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이라는 이름이 있다. 국어 교과서에서 ‘살신성인’이라는 한자성어를 배웠던 텍스트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교과서에 따르면 오봉은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선교사로, 토인들의 교화에 힘썼다. 토인은 오봉을 잘 따랐다. 그러나 나그네를 습격하여 그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는 악습을 버리자는 말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오봉은 모일 모시 모처에 가면 붉은 모자를 쓰고 붉은 옷을 입은 나그네가 지나갈 것이니, 그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토인들이 가 보니 그런 나그네가 있었다. 다짜고짜 그의 목을 베고 보니, 그가 바로 하느님처럼 숭배하고 따르던 오봉이었고 토인들은 대성통곡하며 그들의 악습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의 내용이었다.
오봉은 선교사가 아니라 청나라 시대의 지방관이었다고도 하는데 설화 속에서 ‘토인’이었던 대만 원주민들의 야만성을 강조하는, 즉 ‘식민주의적 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설화로 평가받아 대만 현지에서는 거의 사라진 이야기라고도 한다. 대만 원주민들은 중국 한인들이 본격적으로 입도하기 전부터 대만 땅을 근거로 살아왔던 이들이다.
평지에 살던 원주민들의 경우 신속히 한화가 진행되었지만 고산지대에 살던 원주민들은 쉽사리 동화되지 않았고, 지금도 열 개가 넘는 부족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세디크 족이라는 부족이 있다. 대만의 원주민 부족 가운데에서도 소수이고 이웃의 다른 부족(아타얄족) 과 도매급으로 취급되기도 했던 부족이지만, 이 부족은 수십 년에 걸친 일본의 대만 통치 역사에서 잊기 힘든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1930년 10월 어느 날, 대만 중부 난터우(南投) 현 우서(霧社)촌에서 순찰을 돌던 일본인 경찰 요시무라 가츠히코는 순찰 중 세디크 족의 족장의 손자의 결혼 행렬과 조우한다. 신랑은 친절하게 경찰관에게 술을 권하지만 요시무라는 “금수의 피로 오염된”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해 버린다. 즉 ‘더럽다’는 것이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족장의 손자는 다시 잔을 내밀었지만 요시무라는 오히려 곤봉 세례로 족장의 손자의 위신을 시궁창에 메다꽂고 말았다. 아무리 일본 경찰이로기로서니 이건 해도 너무하는 처사였고, 분개한 몇 몇 원주민들이 요시무라의 멱살을 잡고 몇 대 쥐어박게 된다.
다음 날 족장의 손자는 경찰서를 방문하여 포도주를 진상하며 화해를 도모했으나 일본 경찰은 여지없이 이를 물리쳤다, 아마도 그 와중에 “더러운 것들” 따위의 언사가 세디크 족 인사들에게 던져졌을 것이고, 자존심에 상처 입은 세디크 족은 깜짝 놀랄만한 복수를 감행하게 된다. 1930년 10월 27일은 우셔촌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운동회 날이었다. 근처에 사는 일본인들도 모여들었다.
앞으로 있을 릴레이 경기에 대비하여 이찌 니 이찌 니 (헛둘 헛둘) 준비운동을 하기도 하고 원주민들이 하늘같은 일본 경찰을 구타한 것에 대해 침을 튀기기도 하면서 운동회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들 앞에 일장기가 게양됐다.
바로 그 순간 수백 명의 세디크 족이 운동장 사방에서 불쑥 나타났다. 손에 손에 칼을 쥔 그들은 수십 년 사무친 원한을 풀기 시작했고 운동장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했다. 일본인 130여 명이 살해당한 것이다. 족장의 복수는 끔찍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신부의 태아까지도 손을 댔다. 이름하여 우서 사건.
일본의 충격은 컸다. 시끄러운 조선과는 달리 대만인들은 양순하게 식민 통치를 받아들이는 편이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충격을 수습한 일본은 제국주의자들의 잔인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수백 명 세디크 족을 잡기 위해 4천 명이 넘는 중무장 병력을 동원했고 급기야 독가스까지 뿌려 댔으며 원주민들끼리 이간질을 시켜 자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학살극을 일궈 냈다. 천 명이 넘는 세디크 족이 죽었다.
후일 법정에서 요시무라는 자신이 포도주 잔을 거절한 것이 “위생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요시무라 개인의 결벽증이라기보다는 조선인들을 두고도 “더럽고 불결한 조센징”이라고 타박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함의 표출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이들의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특징인 ‘체취’에 대한 시비는 일본 뿐 아니라 모든 제국주의 국가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벌였던 일이었다. 자존심을 가진 인간 앞에서 코를 싸쥐고 “냄새 나니까 꺼져라.”고 예사로 말하곤 했던 것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또는 최소한 몽골 지배 하의 고려 이후로는 처음으로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과 함께 코 맞대고 살아가고 있는 한국에서도 저 말이 심심찮게 들리는 것은 마뜩찮은 일이다. 2009년 성공회 대학교 인도인 교수 후세인이 버스에서 봉변을 당할 때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한국인이 한 말은 1930년 대만의 일본 경찰 요시무라가 한 말과 같았다.
“더러운 아랍놈. 냄새난다.”
그리고 몇 달 전 한국 국적과 이름을 가진 우즈벡 출신의 여성이 목욕탕 이용을 거부당했다. 국회의원들의 무관심과 일부 기독교도들의 희한한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안이 아쉬워지는 순간이다.
인간에 대한 존엄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사회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끔찍한 복수를 당한다. 1930년 10월 27일 대만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 사실을 참혹하게 가르치고 있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