 취조실도 아닌 학교 담벼락 앞에서 경찰이 학생을 때려죽였다! 터질 듯한 분노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당장 다음날 연세대학교에는 1만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모여 분노의 파도를 형성했다. 6월 항쟁 이후 4년 만에 서울 시내 명동은 다시금 최루탄 연기로 뒤덮였으며 강경대의 초상을 가슴에 품은 학생들은 비장한 얼굴로 경찰 앞에 맨몸을 들이밀었다.
정권은 전전긍긍했고 각 신문의 1면 내지 사회면 톱은 주먹 같은 글씨로 전국에서 벌어진 시위 현황을 전하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 있던 나 역시 강경대의 비극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강경대는 명지대학교 대학 노래패였다. 대학 시절 나 역시 노래패에서 악기를 날랐기 때문이었을까. 그 죽음은 범연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이 지난 일병 휴가 때 서울에 들렀다가 만났던 패기 넘치게 노래 부르던 91학번 아무개가, 술 못 먹는다고 구박받던 시골 출신 91학번 아무개가 바로 그 희생자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들을 그냥….” 당장이라도 서울로 뛰어올라가고픈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 사흘 뒤 전혀 상상하지 못한 봉화(?)가 오른다. 봉홧불의 불쏘시개는 사람이었다.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댕긴 것이다. 1991년 4월30일 <한겨레> 신문 1면에 실린 분신 사진의 충격이 지금도 선연하다. 뜨거움을 못 이긴 듯 양손을 머리 위로 쳐든 채 주저앉은 한 여학생의 몸에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한 학생이 들고 있던 가방으로라도 불을 끄려는 듯 다가서고 있는 모습. 사진이었지만 그 속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 안에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왜! 왜 이런 거야. 박승희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지만은 말아라. 그것은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 너희는 가슴에 불을 품고 싸워야 하리. 적들에 대한 증오와 불타는 적개심으로 전선의 맨 앞에 나서서 투쟁해야 하리. 그 싸움이 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2만 학우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하는 함께 하는 싸움이어야 하리. 내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니 힘들고 괴롭더라도 나를 생각하며 힘차게 전진하라.”
내가 당시에 서울에서 강경대를 살려내라고 부르짖는 시위대의 일원이었더라면 여대생 박승희의 분노를 쉽게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속에 있었다면 박승희와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그것도 열띤 대학가와도 거리가 먼 군문에 들어 있던 나는 그녀의 유서를 읽으면서 공감보다는 전율이, 의분보다는 황망함이 앞서고 있음에 당황하고 있었다.
나에게 ‘적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 부족한가?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 명 한 명 싸워야 하는 지금’ 박승희는 왜 살아 있는 몸뚱이로 함께하지 못하고 분신한 영혼이 되어 ‘나를 생각하며 전진하라’는 유언을 남겨야 했는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의문의 근원은 목숨을 건다는 엄청난 행위가 투쟁의 마지막이 아니라 투쟁의 신호탄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1988년 이전까지 분신 내지 투신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노동자 전태일처럼 살아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보아도 소용이 없을 때, 즉 대통령에게 탄원을 보내고, 사장들에게 애걸하고, 노동청에 가고, 신문에 내보고, 별의별 일을 다 해도 바뀌지 않을 때, 그 막다른 골목에서 대답 없는 세상을 향해 내지른 절박한 외침이었다. 1986년의 김세진, 이재호 학생도 분신을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라 연행과 폭력을 자행하던 경찰과의 대치 끝에 일어난 최후의 항거 수단이었다. 하지만 1988년 이후 양상은 조금 달라졌다.
1988년 5월 서울대학생 조성만은 “조국통일 투쟁”을 외치면서 할복, 투신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몇몇 학생들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기를 요구하며, 백만 학도의 투쟁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의 몸을 불태웠다.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와 의기를 일깨우고자 한 ‘선도적인 결단’으로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간헐적으로 피어나던 불의 꽃들은 91년 봄 감당할 수 없는 마그마가 되어 전국적으로 폭발했다.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 되어 조국을 등질 수 없어 나로부터 가노라… 나서거라. 투쟁의 한 길로. 산산이 부서지거라.”
강경대가 즐겨 부르던 노래 ‘투쟁의 한길로’다. 그렇게 ‘역사의 부름’을 받은 것은 전남대 학생 박승희만이 아니었다.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이 잇따라 자신의 몸에 불을 댕겼다. 유서는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가 되지 않고자 ‘산산이 부서졌다’. 천세용 학생의 분신 소식을 접한 날로 기억한다. 나는 술에 취한 채 서울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략 이런 내용의 주정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대협 차원에서라도 이제부터 죽는 놈은 나쁜 놈이라고 선언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이건 미친 짓이다.”
물론 백주대낮에 젊은 대학생의 생명을 앗아간 정권에 저항하여 목숨까지 내놓은 행위들이 ‘미친 짓’이었을 리 없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당시는 더욱 그랬으리라. 하지만 취한 기운에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차마 맨정신에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미쳐 버릴 듯한 속내의 표출이었다. 그들이 목숨까지 바쳐 얻고자 한 목적이 그 죽음의 대열 끝에 오히려 빛이 바래고 몸으로 피워 올린 봉홧불이 외면 속에 스러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과연 같은 사람이 맞는가 의심이 들 정도지만, 한때 이 나라 양심의 상징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급기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칼럼을 썼다. 그가 정신병을 얻도록 혹독하게 비판을 당한 그 칼럼이 실린 날은 1991년 5월5일이었다. 나도 그 칼럼에 욕을 꽤나 퍼부었다. 하지만 분기가 풀리지 않는 가슴 한구석을 칼럼의 한 대목이 비수처럼 찔러 왔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김지하가 칼럼을 발표한 나흘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전 사회부장 김기설이 분신 후 떨어져 죽었다. 노동자 윤용하가 불덩이가 되어 죽었으며, 고등학생 김철수도 불길 속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산화해 갔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과격해지는 시위와 진압 와중에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은 경찰의 토끼몰이 진압 끝에 압사당했다.
그 잔인한 봄, 강경대를 필두로 죽어간 생명은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섰다. 땅을 치도록 억울하고 입술을 피나게 깨물도록 억울한 일은, 그렇게 제 몸을 까맣게 태우며 죽어간 이들이 무시무시한 고통을 감수하며 외쳤던 주장들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들의 죽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죽음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동화되기보다는,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 자체에 겁을 먹었고, 몸서리를 쳤다. ‘열사’의 뜨거움은 넘쳐났으나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노태우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과의 사이에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등장한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의 뜬금없는 ‘죽음의 배후’ 주장이 먹혀들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지 못할 만큼 해괴한 ‘유서대필’죄가 등장하여 무고한 젊은이의 평생을 앗아가 버린 것은 그 간극을 참담하게 상징한다. 학생들의 순결한 희생은 “순번 정해놓고 유서 대신 써주며 몸에 불 싸지르는” 공포의 화신(火神)들로 낙인찍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학생들과 시민들의 괴리감은 이후로도 줄어들지 못했다. 고립의 벽을 둘러친 것은 정권과 보수 언론만이 아니라 그 숱한 희생들을 이어받겠다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 단적인 예를 나는 91년의 봄을 끝장낸 6·3 외대 사태에서 발견한다.
전교조 교사 1500명의 목을 쳐 버린 당사자였던 정원식 총리에 대한 학생들의 ‘불타는 적개심’은 총리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씌웠고, 그 행동은 상상을 넘어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당시 총학생회장 이름으로 사건 다음날 붙었던 대자보의 내용이었다.
“어제의 투쟁에서 우리 애국외대는 전국의 백만 학도와 4천만 민중에게 청량제와 같은 통쾌감을 주었습니다. 7천3백여 애국외대 청년학도들을 대표하는 저는 어제(6·3)의 투쟁에서 우리 외대인이 보여준 그 기상과 의지를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제 학교를 빠져나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면서 시민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도 통쾌하다’ ‘잘했다’ ‘역시 외대는 외대다’.”
아마도 총학생회장은 “통쾌하다”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대신 그 열 배는 되는 학생들에 대한 욕설은 생략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은 ‘애국시민’이 아니라 보수언론의 악선전에 넘어간 이들의 악다구니에 불과하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학생들은 스스로의 울타리를 그렇게 쌓아갔다.
대개 울타리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비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밖과 안의 소통을 방해하는 장벽이 된다. 91년의 뜨거웠던 봄, 사방에 뿌려진 불씨들은 점점 높아져만 간 울타리 속에서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역사의 흙더미 아래 묻혔다. 91년의 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내려앉는 이유는 그 하염없는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폭력에 맞선다는 믿음이, 목숨을 내놓고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 그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화석화하는 과정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정권의 폭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맞선 이들의 투쟁은 “폐허의 땅에 푸르른 생명”을 넘실거리게 하는 가치 그득한 몸짓으로 존중받아야 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시위를 하는 이들로 매도되었던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는 이들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자식을 뺏어가는 이들로 치부되어야 했던가. 그 모든 죽음들이 왜 계란 몇 개와 밀가루 반 포대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가. 그 책임을 정권과 보수언론한테만 물을 수 있을까. 91년의 참담했던 봄이 더욱 참담하게 스러진 것은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치와 자신들의 논리와 자신들의 믿음으로 쌓아올린 울타리를 이미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치열한 죽음의 봄을 끝장낸 ‘세계를 뒤흔든 계란’을 던진 상황에서 “우리는 전국의 백만 학도와 4천만 민중에게 청량제와 같은 통쾌감을 주었다”고 어깨를 으쓱이던 당시의 ‘혁명적 낙관주의’에게 묻고 싶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그리고 지금 그들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냐고. 91년 봄을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질문이 많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