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재벌집 아들과 이혼, 불륜, 시어머니로 점철된 막장 드라마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막장 드라마는 문화권이나 국가별로 그 소재가 조금씩 다를 뿐 다양하게 존재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한국식 막장 드라마와 유사한 장르로 미국의 경우 소프 오페라(Soap Opera) 라는 장르가 있고, 일본의 경우 아사도라(あさドラ – 아침 드라마)나 히루메로(ひるメロ – 오후 멜로극)이라는 단어가 있다.
소프 오페라의 경우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속극 장르로, ‘달라스’같은 작품이 대표적이고 어원은 이런 중심 시청자가 주부인 드라마의 스폰서를 자주 맡는 비누 회사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의 아사도라나 히루메로의 경우 한국의 ‘아침 드라마’와 거의 같은 의미로, 말 그대로 남편 출근하고 애들 학교가고 뒷정리를 끝낸 중년 여성들이 집에서 시간을 때우면서 보는 드라마 장르를 말하는 것이다.
각국 막장 드라마의 클리셰 역시 조금씩 다르다. 흔히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그 삼신기로 출생의 비밀(배다른 오누이), 고부 갈등, 불륜이 등장하는데, 소프 오페라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치정극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정말 여러 번의 결혼이나 이혼, 유산이나 다소 한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이중인격, 순수한 악으로 묘사되는 쌍둥이 형제, 기억상실증 과 같은 주제들이 자주 쓰인다. 그래서 사실 한국인이 느끼기엔 막장이긴 막장인데 한국식의 막장보다는 그냥 황당한 드라마쯤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잦다. 히루메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그 안을 뜯어보면 ‘역시 일제’라는 느낌을 주는 소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무튼 반도의 미친 드라마는 건전 드라마로 보이게 하는 미친 드라마를 살펴보자.
아내의 유혹은 건전 드라마다. 사쿠라 신쥬 앞에서는…
지금부터 소개할 사쿠라신쥬(さくら心中)가 바로 히루메로에 해당하는데, 개중에서도 좀 막장도가 심한(…) 편이다. 사쿠라신쥬는 2011년 1분기 일본 후지TV에서 호시다 요시코 감독의 지휘하에 월~금 13시 30분에 방영된 작품으로, 방영시간대가 정확히 히루메로(…)에 해당하는 드라마다. 실제로는 원작 소설이 있으며, 주연으로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배우 중 하나인 유민(후에키 유코)이 주인공 쿠시야마 사쿠라코 역을 맡아 등장한다. 괜히 낯익은 얼굴이 아닌 것이다!
간단한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벚꽃나무 밑에 버려진 여자아이 사쿠라코는 양조장의 무나카타 이쿠조에 의해 양녀로 들어와 자란다. 이쿠조는 사쿠라코가 버려진 곳에 있던 벚꽃나무를 집에 옮겨심고, 그 뒤부터 경영이 점차 어려워진다. 이 와중에 사쿠라코의 친모인 게이샤가 등장하고, 이쿠조의 친아들과 이쿠조는 사쿠라코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즉 부자가 한 여자에게 꽂히는 아름다운 배경이다. 이런 격동 속에서 고난을 개척하며 나아가는 사쿠라코를 조명하는 근성물(…)은 훼이크고, 실제로는 그냥 3류 불륜 막장물이다.
이 드라마의 압권은 한국 드라마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인간관계의 복잡성 – 소위 말하는 ‘개족보’인데, 계보가 다음과 같다. 워낙 막장이라 귀찮으면 굵게 처리한 부분만 보자.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그야말로 기가 막힌 수준이다. 어지러우니까 일단 본작의 주인공 사쿠라코의 남편들을 보자. 첫 번째 남편이 쿠시야마 유이치인데,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두 번째 남편이 쿠시야마 타다유키, 바로 첫 번째 남편의 ‘친아버지’다. 즉 한 여자의 재혼 상대가 이혼한 남편의 아버지인 것이다(…). 일본 성인용 망가에서조차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연달아 섬기는 일은 개그소재가 아니면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두 번째 남편에서 세 번째 남편을 보면 그 막장력이 더 증가한다. 세 번째 남편은 사쿠라코의 양아버지, 양조장 주인 무나카타 이쿠조의 불륜상대인 히데후지의 친아들 히로토인데, 문제는 이 히데후지가 바로 사쿠라코의 ‘친어머니’다. 즉 세 번째 남편 히로토와 사쿠라코는 친남매인 것이다!! 부연설명을 하면 원래 사쿠라코는 히로토 (세 번째 남편) 와 먼저 잤고 딸 사쿠라를 임신한 채로 유이치 (첫 번째 남편) 와 결혼한 것이다. 사실 부연설명이 더 막장이다.
그러므로 사쿠라코의 딸 사쿠라는 ‘친남매간에 낳은 딸’이며, 심지어 이 딸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마성의 여자다.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의 친아들, 켄으로부터 찜(..)을 당했고, 리쿠오라는 소설가 지망생에게 짝사랑을 받고 있다.(이 소설가 지망생이 쓴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사쿠라신쥬 – 즉 벚꽃과 함께 연인이 동반자살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쿠라와 사쿠라코는 타쿠마라는 같은 사람에게 동경과 그리움을 품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뭐냐?
NTR, 근친도 없는 <아내의 유혹>이 어찌 막장이라 할 수 있는가?
사실 필자도 워낙에 분량이 많은 작품이라 대략적인 시놉시스만 파악하고 있는 작품인데, 후반부에 왜 ‘사쿠라신쥬’라는 제목이 붙었는지가 묘사된다. 그런데 이게 필자가 본 결과 아내의 유혹 뺨을 후려갈기는 급전개다. 다소 어려울 것 같으니 일단 요약을 보자.
요약: 어머니를 능가하는 미친년 사쿠라는 남자친구와는 안 하고, 남자친구의 친구와 뻔뻔스럽게 쎾쓰를 한다. 명백하게 NTR(애인이 불륜을 저지름)을 당해 울부짖는 남자친구가 섹스하자고 조르니까 이 여자는 뜬금없이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겠다면서 같이 자살하자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남자친구는, 이 천하의 호구는 뜬금없이 “한 번도 안 대주고” 같은 소리를 하고, 사쿠라는 거기에 “사랑만으로 죽자”며 끝끝내 한번도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성의 사쿠라코의 피를 이은 딸 사쿠라는 위 도식에서 보이는 대로 켄과 리쿠오 둘과 관계가 있는데(이 셋은 어렸을 때부터 삼각관계다), 문제는 사쿠라가 몸을 주기는 켄에게만 주고, 자신의 애인 리쿠오에게는 주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안 리쿠오에게 켄은 “이런 관계로 다시 우리 3인의 관계는 돈독해진 거 아니야?“ 같은 개드립(..)을 던진다.
듣고 분노를 품은 리쿠오가 사쿠라의 방에 쳐들어가 “세-쿠스시요!”(섹스하자!)고 외치면서 옷을 벗고 사실상의 강간(…)을 하려다가 사쿠라가 울면서 “사랑과 섹스는 별개라면서? 리쿠 네가 그랬잖아. 난 널 정말 사랑해 으허헝” 하고 말하니 리쿠오는 책상 위의 소설책들을 엎어버리며 “내가 만든 함정에 내가 빠졌다”고 울부짖는다. 즉 자기가 그딴 소리를 해서 섹스를 못한다는 울분(..)
그 뒤에 사쿠라는 켄과 잠자리를 갖고, 켄이 내가 좋냐고 묻자 사쿠라는 “그냥 몸뿐인 관계야. 욕구를 해결하는 것뿐” 이라고 답변하는데, 켄이 거기에 반문한다. “그게 좋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참을 수가 없는 거잖아. 이 내 몸이 좋아서?” 그리고 켄이 사쿠라의 손을 같이 덮은 이불 속 자기 고간으로 끌며 그녀를 유혹하자 그녀는 정말로, 너무나 뜬금없이, 자신이 벌인 짓을 떠올리면서 리쿠오에게 달려간다.
사실상 켄에게 사쿠라를 NTR당한 리쿠오가 미친 듯이 술을 먹고 반쯤 폐인이 되어 있는데, 그런 리쿠오에게 사쿠라는 동반자살을 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상당한 병맛이다.
사쿠라 신쥬의 하이라이트, 명대사 공개!
“당신을 사랑한단 증거로, 죽겠어.”
“정말로 그런 말을?”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 사랑은 사랑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다고. 당신이 그랬잖아?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사랑의 증거를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라도.”
“그것….신쥬(心中 ; 치정으로 인한 동반 자살) 인가?”
“같이 죽어줄래..? 당신이 쓴 이 소설처럼 말야. 우리들도 신쥬를 해 버리자.”
“내..소설대로..”
“싫은 거야? 나랑 같이 죽는 건… 싫어?”
“두렵잖아. 죽는 것.”
“괜찮아. 내가 같이 있잖아?”
“한번도 섹스하지 않고…?”
“사랑만을 위해서 죽자. 리쿠, 죽자..”
“간단하게 그런 말 하지 말ㄱ..”
“사랑한다면서? 나를. 그렇다면..죽어버리자”
“역시 죽는 건가?”
“당신이 싫다면 나 혼자서라도 죽겠어. 그 벚꽃나무 밑에서, 당신만을 사랑했던 증거로”
“어떻게 해서라도 죽어야겠어?”
“응. 다른 길이 없어.”
“그런가…”
“당신은 살아남아서 내 일을 소설로 써주면 돼”
“안돼, 그럴 순..없어. 사쿠라 혼자서 죽게 할 수도 없잖아”
“리쿠…리쿠..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나도야…!”
그리고 식스센스급 급반전 엔딩…
필자는 이 광경을 보고 정말 감히 아내의 유혹이 넘볼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필자는 이 시점에서 막장드라마답게(워낙에 전개가 놀라워서) ‘아, 이런 비극이구나. 막장은 막장이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사쿠라신쥬는 <아내의 유혹>의 막판 초전개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반자살을 하러 벚꽃나무에 둘이 목을 매달았는데 무게를 못 이기고 나뭇가지가 부서져서 아무도 안 죽었다! 아내의 유혹처럼 급 해피엔딩으로 나아가는 것.
아무튼 그 ‘신쥬’의 충격으로 사쿠라는 더 이상 그녀의 몸이 켄을 원하는일이 없어지며 켄은 쿨하게 사쿠라를 놓아준다(…) 그러면서 사쿠라는 “아, 이제야 나 평범한 여자가 된 것 같아.” 같은 망언을 던진다. 리쿠오의 소설은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고, 리쿠오는 도쿄로 상경한다. 어머니 사쿠라코는 “마사루(피가 이어지지 않은 남매)와 결혼하고 싶다”는 유언과 함께 결국 마사루가 끄는 휠체어에서 벚꽃나무를 바라보다 죽고(…) 마사루는 누가 막장드라마 아니랄까봐, 사자의 염습을 화장처럼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혀 묘에 넣는다. 그렇게 그녀를 묻으며 드라마가 끝나는 소름끼치는 결말을 선사한다.
이것이 장대한 63부작 열도산 막장드라마의 막판 막장전개와 초절한 해피엔딩 수습(…) “타쿠마는요? 두 번째 남편은요?“ 다시 말하지만 이 드라마는 63부작 드라마고, 필자도 전체를 보진 못했다. 그러나 필자가 소개한 것만으로도 일본 막장 드라마가 절대 한국에 비해 뒤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열도의 기상을 보여주는 막장 드라마가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며 오히려 구조나 골격 면에서는 일본 쪽이 막장 드라마를 먼저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쿠라신쥬는 독보적(..)이며, 일본 내에서도 아내의 유혹의 한국 반응과 비슷한 반응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요컨대 딱히 다른 나라라고 막장 드라마가 없지도 않고, 심지어 어떤 건 확실히 더하기도 하다는 소리. 긴 글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마지막은 곧 방송될 한국의 막장 드라마 ‘가시꽃’의 시놉시스로 대신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