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1일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있던 베트남의 남반부 ‘베트남 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에서는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독재자 응오 딘 디엠을 내몰려는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의 5.16처럼 해병대가 선봉이었다. 쿠데타군은 정부군의 저항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방송국, 군 사령부, 주요 기관을 장악해 나갔다. 대통령의 체포는 시간 문제였다.
다음날 새벽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총공세를 전개하는 가운데 응오 딘 디엠은 비밀 통로로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응오 딘 디엠은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그리고 그는 압송 과정에서 자신의 동생과 함께 비참하게 사살당한다.
응오 딘 디엠 자신은 꽤 청렴했고 독립 투쟁 경력도 있었고. 호치민이 함께 하자고 손을 내밀만큼 중량감 있는 인물이었다. 호치민도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며 조국의 독립과 반 제국주의 투쟁에 헌신했듯 응오 딘 디엠도 평생 결혼하지 않고 나름대로 베트남을 위해 노력했다. 남베트남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조폭들을 일소하고 산업 발전의 기틀을 닦는 등 업적도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소통의 부재와 강력한 독선,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단점을 지닌 동생 응오 딘 뉴의 존재였다.
형제를 망친 그 사실 하나만 놓고 보면, 응오 딘 뉴는 흡사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을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그 형과 같은 존재였다. 응오 딘 뉴는 형의 안보보좌관이자 비밀경찰 책임자로 일하면서 수만 명의 베트남인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죽여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 잔인함 앞에서 미국도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그의 부인도 부창부수, 남편과 쌍벽을 이루는 악녀였다. 고딘 뉴 형제의 인권 유린과 불교도 탄압에 항의하여 노승 틱광둑이 분신했을 때 ‘베트남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마담 뉴가 뇌까린 말은 길이 기억되고 있다.
“재미있네. 땡중의 바비큐 쇼라니.”
몇년전 4대강 반대를 유언으로 남기고 소신공양했던 문수 스님의 몸뚱이를 기필코 부검을 해야겠다고 우기던 한국 경찰의 정서와도 조금은 공통점이 보인다.
응오 형제는 용감했다. 자전거 길 만들겠다고 강변에 시멘트 처바르고, 멀쩡한 공항 공단 팔아먹으려들고, 전 재산을 기부한다고 나발을 분 뒤 나랏돈 들여 사저를 짓고 불법까지 서슴지 않았던 코리안 ‘리 브라더스’와는 가히 난형난제라고 할 것이다.
베트남은 여느 제 3세계 국가들과 같이, 그리고 해방 직후의 한국과 같이 토지 지주와 소작인 관계의 갈등이 컸다. 이 문제가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미국도 응오 형제를 압박했다.
“제발 토지 개혁 좀 하란 말이다.”
1956년 토지 소유를 일정 부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지만 그 정보를 훤히 알고 있던 지주들은 땅을 가족 명의로 골고루 돌려 놓음으로써 재산상의 손실을 피한다.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도 인구의 10퍼센트가 납북으로 길쭉한 베트남 땅의 5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어느 나라하고 비슷한지 몰라. 그 와중에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다.
응오의 가문은 수백년 전에 가톨릭에 입문했던, 베트남에서는 가장 오래 된 가톨릭 집안 출신이었다. 응오 딘 디엠 자신도 신학생으로 신부를 꿈꾼 적이 있었을 정도. 문제는 자신의 교우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특혜였다. 토지 배분이나 사업 관련 편의, 세금 감면 등 모든 문제에서 가톨릭 신자가 우선이었다.
소망교회 출신이 아니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쭉정이가 됐던 나라 사람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좀 정도가 심했다. 베트콩에 맞서 싸울 총기도 가톨릭 우선으로 지급했고, 심지어 불교가 공산주의자들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사원을 폭격하고 스님들을 살해하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졌다. 자기가 시장으로 재임하는 도시를 통째로 하느님께 봉헌하고 싶었던 어느 인사처럼, 그들도 남베트남을 하느님께 갖다 바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불교도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하고, 응오 딘 디엠은 앞서 말한 길을 걷는다. 마지막 순간 그는 신부에게 고해를 하면서 “주님께서 자유 베트남을 지켜 주실 것”을 기원한다. 4.19 때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 놓고도 “불의를 보지 않고 일어나지 않은 건 죽은 국민입네다,”고 묘한 소리를 했던 이승만의 발언만큼이나 그 해석이 여의치 않은 발언이고. 그리고 “퇴임 후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고 하신 어떤 분의 말만큼이나 신빙성이 없는 고해성사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기원도 한이 맺힐 대로 맺혀 버린 쿠데타군의 자비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두 형제는 압송 과정에서 베트남군 장교가 쏜 총에 피 흘리며 쓰러진다. 1963년 11월 2일 한때 용감했던 형제는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몰골로 자동차 트렁크 안 시신으로 변했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