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네덜란드인이 세운 뉴 암스테르담이었고 영국인들이 점거한 뒤에는 새로운 요크(York)가 된 뉴욕은 미국이라는 용광로를 채운 수많은 이민들이 그 두려운. 또는 설레는 발들을 디디던 항구였다. 인종전시장으로서의 뉴욕의 역사는 그대로 미‘합중국’의 역사다. 타이타닉 호가 향하던 항구도 뉴욕이었고 영화 <대부>에서 비토 콜레오네가 미국에 입성한 곳도 뉴욕이었다.
뉴욕 중심가의 마천루부터 뒷골목의 쓰레기장까지 층층시하 빈부격차가 드리워진 가운데 맨 바닥은 당연히 초보 이민자들이었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로와지고 “기회의 땅”에서 기회를 얻기 위해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일해야 했다. 그 가운데에는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의 의류 공장도 있었다.
1911년 3월 25일 트라이앵글 공장의 비극, 그리고 퍼킨스
1911년 3월 25일 뉴욕 최대의 섬유공장이었던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사에서 불길이 솟았다. 공장은 고층 건물의 7층에서 9층까지를 쓰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화재 발생조차 뒤늦게 알았거니와 그들은 불만큼이나 끔찍한 공포에 맞닥뜨린다. 출입구가 잠겨 있었던 것이다.
“손버릇 나쁜” 노동자들을 단속하기 위해 기업주가 문을 잠갔던 결과였다. 소방차의 소방 호스는 6층 이상 물을 뿜을 수 없었고 출구가 없는 불구덩이의 지옥도가 트라이앵글 공장에 펼쳐졌다. 불이 무서운 사람들은 창문으로 몸을 던졌고 몸이 부서지는 것이 두려운 이들은 불길 속에서 속절없이 타죽거나 질식해 죽어갔다.
그들은 대부분 이민자들이었다. 얼마든지 싸게 부릴 수 있고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의 홍수 속에서 기업주들은 배짱을 튕겼고 오만을 부렸고 인간을 팽개쳤다. 열 세 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살인적인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장은 얘기할 거리도 못됐다.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번번이 짓밟혔다.
그리고 1911년 3월 25일 뉴욕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잃어야 했다. 창문에 두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길도 두려웠지만 바닥도 쳐다보기 싫은 소녀들은 눈을 감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누구나 짐작할 기도를 시작했다.
“살려 주소서. 살려 주소서. 하지만 데려 가시려거든 고통없이 데려가소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슬픔과 무력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 가운데 프란시스 퍼킨스라는 여성도 있었다. 뉴욕 소비자연맹의 사무총장이었던 그녀는 여성 및 소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탄하며 노동조건 개선 운동을 벌여 왔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부르짖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녀는 즉시 직업안전법 투쟁에 뛰어든다. 일찍이 빈민들을 도와 달라는 호소를 하기 위해 험악한 갱단 두목 목전에 뛰어들었던 그녀에게 불타는 건물 창 안에서 손을 맞잡고 기도하던 열 네 살의 두 소녀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화인(火印)과도 같았다. 그녀는 탐욕을 포기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설득하고 노동자들을 깨우치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 나갔다.
여성 근로자의 작업 시간을 주 54시간으로 제한하자는 운동을 벌일 즈음 (우리나라 기업가들 ’54시간’ 보고 또 한국 사람 일 안한다고 개탄할라) 만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녀를 눈여겨 보았고 1932년 그녀를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각료로 임명한다. 노동자들 편만 드는 장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업주들과 “여자는 조언을 하는 존재일 뿐 그로부터 명령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평생 애정을 쏟은 노동자들조차 어딜 여자가~ 분위기였다.
그녀는 그 반대를 타고넘으며 12년간 장수했다. 굽힐 건 굽히고 지킬 건 지키면서.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서 그녀는 굳이 튀려 하지 않았다. 장관석에 앉지 않고 장관 부인석을 찾아 앉았다. 구태여 득시글거리는 ‘마초’들에게 본질적이지 않은 싸움의 구실을 주지 않은 것이다. 그 12년간 그녀는 “아동노동제한, 주당 40시간 노동시간제, 고용보험, 최저임금제, 30%에 달하는 노조가입률” 등 지금은 상식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꿈 같았던 성과들을 이룩해 낸다.
노동 분야에서만 두각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후일 미국이 야만적 행위임을 사과했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집단 수용을 반대한 각료가 그녀였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고백한 노조 지도자를 추방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녀는 이로 인해 탄핵의 위기를 맞는다.) 2차대전 기간 중 모든 미국인들은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는 법령을 반대하여 루스벨트로 하여금 이를 포기하게 만든 것도 그녀였다. [1]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12년 동안 노동부 장관직을 지켰고 (그녀를 알아본 루즈벨트도 대단한 사람이다.) 적어도 1932년 이전의 노동과 1945년 이후의 노동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를 평생 한 길로 가게 만들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1911년 3월 25일의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는 가장 굵직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속절없이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뉴욕 시민들은, 미국인들은 잠자던 그들의 양심을 깨워야 했고 퍼킨스는 그 양심에 호소하고 기업주의 탐욕에 맞서면서 새로운 상식을 세워 나갔던 것이다.
미국이 참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나라라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가진 힘 가운데 하나는 그 거대한 압박의 무게, 지구를 지배하는 힘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그에 저항하는 미약한 빛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국에는 그 빛들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최소한 인정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할 줄 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도 전자의 미덕은 많았다. 그러나 후자는 어떠한가.
우리나라 최고의 공장이라 할 삼성그룹의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이 집단적으로 발병하는 희한한 ‘유전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수십 명이 이미 죽었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죽음들 앞에서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묻는 질문보다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는 외면이 더 만연하고, 창가에서 기도를 올리며 죽어가던 소녀들을 보며 발을 구르던 미국 시민들의 분노는 “그래도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해” 하는 야무진 착각 앞에서 무력하다.
프란시스 퍼킨스가 다시 살아나 한국에 온다면 아마도 그녀는 한국 사람들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요? 어떻게 당신들은 이럴 수가 있지요?”
원문: 산하
- 2005.3.14 Scinece Times, 김형근 객원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