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 이후 수많은 조선인이 반쯤 넋이 나간 채 돌아왔다. 조선인 수천 명이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거나 죽창에 꿰어 죽어간 대학살극을 경험하고 돌아왔으니 그 트라우마가 오죽했으랴.
그 가운데 한 청년이 있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 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도무지 법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음악에 끌렸던 스물한 살의 젊은이는 우에노 음악 학교로 유학 갔다가 관동대지진을 경험한 후 서울로 돌아왔었다.
납덩이를 단 듯 마음은 가라앉고 발은 차꼬를 찬 듯 무거웠다. 거기다가 얼마 전 시집간 누나가 꽃다운 나이에 저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겹쳤으니 청년의 마음에는 잿빛과 칠흑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바람이라도 쐬려고 사립문을 나선 청년은 무거운 걸음을 옮기던 중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마음처럼 시커먼 밤하늘에는 반달 하나가 걸린 채 교교히 빛을 던지고 있었다.
우두커니 반달을 쳐다보며 눈만 껌벅이던 청년의 머리 속에 번갯줄같은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어떤 처량한 멜로디와 노랫말이었다. 청년은 집으로 돌아와 오선지를 찾았다. 그리고 한 노래를 완성한다. 그것이 ‘반달’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윤극영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아이들의 손뼉 장난 율동의 주제가로 근 80년을 불리웠던 노래. 눈을 감고 지그시 부르면 뜻하지 않게 코끝이 찡해지는 노래는 그렇게 탄생했고 1924년 10월 20일 동아일보에 발표된다.
‘반달’은 알아도 윤극영은 모른다는 분이 혹시 계실까 하여 덧붙여 두면 그는 ‘나란히 나란히’ ‘설날’ (까치 까치 설날은….) ‘고드름’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등등 수백 곡의 동요를 남겨 해방 이전 조선인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인의 동심을 삭막에서 면하게 해 주신 바로 그분이다.
대개 이분의 노래는 경쾌하고 흥겹다. 잘 부르지 않는 ‘설날’ 4절은 꼭꼭 씹어 부르면 웃음이 절로 머금어진다.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이집 저집 윷놀이 널뛰는 소리 나는 나는 설날이 참말 좋아요.”
툭하면 이느무 새끼를 입에 달며 몽둥이를 치켜드는 아버지들 앞에서 애들은 얼마나 울음보를 터뜨려댔을까. 그 무서웠던 아버지가 다 순해지니 아이들은 울 일이 없고 동네에선 쿵덕쿵덕 방아 찧는 소리에 윷이야 모야 환호 드높으니 그 얼마나 신나는 날일까 말이다.
” 빨간 우산 파란 우산”이 없어서 “찢어진 우산”을 들고도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을” 고드름 하나 뚝 떼서 먹고는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준 윤극영 선생의 명랑한 동요 가운데 ‘반달’은 특이하게 슬프고 을씨년스럽다.
무슨 놈의 쪽배가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그리도 잘 흘러간단 말인가. 윤극영은 훗날 나라 없는 설움이 노래에 실렸다고 회고했거니와 지은이의 의도에 관계없이 식민지 사람들은 이 노래에 자신들의 신세와 망국의 한을 실어서 불렀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개구리처럼 죽어간 동포들이 있고, 말깨나 하는 놈은 감옥으로 가고 인물깨나 하는 여인네는 색싯집에 가고, 다리깨나 튼튼한 놈은 만주로 떠나야 했던 시대의 그들의 신세가 바로 그 반달 과 다른 점이 무엇이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불온한 느낌은 사냥개보다도 더 빨리 알아채는 게 관헌들이라, 총독부는 이 노래도 금지곡 목록에 넣기는 했는데, 그 마음을 파고드는 멜로디에 반한 조선 거주 일본인들도 죄다 따라 불러대는 통에 그 살기를 누그러뜨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개 이 노래는 1절만 널리 알려져 있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노래가 끝나는 줄로 안다. 그런데 이 노래의 진짜 묘미는 2절에 있다. 그 2절은 이것이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 자신 구사일생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심경은 그야말로 삿대도 없고 돛대도 없는 쪽배만큼이나 흔들렸을 것이다. 그때 위안을 준 것은 부산항에 몰려든 동포들이었다.
대학살 소식을 풍문으로 알고 있던 부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위로했고 상륙하는 사람들에게 떡을 물리워 주며 위로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나은 것도 없는 처지에 그 개떡 한 조각은 얼마나 살가운 손이었고 든든한 어깨였고 기댈 등이었을까. 윤극영은 늙어서까지 그 풍경을 돌이키곤 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노래를 지을 때 가장 어렵게 지은 구절이 2절의 마지막 구절이었다고 했다. 슬프다 슬프다 해도 결국 앞에 드리워지는 희망이 있음을 담고 싶었고, 각고의 고민 끝에 나온 구절이 바로 저 구절이었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그래, 아무리 막막해 보이고, 세상이 시커멓고 배는 길을 잃어도 샛별이야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빛났다. 우리가 보지 않아서 그렇지. ‘반달’ 노래가 반도 위에 뜬 지 90년이 된다.
아직 갈 길 멀고 넘을 산 높은 우리를 위해 노래 한 번 불러 보자.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샛별은 아직도 반달의 항해를 지켜보고 있다.
원문: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