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이 인류의 근대사에 끼친 영향을 몇 마디로 정리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 혁명 과정에서 ‘자유 평등 박애’ 가운데 특히 ‘박애’(우애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라는 단어가 그 얼굴을 감싸 쥘 일들이 수없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 대륙은 물론 대서양 건너 아이티에 이르기까지 불어닥쳤던 신선하고도 강력한 바람의 진원지였다.
하지만 좀 이상한 구석도 있다. 프랑스의 현대사에서 그 혁명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에 태연자약할 뿐 아니라 그 반동에 적극적이었던 사례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계 기업 가운데 유독 프랑스 기업들의 횡포는 꽤 유명하다.
임금 체불, 인권 유린 등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기는 혁명 전 귀족들이 농민 보듯 하고, 그 노조를 까부수기는 나폴레옹 오스트리아군 쳐부수듯 하는데다가 툭하면 바스티유 감옥에 가둬 버리라고 악을 쓰는 압제자의 현신처럼 보이는 모습은 발레오나 까르푸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이 나라가 왕년의 그 혁명의 나라 또는 홍세화 선생님이 말씀하신 똘레랑스의 나라 맞나 싶을 정도다.
이 의문스러움의 절정에 해당할 일이 1961년 10월 17일 일어난다. 이 날을 이해하려면 알제리와 프랑스의 관계를 먼저 짚어 보아야 한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던 프랑스였지만 알제리는 그 모든 식민지와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겼다. 이미 점령한지 100년이 넘어, 알베르 까뮈를 비롯하여 그곳에서 태어난 프랑스인만 해도 부지기수인, 식민지가 아닌 그냥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일 뿐이었던 것이다.
제 3세계 독립의 열풍 속에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이 독립을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자 프랑스는 사생결단 그들을 진압하고 나선다. 5조 프랑이 넘는 전비와 연인원 80만 대군을 투입해서….. 그 와중에 알제리인들은 100만이 죽어 나간다.
알제리에 살던 프랑스인들이 많았다면, 프랑스에 사는 알제리인들도 많았다. 이들 가운데에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지지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본국에서 벌어지는 프랑스의 잔인한 진압과 학살에 항의하며 일어선다. 그들의 주된 공격 대상 가운데 하나는 경찰이었다. 1961년 파리의 가을은 낙엽 밟는 소리는 커녕 폭탄 소리가 요란했고 나폴레옹이 맞았던 러시아의 겨울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었다. 경찰관만 해도 두 달 사이에 11명이 죽었다.
10월 2일 알제리 이민들의 공격에 희생당한 경찰관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때 파리 경찰청장은 문명 선진 국가이자 자유 평등 박애의 혁명을 근간으로 삼는 나라의 관료답지 않은, 봉건 시대 전쟁터에서나 있었음직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다. “프랑스인 한 명의 목숨을 10배로 갚아 줘라. 책임은 내가 진다. 적들을 박살내라.” 이 사람의 이름이 모리스 파퐁 (언젠가 한 번 얘기한 것 같은데).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을 솎아내어 가스 수용소로 보내 버렸던 전력의 소유자였다.
경찰청장이 책임지겠다는데 못할 일이 무엇이랴. 경찰은 알제리인을 대상으로 파리 및 인근 지역에서 오후 8시 반∼다음 날 오전 5시 반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고 알제리인 소유 가게의 영업까지도 금지령을 내렸다. 전쟁 포로 취급도 분수가 있지 알제리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민족해방전선 지지자도 있었지만 1,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목숨 걸고 독일군과 싸웠던 알제리인들과 그 후예들도 많은데 이게 무슨 만행이란 말인가. 그들은 10월 17일 대규모 시위를 조직한다.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이를 진압하던 파리 경찰은 보름 전 자신들의 보스가 행했던 선언을 실행에 옮긴다. 평화로운 시위에 총알을 퍼붓고 몽둥이로 두들겨 죽이고 심지어 의식을 잃은 알제리인들을 세느강에 던져 버리거나 숲 속에 파묻어 버린 것이다. 무려 1만2천명의 알제리인이 체포되었고 숫자 미상의 알제리인이 죽었다. 이 대참변 뒤에 프랑스 경찰이 발표한 희생자 수는 놀랍게도 ‘3명’이었다.
프랑스는 1998년에야 이 참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40여명이 죽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희생자는 2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그조차 확실하지는 않다. 누가 쏘았고 왜 때려 죽이고 어느 정도를 손발 묶어 세느강에 던져 버렸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관련 문서는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기밀로 묶여 있고, 모리스 파퐁은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실어나른 죄는 추궁당했지만 1961년 10월 17일의 학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소명조차 없이 세상을 떴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