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을 사게 된 것은 현재 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으로 있는 저자 우석훈 박사의 주간경향 인터뷰 때문이었다. ‘노동자라면 안 쓰는 게 최고다’ ‘개인의 소비는 별로 효과가 없다’ ‘불황 때 조정이 되는 사회여야 호황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반 케인지언’적인 말이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찾아보니 마침 ‘성숙 자본주의’라는 따끈따끈한 신간이 나와 있었다.
경제 성장에 대해서 저자가 가지고 있는 반감은 이 책의 1부 1장, ‘성숙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잘 제시되어 있었다. 그는 양적 성장은 끝났고, 이제부터 질적 성숙(특히 환경 보존)에 힘을 써야 한다는 전형적인 신좌파 환경주의자였다. 물론 저자가 환경 경제학을 전공하고 정부의 환경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했으며 한때 녹색당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성장은 경제 정책의 주요 목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다들 저성장을 걱정하고 ‘구조적 침체(secular stagnation)’를 두려워하는 지금 성장 자체를 부정하는 신좌파가 경제 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성장은 경제 정책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저자가 가진 저성장 담론의 뿌리는 물론 경제학의 기초 이론인 ‘수확체감의 법칙’이다. 최근 등장한, ‘수확체증’에 기반한 ‘내생적 성장이론’도 잠깐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성장론이 경제학 내에서 아주 인기 있는 분야도 아니라’면서 ‘어떤 선진국 정권도 성장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는 성장 강박증에 빠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성장론은 경제학 내에서 인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로 유명한 대런 아세모글루가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성장 경제학자이다. 선진국의 성장 모델 제시로 요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베노믹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개혁 담론은 결국 경제 성장이 목표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성장=토건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즘은 토건이 아닌 성장 수단도 많다. 선진국 일부에서는 심지어 토건이 부활하고 있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철도, 도로 등 인프라 시설을 지은 지 오래 되어 이제 전면 개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성장률은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개혁’으로 간판을 바꾸었을 뿐.
저자는 또 ‘케인즈식 재정정책의 토건화’를 내세우며 케인즈 거시경제학을 살짝 ‘밟고’ 지나간다. 인터뷰에서 절약의 역설을 부정하는 것을 보고 뭔가 케인즈 경제학과의 일대 결전을 기대했던 내게는 너무나 싱거웠다. 두 가지만 지적하자.
첫째, 케인즈 경제학은 성장론이 아니다. 자동차의 제원상 정숙주행시 속력을 시속 50km에서 시속 60km로 올리자는 것이 성장론이라면, 케인즈 경제학은 고장이 나서 아예 멎어버렸거나 정상 속도로 달리지 못하는 차를 정상적으로 달리게 하자는 것이다. 성장론이 중장기적인 잠재 성장률을 다룬다면, 케인즈 경제학은 단기적인 실제 성장률을 다룬다.
둘째, 케인즈 경제학은 좌파에 가깝다. 자동차가 멎으면 (=경기 침체가 되면) 가장 어려움을 겪는 계층이 바로 빈곤층이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케인즈는 노동당이 아닌 자유당원이었지만 케인즈 경제학은 2차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 경제 정책의 주요한 축을 이루었다. 스웨덴 사민당의 비그포르스 재무장관이 ‘케인즈 이전의 케인즈주의’ 정책을 썼다는 얘기도 유명하다. 미국에서 지금 케인즈적 경기부양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크루그먼 역시 자신을 ‘진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한국 자본주의가 양적 성장만 강조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성숙’이 필요하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성장률과 고용률 같은 몇 가지 거시 지표만 보면서 경제 정책을 시행하고 조정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맞다. 대상을 좀 더 작게 나누고 소그룹별로 접근하는 것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선진국(에 가까운) 경제라고 해도 양적 성장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거시 지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다 알고 있지만 (GDP가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시 지표를 통한 정책의 시행과 점검을 아예 때려치울 수는 없는 일이다. IMF, OECD, G20 등을 통한 국제적인 거시정책 협력 체제가 이미 갖추어진 상태에서 한국만 ‘우리는 성숙 자본주의를 추구하니까 거시 정책 협의에서 빠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어렵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성숙 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해서 중장기적인 성장률을 높이는 노력 (=’개혁’ 내지 ‘성장론’)과 단기적인 경기 부양책 (=’케인즈 거시경제학’)을 포기할 수는 없다. 환경 문제에 주력하는 신좌파 세력이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하는 나라가 세계 경제의 최우등생이라 할 수 있는 독일밖에 없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생태주의가 답일까?
이 책에 유난히 소득 분배 불평등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적은 것 역시 ‘신좌파’의 특성으로 내게는 느껴진다. 신좌파 운동이 발생한 곳 자체가 사민주의를 통해 소득 분배와 사회 복지라는 ‘구좌파’적 과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유럽이 아니었는가. 신좌파 자체가 ‘중상층-지식인’위주의 사회 운동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저자는 ‘생태주의(신좌파)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사민주의 노선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도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 책의 제1부 2장부터는 대부분 저자가 신문에 쓴 짧은 칼럼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나도 느낀 점을 덧붙여 본다.
제대로 된 전 세계 나라들 중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계 대출이 줄어들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청산주의’의 향기가 느껴지는 대목.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유럽같이 가계 대출이 줄어들었다면 정말 ‘제2의 IMF’ 같은 위기를 겪었을 것이며, 그 결과 양극화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심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 금융위기 때 디레버리징을 억제한 것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이다.
스웨덴의 경우 협동조합 주택 공급량은 전체 주택의 22%를 차지하며, 결과적으로 가격도 잡고 공급도 잡게 되었다.
스웨덴의 가계지출 중 주거비 비중은 28.9%로 상당히 높은 편이며,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계속 집값 상승이 이어져 2010년 조기 금리 인상을 단행한 여파로 현재는 오히려 디플레 우려가 나오고 있다. 협동조합은 만능이 아니다.
국가가 자금의 일부를 지원하고 지자체에서 택지와 기반 시설을 지원하면 수년 내에 조합 아파트 단지에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다.
국가와 지자체가 ‘전세금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산층 30-40대 가장’의 조합주택 마련을 지원할 필요가 있을까? 정책에는 우선 순위가 있는 법니다. 지원이 더 시급한 분야가 많지 않을까?
스위스 취리히는 삶의 질 세계 1위인 곳이다. 촘촘하게 꾸며진 주민자치와 직접민주주의, 그런 게 취리히의 힘이다.
취리히는 스위스 금융업의 중심지이고, 스위스 금융은 무엇보다 철저한 비밀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주민자치? 직접민주주의? 글쎄… 저자의 말대로 스위스에서 직접민주주의가 활발한 곳은 대부분 우파 세력이 집권하고 있다.
앞으로 20-30년이 지나고 나면 석유는 고갈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지면서 세상은 난리가 날 것이고 석유 이외 온갖 희소 자원도 고갈 위기에 처할 것이다.
1972년 ‘성장의 한계’에서 비롯된 환경론자들의 신조를 반복하고 있지만, 지금 이런 ‘석유 피크’론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해외 자원 개발을 뒷받침한 논리도 바로 이것이었음을 상기하자.
교과서적으로 보면 주식회사가 배당금을 높이는 경향을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가 아직까지는 오너가 있는 특수 구조이기 때문에 주주자본주의의 폐해가 덜하다고 보는 것 아닌가?
최경환 부총리의 고배당 유도 정책이 가계 가처분 소득의 증가 대책으로 그리 유효하지 않은 것은 맞다. 하지만, 배당성향이 높은 것이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배당성향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축에 들어가는 한국은 그럼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잘 극복한 모범 자본주의 국가인가? 주주자본주의보다 ‘오너자본주의’가 낫다고 전제하는 것을 보면 저자는 기본적으로 장하준 교수와 같은 입장으로 보인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주주자본주의를 옹호한 장하성 교수를 불러오고 싶다. 나는 장하성 교수와 마찬가지로 주주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친환경을 지향하는 많은 소비자협동조합을 비롯한 한국의 생태적 흐름이 농민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이다.
유기농, 친환경을 강조하는 ‘신좌파’운동을 진정한 좌파로 부를 수 있을런지 나는 옛날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다. 비싼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을 살 수 있는 계층은 결국 소득 상위 10%다. 소비자협동조합이 활발한 지역은 ‘중상층’이 밀집 거주하고 있는 일산 같은 곳이고. 유기농 친환경 농업이 농촌 노인 빈곤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어려운 듯하다.
우리가 성숙 자본주의로 간다는 것은 우리가 ‘지방’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 지역의 요소 하나하나가 균형을 잡고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 자체에는 100% 동의한다. 그런데, 저자가 강하게 비판하는 노무현 정부의 핵심 정책 목표가 바로 지역균형이었음을 상기하자.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세종시, 혁신도시, 기업도시가 과연 최선이었는지는 물론 따져 보아야 하지만.
부산 버블은 터진다. 집권 새누리당은 마치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이후 테마파크와 아파트 붐, 지방 공항 건설, 광역도시화 때문에 헤어나기 어려운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전세계 유명 해변을 한 번 돌아보시라, 해운대같이 초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둘러싼 곳이 있는지?
일단 호주의 골드코스트 사진부터 올린다.
버블의 판정은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부울경’ 내지 동남권의 경제력에 비추어 볼 때 해운대 주상복합 아파트 60평형 가격이 8억원 정도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품’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다. 동남권 신공항 얘기가 나오는 것도 기본적으로 김해국제공항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서울에 비해 ‘부울경’ 내지 동남권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제2위의 경제권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저자는 지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방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한국 자본주의의 형질을 바꾸려면 광주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토건이 아니라 복지로, 부채가 아니라 공동체로 가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출발이 광주여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산업 발전 없이, 중앙 정부의 교부금에 의존하는 복지만 가지고 ‘자본주의의 형질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윤장현 광주시장이 주도하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사업을 언급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자는 풀뿌리 공동체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
차관급이 수장이 되는 새만금개발청은 대선 전에 결정되고 법안도 통과되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새만금에서 면피 이상의 무언가를 하겠다고 특별히 결정하고 내놓은 것은 없다. 민주당이 중심이 되어서 새만금 문제에 대해 뭔가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 주면 대단히 고맙겠다.
한국의 양대 소외 지역이 강원도와 전라북도이다. 강원도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이 있다면, 전라북도에는 새만금이 있다.
그나마 새만금은 평창 올림픽보다도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고 있다. ‘새만금개발청’이 생겼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으니까. 현재 정부의 계획은 새만금을 ‘규제특례지역’으로 만든 뒤 중국 자본을 유치하려는 것으로 보이고, ‘약방의 감초’ 격인 카지노 얘기도 나오고 있다. 과연 이 방법밖에 없을까. 저자의 말마따나 ‘전북이 땅이 부족해서 경제적으로 발전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단기금리가 2% 아래로 떨어진 현재 자본이 부족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고백한다. 새만금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뭐라고 대안을 제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지역별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 그게 풀뿌리 민주주의와 토호 사이 싸움의 한 축에 들어가 있는 것이 옳다.
결국 ‘스마트 그리드’를 말하는 듯하다. 중장기적으로는 물론 올바른 방향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정착 과정에서 가계/기업/정부 사이의 ‘고통 분담’ 내지 ‘비용 분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기 요금을 올리든가, 아니면 보조금을 지급하든가 해햐 한다는 얘기다. 언제나 그렇지만 정치가 중요하다.
파리의 생제르망을 비롯해서 LA의 베벌리힐즈 등 부유층의 집단 거주지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강남은 특이하다. 이제는 잘사는 사람들이 강남을 떠날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재건축하면서 더 높은 집적도로 생태적 수용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하다.
강남은 LA가 아닌 뉴욕 맨해턴과 비교해야 한다. 잘사는 사람들이 강남과 맨해턴을 떠나지 않는 공통된 이유는 교육 여건이다. 홍콩 같은 곳에 비교한다면 강남에서 ‘생태적 수용 능력의 한계’를 운운하는 것은 설득력이 적은 듯하다.
앞으로 10조 원을 들여서 (서울에) 경전철을 놓을 것인가, 아니면 그 돈을 시민에게 교통비 형태로 지원할 것인가. 국토부가 하든 박원순이 하든, 토건은 토건이고 야합은 야합이다.
토건을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서울의 남은 대중교통 수요는 경전철보다 버스로 대응해야 한다.
한국의 원전은 지리상 서울과 가장 먼 대척점들에 세워져 있다. 원전이 가진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수명이 끝난 발전소는 그 자체로 거대한 폐기물이 된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내 견해는 ‘수십 년의 장기 계획을 통한 점진적 탈핵’이다.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 서울 한복판에 지으라’는 것은 정치적 수사일 뿐.
메밀국수의 원재료 가격이 중국보다 더 싸서 대기업들이 선택한 것이겠지만… 결국 대기업의 폭리에 가까운 유통 마진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 예로 등장한 회사로 보이는 풀무원의 작년 영업이익은 매출액의 1.9%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리는 아니다. 식품 대기업이 메밀국수의 재료로 중국산을 쓰는 이유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더라면 좋을 뻔했다.
도시 농업은 생태 도시라는 틀 안에서 보아야 한다. 노는 땅마다 고층 빌딩을 올리는 게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있는지, 아니면 텃밭과 공원들을 배치하면서 장기적으로 생태 건전성을 높이는 게 수익성이 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발전의 일정 단계를 지나면 오히려 생태적 건전성이 수익성도 더 높다.
생태 건전성을 평가해서 정부나 지자체에서 도시 농업에 지원금을 주어야 한다는 얘기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시 농업’은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적대적 공존’이라고 할까. 한국의 반일과 일본의 혐한이 지금처럼 유기적으로 결합해서 증오를 만들어 내는 시기는 처음 보았다. 한 일 두 나라는 원전과 미세 먼지, 사회적 안전 등에 관해서 시민사회가 더 많이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한일 협력이 중요한 대표적인 분야가 환경이다. 신좌파는 아무래도 민족주의적인 신념을 덜 가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유럽에서 유행하는 윤리적 결혼식은 대중교통이 가능한 장소에서 결혼할 것, 재활용이 가능한 물품을 사용할 것, 로컬 푸드를 사용할 것, 그래서 생태에 기여할 것, 이런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결혼 문화를 바꾸자.
신좌파가 중상층 지향적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주장이다. 언젠가 안수찬 기자가 소개했던, 도너츠 가게에서 일하는 젊은 부부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개소리’이다. 참고로 저 칼럼의 제목은 ‘이효리와 에코 웨딩, 윤리적 결혼식’이었다.
한국 자본주의에서 복지와 증세 논쟁은 단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부차적 문제라고 본다. 그만큼 우리의 토건은 강력했고, 그를 뒷받침하는 도시화 속도는 높았다. 거의 형식적으로 ‘나는 했다’는 시늉만 보이는 복지를 명분으로 농업 예산은 앞으로 5년간 5조 2천억원이 삭감될 예정이다.
내가 페이스북에 인용했던 문제의 구절이다. 물론 토건 예산을 줄이고 복지 예산을 늘리자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며,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토건 예산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복지 수요를 다 충족시키는 데 부족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주거 복지의 측면으로 볼 때 ‘집을 짓는’ 토건 사업은 계속 필요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삭감된 농업 예산이야말로 농촌 노인 빈곤층보다는 사업형 부농을 지원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저자가 그렇게 비판하는 ‘토호’들을 먹여살렸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불황 10년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핍형 솔로의 구매력은 제한되고 더욱 주변부화된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풀뿌리 경제에서 강력한 전환점이 나오지 않는 이상, 한국 경제는 더 찌질해질 것이고 지방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며 시민들은 더욱 주변부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신좌파적 생태환경주의는 이런 암울한 미래에 대해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가? ‘풀뿌리 민주주의와 풀뿌리 경제’는 너무 막연하다. 친환경 농업, 생활협동조합 같은 중산층-중상층 위주의 운동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친환경 유기농은 경제 성장에 의미있는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 크기가 작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별 의미가 없다. 생각해 보면, 그나마 생태환경주의와 거시경제 성장 논의를 연결시킨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었다.
원문: 새나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