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가 있다.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 2040년 가상의 영국을 무대로 한 SF영화다. 정부지도자의 지시에 불복하거나, 국가가 지향하는 피부색, 성적 취향,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간 후 사라지고, 거리 곳곳에 카메라와 녹음 장치가 설치되어 모든 이들이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평온히 일상을 유지하는 영국 국민들 앞에, 어느 날 400여년전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고 시도했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브이’라는 남자가 나타나서 잠들어 있는 국민들을 깨우고 혁명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다.
당시 매트릭스로 한창 잘나가던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남매)가 제작을 맡았고 앨런무어의 유명한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 해서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 나는 ‘매트릭스’만큼의 현락한 액션과 오락성을 기대하고 보았던 것 같다.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와 액션도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 없는데다가 ‘대사만 잔뜩’나오는 영화라서 큰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화의 진가’를 소화하기에 당시의 나는 아직 어렸던 것 같다.
그리고 작년에 케이블에서 다시 틀어주는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던 영화가 소름끼치도록 영화속 세상과 닮아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버랩되면서 너무나 감동적이고 감명깊게 와 닿았다. 특히 보면서 소름이 돋았던 장면은 정부의 어용방송으로 전락해서 철저히 통제되고 검열된 방송을 내보내는 국영방송국을 ‘브이’가 점거해 ‘영국 국민들을 향한 연설’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장면이었다.
유튜브에 마침 그 부분만 클립한 영상이 있어 아래 공유한다.
3분 정도의 시간을 들여 영상을 보는 것도 귀찮은 분들을 위해 ‘브이’의 연설을 여기에 옮겨 본다.
<브이의 연설>
런던 시민 여러분 잠시 정규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일상의 편안함이 좋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나 소요는 질색이죠. 여러분과 똑같아요.
허나, 우리가…
역사적 사건이나 위인의 죽음 혹은 전쟁이 끝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하는 만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11월5일을 맞아 잠시 그 의미를 되새겨 볼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입을 막으려고 누군가 전화통에 고함을 질러대고 곧 특공대가 오겠죠.
왜일까요?
정부가 대화 대신 곤봉을 휘둘러도 언어의 강력한 힘이 의미 전달을 넘어서 들으려 하는 자에게 진실을 전해서죠.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잔학함, 부정, 편협함, 탄압이 만연하고 한땐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잘못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 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두려웠던 거죠
누군들 아니겠습니까?
전쟁, 테러, 질병 수많은 문제가 연쇄 작용을 일으켜 여러분의 이성과 상식을 마비시켰죠.
공포에 사로잡힌 여러분은 서틀러 의장한테 구원을 요청했고 그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며침묵과 절대 복종을 요구했지요.
어젯밤, 난 침묵을 깼습니다.재판소를 파괴해 조국에 잊혀진 가치를 일깨워줬죠.
400여년전 한 위대한 시민이 11월5일을 우리 뇌리에 각인시켰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평함, 정의, 자유가 단순한 단어가 아닌 관점임을 알리길 원했죠.
눈을 가리고 살았고 정부의 범죄를 알지 못한다면 11월 5일을 무시하고 지나가십시오. 하지만 나와 생각이 같고 내가 느끼는 것과 추구하는 것에 공감한다면 들고 일어나십시오.
정확히 1년 후 의사당 앞에서, 그들에게 11월5일의 진정한 의미를 다신 잊지 못하게 해줍시다!
데자뷰 (기시감)
이 영화에서 묘사된 영국사회와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너무도 유사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놀라운 건 이 영화의 원작인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은 1988년 작품이고, 이 영화는 2005년 작품이란 것이다.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 담겨있는 작품들은 언제나 그렇듯 작품의 메세지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예언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어쨌건 이 작품을 통해서 나는 ‘기억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화 속 ‘브이’는 400년전 ‘가이 포크스’의 항거를 기억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들이 무엇인지 영국 국민들을 각성시킨다.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 폭압적인 정부에게 기꺼이 양도한 ‘공평함, 정의,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놓는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망각된 역사’는 ‘망각된 비극’을 다시 반복해서 되살려내고 ‘계승되었던 기억의 힘’으로 진보를 이루어낸 인류의 역사를 순식간에 과거로 퇴화시킨다는 것이다.
중력의 힘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중력을 이기는 힘의 공급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망각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지속적인 기억의 노력이 없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금새 ‘개인의 안위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자기가 살고있는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도둑 맞아 가는데도 무감각해질 수 있다. 공평, 자유, 정의, 생명의 가치들이 사라져 가는데도 나만 괜찮으면 상관없다는 태도로 무관심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려 한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들은 ‘기억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강력한 의지가 필요한 행위이며, 과거와 똑같이 침묵하고 방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항으로서의 기억’이 힘을 발휘하려면…
세월호 참사1주년을 맞아 정부의 조치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아픔을 기억하는데 동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악하고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의미로 기억하는 것’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내 삶의 현장을 ‘기억과 저항의 연대’에 직접 동참시키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의 5인치 LCD화면만 보면서 분개하고 안타까와하고 내 삶의 일상과 평안을 깨지 않기 위해 한치의 희생과 수고로움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단지 ‘기억에 동참’하는 것으로는 이 세상의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5인치 화면속에서의 세상에서만 살다보면 아는 지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는 글을 남기다가도, 5분도 안되어 웃긴동영상을 공유하며 낄낄거릴 수 있다. 그 정도의 짧고도 공허한 진정성의 에너지로는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인간노릇만 할 뿐, 나 자신의 삶과 이 사회의 변화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이 나라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5인치 디스플레이에서만 보이는 가상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서 ‘기억의 연대, 저항의 연대’가 있는 현장으로 가는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당신 한 사람이 서있는 공간, 대략 0.4㎡만 채워주는 행위만으로도 세상은 변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국민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브이 포 벤데타’의 마지막 장면처럼.
‘저항으로서의 기억’은 단순히 ‘관념으로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부를 ‘기억의 현장’에 동참시킬 때 강력한 힘이 생긴다. 그리고 역사는 ‘그런 기억의 현장’에 기꺼이 자신을 동참시켰던 수많은 이름없는 시민과 민초들의 힘으로 조금씩이나마 ‘진보’해왔다. 정부의 불의와 폭압에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4월19일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저녁7시에 세월호 범국민 추모제가 서울광장에 있다.
당신 한 사람의 참여는 서울광장에 0.4평방미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기억하는 것 뿐’이라면 부디 ‘현장으로 와서 기억해주기 바란다.’ 분명히 날씨는 추울 것이고, 바람은 세차게 불것이며, 비는 야속하게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현장의 그런 강렬하고 모진 자극들은 당신이 계속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불의한 세상을 바꾸려는’ 결심을 다지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에 이제 믿을 만한 건 힘없는 시민들의 이런 기억의 투쟁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최소한의 투쟁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 나라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