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형 어우동’과 확산성 밀리언 아서
화제의 게임 ‘확산성 밀리언 아서’. 스퀘어에닉스에서 제작한 카드 배틀 게임으로, 카드를 뽑고 합성하는 재미와 더불어 이를 성장시키고 플레이하는 재미가 더해져 매일같이 서버가 터져나갈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카드마다 캐릭터의 멋진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어 이를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
그런데 얼마 전, 이 게임이 꽤 시끄러운 논란에 빠진 적이 있다. 1월 21일, 한국 서버 전용 카드의 캐릭터로 ‘어우동’이 선택되며 벌어진 논란이다. 사람들은 어우동의 일러스트가 예쁘지 않고 캐릭터 자체가 게임과 어울리지도 않으며, 실제 어우동이 문란한 인물인 탓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러스트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마지막 이야기가 좀 걸린다. 어우동이 ‘문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주장. 그들의 주장처럼 실제 역사 속 어우동은 문란한 인물이었을까. 우리가 부끄러워할 만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규정 이상의 중벌로 처리된 어우동
조선 최고 ‘음녀(淫女)’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어우동(於宇同 혹은 於乙宇同)이었지만, 사건이 준 충격과 별개로 어우동의 행실은 사형당할 만큼의 중죄는 아니었다. 특히 세종시기에 있었던 감동(甘同) 사건과 경우는 유사하지만 처리결과가 달랐다는 것은 후대에 더욱 비교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학계의 중론은, 성종 시기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정비와 함께 조선의 유교화가 진행되면서 어우동이 ‘본보기’로 중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우동 사건에 대한 처벌은 단순한 ‘본보기’로 합리화되기에는 당시에도 후세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던 문제였다.
원래 조선에서 간통한 죄인에 대한 법적인 처벌은 명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의 다음 조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부녀로서 남편을 배신하고 간통한 자는 처벌을 장(杖) 100대, 유(流) 2천리에 처한다.
– 『대명률』, 형률(刑律), 간범(犯姦)
현대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굉장히 엄한 처벌이지만, 간통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형만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한 전근대 동아시아 유교 윤리는 사형에 대해 신중히 접근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반드시 검토를 거치며[覆審] 처벌은 신중하고 관대하게 해야 한다는[欽恤]의 논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형을 처하는 경우에도 만물의 기운을 해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곧장 사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확기 이후(겨울)에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어우동 사건의 처벌은 이 모든 ‘상례’에서 벗어나 있다. 단순한 간통죄 이상의 처벌을 받았으며 재고와 관용의 여지가 고려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교부대시(絞不待時, 사형 집행에 때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교수형에 처함)”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우동 사건의 이러한 사정을 “유교 윤리의 관철을 위한 본보기”로 전부 파악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유교 윤리와 법전 정비의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와 상충하는 문제들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리수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어른의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른의 사정 – ‘왕의 남자’들
사건 초기에 관계자들(어우동, 방산수 이난)은 세종 시기 감동 사건을 의식하여, 관련자가 많으면 오히려 감형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때문에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대부분 실토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함정이 되었다. 그중에 ‘높으신 분들’이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아래의 대화는 바로 그 ‘높으신 분들’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덕숭이 말하기를,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이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간통한 것은 마땅히 국문하여야 하는데, 정숙지(鄭叔墀) 등의 승복을 기다린 뒤에 국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금 어유소 등의 죄를 범한 전말이 이미 드러났으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산수가 제 죄를 면하기를 꾀하여 거짓 끌어댄 자가 많으니, 만일 정숙지 등을 추문하면 어유소 등의 진위를 알게 될 것이다. 어찌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서 갑자기 재상을 옥에 가둘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년) 7월 14일.
여기에 어우동과 관계된 것으로 등장하는 어유소, 노공필, 김세적은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문제가 된 것인가? 어유소의 경우는 무관이지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세조의 ‘공신’이기도 하다. 당시(1480년)에는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관(전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있었다.
노공필의 경우는 당시에 국방부 차관보라 할 수 있는 병조참의에 있었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아 동부승지-도승지-대사헌이 되는 인물이다. 김세적의 경우 당시에는 병조참지(국방부 국장급)에 지나지 않았지만 활솜씨로 인해 성종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다.
만일 신료 간의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세종 시기였다면, 방산수와 어우동의 의도대로 감형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종 시기는 공신-훈구세력과 초기 사림세력이, 무반의 중용에 반대하는 문관세력이, 그리고 실무-측근관료들과 감찰관료로서의 대간(臺諫)이 팽팽한 대립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한 가운데 신진 사림 중심의 대간(臺諫)들이 훈구-공신세력 및 국왕 측근들의 성적 스캔들을 주요한 정치투쟁의 소재로 다루고, 왕이 그에 대해서 무마하는 일이 이미 대체로 반복되어왔다. 이는 아래의 사례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 성종 7년(1476년) 4월 20일에 전술한 어유소의 ‘성추행 및 간통 의혹’에 대한 상소가 올라온다. 대낮에 궐 밖으로 나온 궁녀의 손을 붙잡고 희롱하다가, 그녀의 친가에까지 쫓아가 저녁때에나 집 밖으로 나왔다는 것. 대사헌은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처벌을 주장하나, 임금은 “공이 많으니 죄줄 수 없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한다.
② 사건 후인 성종 20년(1489년) 8월 15일에는 임금의 비서실장격인 승지 조극치가, 임금과 신하들도 참석한 연회에서, 달이 잠시 구름에 가려져 어두운 틈을 타 기생과 섹스를 벌이다 적발되었다. 그러나 처벌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임금은 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어우동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대간(臺諫)들이 임금이 총애하던 어유소, 노공필 등을 공박하는 양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어우동이 사형당하기까지 6번이나 상소로 올라옴으로써 구체화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방산수는 급하게 진술을 번복하여 문제를 벗어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어유소 등의 관련 여부를 방산수의 단순한 거짓말로 치부하던 성종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한다.
‘법률 바깥의 중한 형벌’
성종 11년(1460년) 9월 2일, 의금부에서 대명률에 의거하여 어우동을 장 100대, 유형 2천리에 처하고자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철저히 법리에 근거한 이같은 결정에 대해서 성종은 유난하게도 재상급 인사들까지 동원하여 이를 회의에 부치게 하였다.
당시 회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던 바, 영의정 정창손은 법대로 처리하기를 요구하였고, 강희맹 등은 이미 유사 사건의 전례에서도 법률에 따라 처벌하였으니 그대로 처리하기를 요구하였다. 또 젊은 신진 대간들인 채수, 성현 역시 법대로 처리하기를 요구하였다. 윤필상, 심회, 김계창(金季昌) 등이 중벌론을 주장하고 왕 역시 이들에게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으나, 회의의 중론은 “법대로 처벌하는 것이 옳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 국왕의 부 비서실장이라 할 수 있는 동부승지 이공이 다음과 같은 법전해석을 들고 나온다.
“어을우동이 전에 태강수 이동의 처가 되었을 때 수산수 이기 등과 간통한 죄는, 『대명률(大明律)』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의(比擬)하여, 교부대시(絞不待時)에 해당합니다.”
–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년) 10월 18일.
엄연히 개가한 사례와 법리적 경우가 다름에도, 비의(견주어 비교)한다는 해석을 덧붙여 바로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영의정 정창손과 대신들이 반박했듯, 가벼운 처벌은 비의가 가능하나 사형 같은 중벌은 함부로 비의를 실천할 수 없다는 논리, 유가에서 주창하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이 더 우선시된다는 논리가 더 타당성이 있었다. 그때 바로 임금의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김계창의 논의가 제기되었다.
“형벌이란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하는 것입니다. 어을우동은 음란하기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중벌[重典]에 처해야 합니다.”
–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년) 10월 18일.
김계창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중벌론을 진척시켰으며, 왕은 그것을 받아 ‘윤허’하는 형태로 어우동에게 사형을 확정하였다.
또한 사형이 확정된 시점(10월)에서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시기(겨울)이 멀지 않았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조차 기다리지 말고 처형을 서둘러야 한다는 ‘교불대시’의 논리까지도 관철되었다. 이러한 ‘중벌의 급박한 구형’에 대해서 사관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내리고 있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김계창은 임금의 뜻을 헤아려 깨닫고 힘써 영합하기만 하였다. 소위 ‘시대에 따라서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한다.’는 것이, (법률 내에서의 논의이지) 법률을 넘어서는 형벌을 말함이겠는가? 감히 이 말을 속여서 인용하여 중벌을 시행하도록 권하였으니, 이때의 의논을 사람들이 그르다고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년) 10월 18일.
사관은 논평을 통해서 어우동 사건이 당시의 논리로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김계창이 영합하고자 하였다는 ‘임금의 뜻’ 즉 ‘어심(御心)’을 언급한다. 성종 스스로가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이상, 이 사건에서 ‘어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어유소, 노공필 등에 대한 임금의 태도, 무리한 법률적 해석의 제기, 그리고 서둘러서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논의 등을 보면, ‘어심’을 짐작할 수는 있지 않을까?
뒷이야기
이러한 어우동 사건에 대한 처리에 대해 성종은 “후세의 윤리적 귀감”이 되기를 표방하였다지만, 당시인들은 물론 후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례로 중종 시기 옥종(玉終)사건이 어우동 사건과 비교되며 화제가 되었으나, 역시 그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법리적 문제가 제기되었고, 다수의 대신들이 “과한 중형은 불가하다”라는 논지를 따르고 있었다. 후대의 조정에서도 성종의 처분을 정상적인 처분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세종 시기의 감동 사건에 비해 성종 시기의 어우동 사건이 납득 불가능한 과중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있었다. 전술한 대로 조선 시대 여성윤리의 강화 때문이라는 시각부터 시작해, 감동과 달리 친족과 간통했다는 점 때문이라는 시각, 심지어 하위 신분과 간통하였기에 때문에 양반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는 계급적(?)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감동 역시 근친[緦麻親]과 간통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문제가 있었고, 은장이와 간통하였다는 점에서 계급적 문제(?)도 같았으며, 세종 시기 예교 윤리의 차원에서 감동을 특별히 중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다. (『세종실록』9년(1427년) 9월 14일)
오히려 두 사건 사이의 차이라면, 감동이 간통한 사람은 사건 발생 시점에서 주요한 지위에 있지 않은 인물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대부분의 관계자가 사건 발생 시점에서 군수, 판관 등이었다. 개중에서 당시에 정 4품인 호군이었던 황치신 정도만 출세했다) 어우동의 경우 사건 발생 당시에 주요한 지위에 있거나,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스캔들로 공격받은 인물이 포함되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결국 어우동이 법률을 넘어서는 중한 처벌을 받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예교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을까. 살기 위해 솔직하게 모든 것을 실토한 어우동과 그 연인 방산수의 의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정치적 정국에 휩쓸려 법을 넘어서는 중벌에 처해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