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3일 빛고을의 스러진 빛, 장재성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이 날이 학생의 날로 지정된 이유는 상식에 가깝다. 바로 광주 학생 운동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광주 학생 운동은 3.1운동에 필적하는 대규모 항일 운동이었고 광주에서 전국으로, 나아가 해외로까지 조선인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 만들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교과서에서는 대충 이렇게 배운다. 나주와 광주를 오가는 통학 기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고 희롱을 하자 이에 분개한 여학생의 사촌동생이 분노의 주먹을 날리고, 패싸움이 벌어지는데 역장 이하 일본인들이 조선 학생들 쪽만 나무라며 뺨을 때리고 경찰도 조선 학생들만 족치는 등의 차별 대우를 했고, 이에 분개한 광주고보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여, 일본인 학교였던 광주중학교 학생들을 공격하고 항일 시위를 벌인 것이 11월 3일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댕기머리가 잡힌 박기옥과 그 사촌동생 박준채의 이름은 역사 교과서에 굵직하게 남아 있다. 일종의 광주 학생 운동의 상징이자 주동자처럼 말이다.
물론 희롱당한 누나의 복수를 위해 “조선 년 좀 만져 줬다 왜?”라고 뻗대는 일본 학생의 턱에 분노의 주먹을 날린 박준채의 용기는 훌륭한 것이었고, 그 주먹은 일종의 억눌린 청춘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해 준 물꼬였다. 하지만 그런 류의 패싸움은 광주 뿐 아니라 조선 팔도 곳곳에서 벌어졌었고, 별 것 아닌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광주는 왜 달랐을까. 그것은 분노한 청춘들의 혈기를 ‘운동’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장재성이다.
장재성은 꽤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광주에는 광주일고, 광주상고(요즘은 동성고), 진흥고 등 전통의 야구 명문들이 여럿 웅거하고 있거니와 이미 1920년경에도 야구단이 여럿 있어서 대회까지 치르고 있었다고 한다. 장재성은 그 중 남동이라는 팀의 주전 선수였고 광주 대표로도 선발되기도 했다. 그 시기에 글러브와 배트를 구비하고 있었다면 도리깨 휘두르고 낫질에 하루를 보내야 했던 또래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형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재성은 야구보다는 다른 쪽에 더 관심이 많았다. 광주고보 5학년 때에는 광주고보와 농고생들을 합쳐서 ‘성진회’라는 독서 모임을 만든 것이다. 그 이름은 장재성의 친구 왕재일이 지은 건데 이름부터 좀 느낌이 남달랐다. 깰 성(醒) 나아갈 진(進). 당연히 그 모임은 ‘숙취에서 깨어나는’ 모임이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청년으로서 자신들의 현실을 각성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성진회’였다.
하필이면 그 모임의 일원의 형이 광주경찰서 간부가 있던 관계로 이른 해산을 하긴 하지만 그 조직원들은 은밀하게 모임을 지속했고 장재성은 일본에 유학을 가 있는 중에도 모교에서 항일 시위가 발생하자 급거 귀국해서 후배들의 동맹 휴업을 조직했으며 학교를 때려치운 뒤에는 ‘독서회’를 만들어 모임을 확대해 나간다. 이 독서회가 바로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자’였다.
11월 3일 시내에 진출하여 일본 학생들을 흠씬 두들겨 패 준 뒤 분노와 흥분이 뒤범벅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는 조선 학생들을 강당에 불러모은 것이 장재성이었다. 장재성은 지금까지 가동해 온 조직을 총동원해서 몇 가지 행동지침을 결의하고 있었죠. 가장 핵심은 이것이었다. “투쟁 대상은 광주 중학(일본인 학교)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다.” 즉 욱하는 마음을 엉뚱한 데 토하지 말고 허수아비가 아닌 그 주인을 때리라는 간단하지만 핵심적인 논리였고, 이는 광주 학생들의 마른 짚단 같은 마음들 사이에서 불씨가 되어 떠다닌다.
11월 12일 2차 시위가 결행된다. 그런데 이즈음 독서회 내부에서는 80년 광주를 예언하는 듯한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이 시위가 확대되지 않고 광주에서만 그친다면 우리만 다치고 깨지는 것 아니냐.”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장재성이었다. 그는 광주에서 시위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그것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갈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아마도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광주가 아싸리하게 혀 불면 쩌그 신의주라고 거시기허겄냐.”
마침내 12일, 광주시내는 학생들의 검은 교복의 바다가 된다.
하지만 정작 장재성은 일제 경찰의 예비 검속에 의해 11일 이미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를 필두로 경찰에 연행된 학생 수는 260명. 광주 시내 고등보통학교 학생의 20퍼센트였다. 그 모든 이들 가운데 장재성은 최고의 징역형을 받는다. 일본 경찰 인증 주동자가 된 셈이었다. 최후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동이 원기왕성하게 각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한다. 사회에 나간 후에는 더욱 참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청년들을 규합해 전국적인 봉사 활동을 펼친다. 2천리 밖 함경도 장진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니 그는 역시 게으른 사람이 못되었다.
잃어버린 이름, 장재성
광주학생운동이라는 독립운동사의 금자탑을 쌓아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장재성의 이름을 우리가 잃어버리게 된 건 그가 좌익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사회주의 정당 조직에 가담하기도 했고, 해방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는 가운데 북한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 죄로 그는 광주학생운동의 주동으로 받은 형과 같은 7년형을 받는다.
그가 진짜 충실한 사회주의자였는지, 분위기에 휩쓸린 민족주의자였는지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극좌부터 극우까지 총천연색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생생하게 살아 있던 당시에 북한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지나치게 무리한 처사이니까. 하지만 그가 부인에게 남겼다는 말 한 마디는 그의 사상적 방황(?)이나 그 내면의 성향의 일단을 단편적이나마 드러내 준다.
“나는 아무래도 그쪽하고는 안 맞는 것 같다. 너무들 과격해.”
장재성이 그쪽하고는 맞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이쪽으로부터는 아예 버림을 받는다. 전쟁 때 광주 교도소에 갇혀 있다가 후퇴하는 경찰에 총살당했던 것이다. 1962년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훈포장할 때 건국공로 훈장 대상자로 올랐다가 역시 좌익이라는 이유로 그 이름은 제외되고 말았다. 동시에 광주학생운동은 여학생의 탐스러운(?) 댕기머리가 불러일으킨 패싸움의 자연 발화가 일으킨 산불같은 사건으로 역사 교과서에 남게 된다.
부지런하고 우직한, 그래서 바보스러울이만큼 정의로왔던 사람들에게 우리 역사만큼 잔인한 역사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또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참담하게 스러지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간 역사를 알면서도, “독립군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거의 명백한 진리로 통용되는 냉냉한 분위기에서도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간단없이 생겨난다는 것이겠다. 11월 3일은 학생의 날. 그런 청춘들을 대대로, 그리고 수없이 배출한 날이었다.
장재성도 그 중의 한 빛이었을 것이다. 보름달만큼 밝았지만 역사의 블랙홀로 흔적도 없이 빨려들어간 한 빛이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11월 3일 학생의 날에 이르면 그 이름 석 자를 더듬어 보고 싶다. 1929년 11월 3일의 빛고을을 만든 사람 중의 하나. 장재성.
원문: 산하
참조: 한겨레신문, <발굴 현대사인물 장재성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