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나의 이상형은 ‘새로운 남자’였다. 최근엔 묻는 사람이 없어 대답해 본 적도 없지만 굳이 밝히자면 서른 즈음에, ‘함께 웃을 수 있는 남자’로 바뀌었다. 여자들이 웃기는 남자 좋아하는 건, 이미 알려진 바, 나이 드니 이상형도 진부해졌구나. 그럴 수 있지만, 우기고 싶다. 비로소 섹슈얼리티에 눈 뜬 것이라고.
여자들의 이상형은 개그맨?
여자들이 웃기는 남자를 그리 좋아하면, 이상형 1위는 개그맨이어야 하지 않나? 이성에 대한 이해가 그 정도 단계에 머문 남자는 여기, 없을 거다. 그렇다면 왜? (여자인 나도 궁금했다) 여자들은 그토록 남자의 유머 감각을 중시하는 걸까?
연애 초기를 먼저 살펴보자. 서로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여자와 남자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한계가 있다.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단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미니시리즈로 엮어 들려 줄 수도 없고. (진상이 따로 없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토론을 벌일 수도 없다. (현빈 보다 잘 생겼다면 용서한다) 어색하고 가식적인 대화 사이로 말줄임표가 찍히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주는데 ‘웃음’만한 게 있을까. 남자는 개그를 시전하거나, 가볍게 농담을 던지거나, 성공률이 높았던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여자를 웃기려 한다. 이 시기에 여자의 웃음은 미소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넉넉한 편이다.
연애가 무르익으면, (여기까지 온 커플이라면 어느 정도 쿵-짝이 맞을 테니) 대화의 행간을 굳이 웃음으로 메울 필요가 없다. 그 편이 더 어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자들의 ‘나 좀 웃게 해 줘’란 주문은 끝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웃기는 얘기 좀 해 봐’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가끔 남자 친구가 돌쇠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고. 대개의 경우 여자들이 ‘나를 웃게 해 주는 남자’를 바라는 것은,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에 (개콘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니다. 이즈음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농밀한 대화’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웃음이 필요하다. (이때도 눈치 없이 연애 초기에 하던 개드립 치는 남자는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는 거다)
대화는 ‘마주해서’ ‘주고받는’ 것이다. 마주한다는 것은 서로 눈을 맞춘다는 의미기도 하다. 말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다. 서로 눈을 맞추며 대화하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나아가 눈을 맞추고, 웃을 수 있다면 서로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여성들이 섹스에서 전희를 중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전희가 침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연애가 안정기에 돌입했을 때를 짧게 보자. 이 시기엔, 서로 웬만해서는 자극을 받기 힘들다. 사랑은 몸만으로도 마음만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한다. 하지만 이때야 말로 ‘둘 만의 웃음’을 웃을 수 있다. 함께 공유한 추억 때문일 수도 있고, 웃자고 한 말이 아닌데, 특유의 캐릭터 때문에 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웃음으로 인해 타인이 개입하기 힘든 ‘두터운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혹여, 너무 뻔-한 것을 길게 설명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 했으니. 이제 이해가 되지 않을까?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상형으로 말하는 ‘웃기는 남자’는, ‘나 좀 웃겨 주세요’가 아니라, ‘함께 웃고 싶어요’라는 사실을.
남자의 유머, 개그를 너머 공감으로
남자들의 어려움? 이해는 한다. ‘왜 먼저 웃기려고 하는 여자는 없을까?’ 웃기다 지친 남자들이 한번쯤 가져보았을 의문이다. 양성평등은 어디 갔느냐며, 나도 웃는 거 좋아하니 너도 웃겨 보라며……. (설마?!) 연애가 언제 쉬웠던 적 있나. ‘연애에 왕도는 없다.’ 통할 때까지 해 볼 밖에.
사실, 웃음이란 것은 어느 정도 캐릭터에 의존한다. 같은 농담도 캐릭터에 따라 극단적인 차이가 날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황에서는 동화에 나오는 ‘공주를 웃겨라’ 만큼 어려운 미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이 웃겨야 할 대상은 마법에 걸린 공주가 아니다. 어설프게 개콘 따라하지 말고, 마주 앉은 여자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그녀의 캐릭터를 이해한다면, 이에 김을 붙이지 않고도 웃길 수 있다. (원빈급 외모가 아닌 이상, 김은 절대 붙이지 말자.)
이 글을 시작할 때, 두 개의 단어를 무심코 떠올렸다. ‘농담’과 ‘밀당’. 아시다시피 ‘밀당’은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미묘한 심리전을 의미한다. 농담은 사전에 나온 대로라면 놀리거나 웃기기 위해 실없이 하는 장난말 혹은 우스갯소리를 뜻한다. 두 단어가 (적어도 연애 관계에 있어서는) 닮아 있단 생각을 했다. 농담은 슬쩍 던져보는 가벼운 장난말이지만, 때로 진담만큼 무거울 수 있다. 맥락을 살피면, 의도를 파악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취사선택 할 수 있다. 좋아할 듯 말 듯, 밀고 당기는 밀당처럼 애초에 어느 한 쪽이 농도를 달리 해 버리면, 스쳐가는 말이 되거나, 대화의 마침표가 돼 버린다. 그야말로 섬세한 작업인 것이다.
물론,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대상으로 의도된 지점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무림의 고수도 존재한다. 다만 그들도 속아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여자의 웃음’이다. 그녀가 얼굴이 일그러지도록 웃는다면, 당신은 망한 거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피식, 수줍게 웃는다면, (가능성이 보인다) 조금만 더 노력해라. 때론, 조건이 맘에 들어 웃기지도 않는 말에 미소 지어 주기도 하고, 불쌍해서 크게 웃어 줄 때도 있다. 모르긴 해도, 오르가즘 흉내 낸 여성보다 억지로 웃어준 여성이 더 많을 거다. 그러니, 웃기려는 노력만 하지 말고, 웃음을 구분해라. 웃음을 떡밥으로 활용할 것인가, 나와 코드가 맞는 대상을 찾는데 중요한 지표로 활용할 것인가, 생각해 보라는 거다. 그에 따른 차이는 분명 존재하니까.
훅업(Hookup ; 즉석 만남의 일회적인 섹스를 의미한다. 훅업에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유머에 대해서는 리수령에게 문의하기 바란다.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다.) 이 아닌 지속 가능한 연애를 원한다면, 일단 ‘유머 백과사전’식 앱은 모두 지워라. 대신 ‘공감의 코드’를 찾아라. 슬픔은 누구하고나 공유할 수 있지만 웃음은 다르다. 함께 웃기 위해선 ‘삶의 결’이 비슷해야 한다. 여자들이 ‘나를 웃겨 줘’가 아닌 ‘함께 웃고 싶어’를 원한다는 것은 바로, 나와 코드가 맞는, 삶의 결이 비슷한 남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웃기려고 애쓰지 말자. 주파수를 맞추자.
딱! 하고 맞는 순간
손끝에 전율이 일도록.
웃음이 절로 터지도록.
함께 웃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