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 Golub의 The History of Mana: How an Austronesian Concept Became a Video Game Mechanic를 전문번역한 글입니다.
마나의 역사: 어떻게 오스트로네시아의 개념이 비디오 게임의 작동원리가 되었는가
2007년 1월 17일, 차원이동선 엑소다르가 칼림도어 북서쪽 해변 앞의 하늘안개 섬(Azurmyst Isle)에 불시착했다. 고통 가운데서도 난민들은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세상, 그들처럼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일부인 그 땅에 뿌리내렸다.
그들은 타락하지 않은 에레다르 종족인 드레나이로, 불타는 성전 확장팩에서 게임에 추가되었다. 나는 드워프와 엘프를 플레이하는데 지쳐서 드레나이로 플레이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의 이름을 Izzycohen으로 짓고 보석세공을 가르쳤다.
2년 후 Izzycohen은 강력한 주술사가 되어 전투에서 ‘예수님 빔’이라 불리는 회복의 빛을 뿌리며 동료들을 치료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가 대장군인 나젠투스가 우리를 계속해서 쓰러뜨렸고 나는 회복 주문을 0.1초 빠르게 하기 위해(날 믿어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0.1초는 긴 시간이다.) 내 갑옷을 조절하는데 2시간을 썼다. 내가 ‘내 갑옷’이라고 한 것은 사실 내 캐릭터가 입고 있는 모든 갑옷을 분석하기 위한 스프레드시트다. 장비의 각 부분 — 투구, 가슴, 다리의 사슬갑옷 — 들은 내 캐릭터의 능력치를 바꾼다. 내 목표는 마나를 너무 많이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속’능력치를 올리는 것이었다.
주문사용자들은 마나에 의지한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마나는 드루이드, 마법사, 성기사, 사제, 주술사, 흑마법사들이 움직이는 마법적인 에너지이고 수치로 측정된다. 서로 다른 주문들은 서로 다른 수치의 마나를 사용한다.
게임 작동원리의 많은 부분이 마나를 현명하게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목표를 달성할 만큼 주문을 자주 사용하지만 마나가 일찍 떨어질 정도로 자주는 아니게. ‘마나 오링’(마나를 전부 사용)된 캐릭터는 더 이상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공격당하면 무력하게 당해야 한다. 캐릭터들은 마나 사과빵과 마나빵을 먹어서 마나를 보충할 수 있다.
마나 오일을 무기에 발라서 소유자가 마나를 회복하는 속도를 빠르게 할 수도 있고 마력이 깃든 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나 베틀이 필요하다. 마나 거머리나 마나 뱀과 같은 마법적인 맹수들은 주문사용자들을 잡아먹으려고 돌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마나는 ‘드레나이’와는 달리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제작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타투’나 ‘터부’, ‘티키’ 처럼 ‘마나’는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한 갈래인 폴리네시아어파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 어파의 27개 언어에서 마나라는 단어는 ‘초자연적인 힘’을 뜻한다.
태평양의 섬 문화가 마나라는 개념의 기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개념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 다른 판타지 게임에서 배웠다. 전성기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태평양의 섬 주민들보다 많은 플레이어를 가졌었다: 북미, 유럽, 남미, 중국과 다른 나라들에 1천만 플레이어가 있었다.
그때 통가, 피지, 사모아, 바누아투, 뉴질랜드(파케하든 키위든 백인이든 포함해서), 미국의 태평양 섬 주민들까지 합쳐도 670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워크래프트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마법적 에너지를 나타내는 파란색 막대를 마나라고 부르는 개념은 세계의 판타지 소설이나 비디오 게임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Pago Pago(역주: 아메리칸 사모아의 수도)에서 온 컨셉이 전 세계 게임 문화의 일부가 되었을까? 어떻게 오스트로네시아의 영적인 힘이 엑소다르를 띄우고 내 드레나이 주술사의 삶의 일부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태평양으로, 오스트로네시아인 그들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5,500년 전의 그들의 시점으로 보자. 우리는 그들이 쓴다고 생각한 언어를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이라고 이름붙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프랑스어나 그리스어, 힌두어가 인도-유럽어를 같은 조상으로 두듯이, 타이완이나 마다가스카르나 많은 태평양 사람들이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인류학자나 언어학자들은 인도-유럽 문화(전차나 인신공양, 서사시들)를 정립했듯 오스트로네시안들의 일관성있는 모습들을 종합해보았다.
인도-유럽인들처럼 그들도 여행을 좋아했다. 거의 4천년동안 오스트로네시아어 사용자들은 그들의 고향인 타이완 바깥으로 나가서 인도-유럽 이주민들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남쪽으로 또 서쪽으로 항해했다.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바닷사람이었고 숨막히는 여행에 알맞는 땟목과 카누를 만들었다. 일부는 서쪽으로 지금의 모잠비크까지 뻗어나고 마다가스카르에 정착했다.
대부분 그들은 동쪽으로 움직여서 인도네시아, 뉴기니, 바누아투를 가로질러 뉴질랜드와 하와이까지 다다랐다. 그들은 결국 아메리카에 다다라서 고구마를 가지고 돌아와서 그것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말에서 빌려온 ‘kumara’라고 불렀다. 그들은 아마 남자 대신 여자들의 혈통을 따르는 모계제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 문양으로 장식된 멋진 도자기들을 남겼고, 그들의 지도자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멀리서 온 이방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상당히 많은걸 알고 있다 — 아닐 수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을지라도 오스트로네시아 전문가들의 세계에는 논쟁거리가 많다.
우리가 아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이 태평양으로 퍼져나가면서 마나라는 단어를 함께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 어원은 시간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지만, 언어학자 Robert Blust는 이 단어가 원래 ‘강력한 바람’, ‘번개’, ‘폭풍’등의 의미였다고 주장한다.
그 용어의 뜻이 바뀌면서 원래 가졌던 날씨에 대한 의미가 사라지고 힘과 효과에 대한 느낌만 남았다는 것이다. 솔로몬 제도 마키라 섬의 목사이자 신학자인 Aram Oroi는 마나가 손전등의 불이 켜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당신은 강력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고 — 딸깍 — 그 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태평양 탐험에서 오스트로네시아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따라잡는데는 수백년이 걸렸다. 그리고 따라잡았을때 그들은 매우 놀랐다.
1769년 제임스 쿡(James Cook)은 타히티로 가서 그곳 원주민(Rai‘atean)의 귀족이며 “18세기 타히티의 마키아벨리”인 투파이아(Tupaia)를 만났다. 쿡과 같은 유럽인들은 태평양의 지리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투파이아는 쿡에게 50개가 넘는 섬들이 있는 태평양 지도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쿡과 함께 여행을 떠나서 그를 뉴질랜드로 데려다 주고 통역을 도왔다. 이들 여행에서 유럽인들은 깜짝 놀랐다.어떻게 대양에서 수천 마일씩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만큼이나 서로 비슷한 언어를 쓸 수 있을까? 그들은 어떻게 이 섬들을 시계나 육분의도 없이 항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은 — 그리고 알아차리는데 몇 년이나 걸렸던 것은 — 대양은 태평양 섬 주민들을 갈라놓는게 아니라 연결해주는 무언가라는 점이었다.
태평양을 이해하려고 했던 유럽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어설펐다. 1832년에 프랑스 귀족인 뒤몽 뒤르빌(Durmont D’urville)은 태평양을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 얼굴색이 좀 더 밝은 폴리네시아의 하와이, 뉴질랜드, 타히티는 더 문명화되었다고 여겨진 반면 멜라네시아 — 말 그대로 흑인들이 사는 곳 — 는 가장 미개한 곳처럼 보였다.
미크로네시아는 그 외에 나머지들을 다 모아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 개념이 적당하지 않음에도 오늘날까지 이 분류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로네시아인의 언어와 문화는 이 세 지역 전체에서 발견된다. 마나는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선다.
유럽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짧은 이주의 역사를 지닌 폴리네시아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더 많은 신비가 유혹하고 있었다. ‘멜라네시아’는 4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그 문화와 언어, 유전자는 훨씬 복잡하게 섞여있었다.
이 지역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 중에 하나는 코드링턴(Robert Henry Codrington)이었다. 코드링턴은 1830년 잉글랜드에서 성공회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의 최고 명문들인 차터와 옥스포드를 나왔다. 1867년 그는 멜라네시아 선교 활동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의 노퍽 섬으로 갔다.
1849년에 설립된 선교회의 목표는 기독교와 문명을 남서태평양, 특히 ‘멜라네시아의 섬’으로 알려진 바누아투, 솔로몬 제도, 비스마르크 제도와 뉴기니 본토 일부에 전파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선교회의 자만심이 굉장히 불쾌하겠지만 다른 빅토리아 시대의 식민 계획들에 비하면 매우 잘 이루어진 편이었다: 목표는 문명화지만 선교사들은 멜라네시아인들을 평등하게 — 실질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예의바르고 영국인의 상식에 맞게 — 대했다. 무엇보다도 선교회는 교화를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수십년에 걸쳐 이해할 때까지 지역의 문화를 배우고 언어를 주의깊게 공부했다. 사실 핵심 목표는 태평양 섬 주민들이 선교사로 그들의 고향에서 활동하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코드링턴이 1867년 노퍽 섬에 도착했을 때, 그의 과업은 미래의 선교사들을 가르칠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드링턴은 그보다 더 잘 해냈다. 이후 20년간 그는 섬의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는 학교의 주방장이었고 학생들의 결혼잔치에 낼 건포도 푸딩을 만들었다.
그는 건축에도 손을 대서 학교의 식당을 디자인하고 교회의 대리석 기둥을 마감하는 석공으로도 일했다(그는 편지에 “나는 돌을 다듬으면서 지치거나 싫어해본적이 없다”고 썼다). 그는 책을 인쇄하는 법을 배우고, 사진을 찍고, 사람들에게 합창을 가르쳤다. 결국 그는 1871년부터 영국으로 은퇴하는 1877년까지 선교회의 수장으로 일했다.
유럽인들은 코드링턴이 도착할 때까지 한 세기 동안 멜라네시아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그가 멜라네시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일한 만큼 오래 지낸 사람은 없었다. 그가 갔던 것처럼 그 지역을 여행한 이도 드물었고, 여생을 학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민족지학적 작업물로 만들어낸 이는 전혀 없었다.
코드링턴의 걸작인 “인류학과 민속학을 통해 살펴본 멜라네시아인들의 민속(The Melanesians: Studies in their Anthropology and Folk-Lore)”은 1891년 출간되었다. 그가 ‘발견’한 개념 중 하나가 마나였다.
코드링턴은 그의 책에서 “멜라네시아인의 마음은 마나로 통칭되는 초자연적인 힘 또는 영향력에 대한 믿음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 라고 썼다.
이것은 평범한 인간의 힘을 넘어서고 일반적인 자연의 움직임 밖에서 작용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대기 속에서 사람이나 사물에 붙어 존재하며, 그 작용을 위해 부여받은 결과로만 나타난다. 내 생각에 이 단어는 태평양 전체에서 흔히 쓰인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 방식으로 나타나는 힘이나 영향력이다. 하지만 이 자체는 물리적인 힘이나 소유자의 힘 또는 우월함으로 나타난다… 사실 모든 멜라네시아의 종교는 이 마나를 자신이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모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코드링턴의 저서는 빅토리아 후기의 독자들 사이에서 굉장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코드링턴의 전문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십년간 멜라네시아에서의 경험을 주의깊게 사색했고 (물론) 옥스포드 출신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책은 멜라네시아에 대한 첫 책이라 경쟁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1890년대 후기 유럽인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경계를 뛰어 넘어 자라고 있었다. 문헌학과 고고학은 히브리어 성서보다 앞선 고대 근동의 수천년의 역사를 드러냈다.
선교사들과 민족학적 작업들은 피식민지들의 (그들의 분류에 따르자면)’종교적’ 믿음에 대한 설명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불교, 힌두교, 유교의 문헌들이 — 이들 전통은 서양에서 분류에 따라 — 고대 사상의 세계를 드러냈고 그 유구함과 복잡성은 기독교 세계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인간 문명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간단해 보였다. 하나의, 권위있고, 과학적인 문명 발전의 서술은 미개인들로부터 가장 문명화된 유럽인들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이 그들 자신보다 얼마나 아래에 있는지 계속 정해왔던 유럽인들에게 코드링턴의 마나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가져왔다.
마나는 종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미발달된 형태를 나타내는가? 결국은 기독 신앙으로 도약하는 씨앗이 될 수 있을까? 통합적이고 영적인 힘에 대한 이 믿음이 오렌다(orenda)나 세미(zemi), 오키(oki)와 같이 북미 원주민과 같은 먼 지역의 개념과 비슷한가? 사실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제 그 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안다. 가까이서 면밀히 알아보면 마나의 개념이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적 체험이라는 것은 허튼 소리임이 명백해진다.
하지만 오늘날 대중 문화에서의 마나는 스타워즈의 “포스”에서부터 맥스 롱의 ‘후나’에 대한 가짜 하와이 뉴에이지 신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종교적 체험으로 존재한다. 어떻게 일반적이고 영적인 힘으로서의 마나 개념이 무효화되는 동시에 편재하게 될 수 있었을까?
한 가지 답은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1907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엘리아데는 르네상스의 철학에 대한 연구로 그의 학문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남아시아의 언어와 인도 철학을 공부하던 인도로 가는 길에 그는 요가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1930년대에서 40년대까지 엘리아데는 루마니아의 지식인이자 작가로 지내면서 의도치 않게 그가 파시스트일 것이라는 (또는 아닐 것이라는) 위키피디아의 편집 싸움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엘리아데는 그가 일하던 고등연구원(École Pratiques des Hautes Études)이 있던 프랑스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어졌다. 그의 주요 철학이 담긴 “영원회귀의 신화(Myth of the Eternal Return)”와 “종교형태론(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두 작품을 낸 것도 거기서였다.
엘리아데는 모든 인간이 신성함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지닌다고 믿었다. 신성에 대한 비문화적이고 직접적인 경험으로 그는 이것을 ‘성현(hierophany)’이라 불렀다. 하지만 신성은 압도적으로 강력하고 불가해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완전히 이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신 엘리아데는 우리의 신에 대한 경험은 우리의 문화에 따라 걸러지고 이해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엘리아데는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성현의 형태에 대해 세계적인 비교연구를 제안했다. 이 안에서 마나는 ‘역현(kratophany)’, 즉 원초적이거나 거슬러 올라간 개념이 아니라 여러가지 중 하나일 뿐인 힘으로서의 신성에 대한 체험이었다.
이것이 엘리아데의 체제가 천재적인 면이었다. 이는 르네상스와 같은 새로운 인문주의였지만 모든 문화에 대한 존경을 가지고 모두를 평등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이는 인간 영혼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특화된 학문 분과가 되었다. 편리하게도, 이 분과는 엘리아데 자신이 관리 감독했다.
1956년 엘리아데가 시카고 대학교에 고용되었을 때 그의 목표를 실현할 기회가 왔다. 그는 신학대에서 그의 위치를 패권을 잡는데 사용했다. 그는 대학원생들을 훈련시키고, 학술지를 만들고, 종교적 개념의 역사에 대한 3권짜리 총서를 쓰고, 백과사전을 수정하고, 수업에서 읽을 선집(코드링턴의 마나에 대한 서술이 포함된)을 출판했다.
엘리아데는 미국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번성한 저가 페이퍼백의 대규모 성장을 이용했다. 하퍼 콜린스의 “Torchbook” 과 같은 시리즈들은 빠르게 확장되는 대학 출판 시장에 특화되어 있었고, 엘리아데는 그의 이전 저서에서의 테마를 계속 반복하며 매 권을 연달아 찍어냈다. 이 책들은 다시 엘리아데의 학생들과 추종자들에 의해 다시 선집에 들어갔다. 엘리아데 산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확장이었지만 대단한 확장은 아니었다.
그의 타이밍은 완벽했다. 1950년대 후반에 베이비부머들의 덩어리는 미국 교육 체계를 벗어나 반체제문화로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자란 세상을 대체할 낯설고 새로운 세상을 찾고 있었다. 사이케델리아는 내면의 우주를 탐색할 수 있는 길로 잘 알려졌지만 젊은 미국인들은 우주적 보조를 위해 나라 바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나 조셉 캠벨(Joseph Campbell)과 같은 지식인들이 널리 읽혔다. 엘리아데는 이런 문화적 움직임의 작은 부분일 뿐이었지만 그는 태평양에 대해 읽고 마나에 대해 쓴 몇 안되는 학자였기 때문에 우리의 이야기에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마나의 개념은 베이비부머들이 소비했던 유럽과 아시아 문화의 홍수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마나가 반사회문화에서 게임으로 도약한 캘리포니아에서 그들처럼 소비해보자. 앨런 와츠(Alan Watts)는 1957년에 “The Way of Zen”에서 미국에 일본 불교를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 젠 센터는 빅서에 에살렌 인스티투테(Esalen Institute)가 세워진 1962년에 세워졌다.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는 1964년에 “The Psychedelic Experience”를 출판했다. 1965년에 반지의 제왕이 미국에서 페이퍼백으로 출판되면서, 톨킨 매니아들과 급성장하지만 존경받지는 못하는 판타지 픽션 장르의 적자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의 “사이케델릭한 중세주의”는 독창적인 시대착오회(the Society for Creative Anachronism)를 낳았다. 같은 해에 비틀즈는 사이케델릭 음악을 내기 시작했고 조지 해리슨은 팬들에게 라가를 선보였다.
이것이 던전 앤 드래곤(Dungeons and Dragons)이 1974년 처음 나왔을 때의 세상이다. 최초의 현대적인 롤 플레잉 게임으로서 D&D의 혁신은 판타지 픽션 설정의 테이블탑 워게임의 룰 체계와 사람 사이의 즉흥적 연기와 수년간 게임과 팬 커뮤니티에 침투되어 있던 롤 플레잉을 결합했다는 점이었다.
D&D는 본질적으로 이후 모든 비디오 게임과, 롤 플레잉 게임과, SF와 판타지,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전 세계의 대중 문화의 형태를 잡았다. 그 영향력은 주사위 굴림판 안의 20면체 주사위처럼 근대 문화의 역사 사이를 튀어다녔다. 심지어 그 반동조차도 강력해서, 안티-D&D 텔레비전 영화 “미로(Mazes And Monsters)”는 톰 행크스가 최초로 주연을 맡았고 그를 초대형 스타의 반열에 올렸다.
마나는 그 D&D 룰북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게리 가이각스(Gary Gygax)와 다른 D&D의 제작자들이 그들의 마법 시스템을 제한된 수의 주문만을 기억(memorize)할 수 있고, 한번 사용하면 잊어버리는 잭 밴스(Jack Vance)의 소설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별 상관 없었다. D&D를 탄생시킨 게임과 판타지 월드는 곧 거기서 파생된 생태계를 낳았고, 많은 수가 원본보다 나았다. 그들은 종종 마법 사용을 위해 ‘주문 점수’나 ‘에너지 점수’등의 편리함을 이용했다. 주문은 사용하기 위해 포인트를 소모하고, 당신은 쓸 수 있는 한정된 포인트를 가지고 있어서 포인트를 모두 소모하면 주문을 쓸 수 없다. 주문 점수는 게임 작동원리에 있어서는 좋았지만 게임이 이루어지는 판타지 세계에서는 말이 되지 않았다. 주문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힘이 뭐지? 마나의 개념이 구원자가 되어주었다.
마나가 한동안 판타지와 게임 팬덤에서 떠돈것은 엘리아데 때문이기도 했지만, 래리 니븐(Larry Niven) 덕도 있었다. 1969년에 래리 니븐은 그의 단편 “Not Long Before The End”를 출간했다. 그 소설은 주위가 마나로 가득차 있는 먼 과거를 배경으로 했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마나를 소모하고 서서히 고갈시켰다.
그 결과는 우리의 현재인 마법이 없는 세계였다.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의 듄(Dune)이 출간된지 4년 후이자 산타바바라 기름 유출 사건이 있었던 해에, 어떤 사람들은 니븐의 작품에서 재생불가능한 자원에 대한 환경주의적 메시지를 읽어냈다.
사실 니븐의 영감은 그가 대학에서 읽었던 피터 워슬리(Peter Worsley)의 “The Trumpet Shall Sound”에서 얻은 것이었다. 워슬리의 책은 먼 과거를 그들의 지식과 능력이 우리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강력한 선조들의 시대로 여기는 뉴기니의 카고 컬트를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멋들어지게 쓰였고, 자주 선집에 포함되었으며, 파생작들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마나라는 단어가 퍼져나갔다.
켈리포니아의 사이케델릭한 중세주의 분위기에서, 엘리아데의 영향력은 좀 더 직접적이었다. 베이 에이리어는 갖가지 자라나고 있는 운동들의 본거지였다: 독창적인 시대착오회, 신이교주의, D&D에 빠져든 많은 사람들.
그들 중 하나인 데이빗 하그레이브(David Hargrave)는 1970년대 중반에 Arduin Grimoire로 알려진 던전 앤 드래곤의 변종을 만들었다. 하그레이브는 그의 게임에서 마법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훗날 북아메리카 개혁 드루이드파의 대드루이드(Archdruid)가 되는 아이작 본위츠(Isaac Bonewits)의 도움을 받았다. 본위츠는 엘리아데의 공감과 모험의 감각에 대한 사랑을 공유했으며,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그가 직접 설계한 ‘마법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본위츠는 엘리아데를 분명하게 읽었고, 그가 읽었던 이질적인 종교적 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물이 본위츠가 창립을 도왔던 운동인 ‘신이교주의(neo-paganism)’였다. 사실 그는 진짜 마법이 작동하는 방법에 기초해서 게임 내의 마법 체계를 만드는 법을 기술한 “Authentic Thaumaturgy”라는 책을 1978년에 내기도 했다. Arduin Grimoire나 RuneQuest나 다른 게임들은 그들의 ‘판타지’ 마법을 만들 때 본위츠의 ‘진짜’ 마법에 대한 전문 지식에 상당히 의존했다.
D&D의 테이블탑 위에서 컴퓨터로의 도약은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마나가 따라잡는데는 좀 더 걸렸다. 컴퓨터는 LSD처럼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사용되긴 했지만, 결국 반체제적인 사람들의 자기표현을 위한 도구로 전용되었다.
이 전용의 많은 수가 본위츠의 집회에서 차로 이동할만한 거리인 실리콘 밸리에서 이루어졌다. D&D를 플레이하고 래리 니븐을 읽는 지식인 나부랭이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했으니 그야말로 천상의 조합이었다. 사람들이 D&D에서 영감을 얻은 게임을 만드는 속도는 놀랄만해서 던전 앤 드래곤이 출간된 것이 1974년 1월이었는데 1975년 8월엔 첫 번째 컴퓨터 게임이 나왔다.
초기에 던전 앤 드래곤에서 영감을 받은 게임들은 테이블탑 게임의 복잡한 주문 작동원리를 가지기엔 너무 대충 만들어져 있었다. 1980년대까지 컴퓨터 게임들은 마법의 복잡한 구현을 갖지 못했다. 그 때까지 가장 영향력있는 게임들은 주문 점수 체계를 사용했다.
1983년에 나온 울티마 3는 화면에 ‘MP.’라는 줄임말로 표시되는 마법 점수(magic points)를 사용했다. 유명한 일본의 롤 플레잉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도 1987년에 나왔을 때 MP를 사용했다. 같은 해에 미국에서는 영향력 있는 게임인 Dungeon Master가 ‘MP’의 ‘M’이 마나임을 명확히 했다.
컴퓨터 게임의 세계도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것은 아니었다. 마나 또한 다른 곳으로도 침투했다. 1993년 리처드 가필드(Richard Garfield)는 독자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덕후 왕국인 트레이딩 카드 게임을 만들어낸 매직 더 개더링(Magic: The Gathering)을 만들었다. 매직 더 개더링에서 플레이어들은 자신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강력한 마법사라고 상상했다.
두 플레이어가 그들이 직접 짠 덱에서 패를 꺼내서 대결했다. 각각의 카드는 (약간 단순화하자면) 상대의 카드를 공격할 수 있는 몬스터나 마법이었다. 중요하게는 대결이 즐거웠지만, 게임에 더해진 중독적인 요소는 야구카드처럼 팩에 넣어서 파는 카드였다. 팩을 열 때까지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 결과 플레이어들이 그들의 완벽한 덱을 위해 카드를 교환하거나 사고파는 거대한 2차 시장이 생겼다.
마나는 플레이어들이 대지(땅 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에서 수확하고 핸드의 카드를 발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적인 에너지로 매직 더 개더링의 핵심이었다. 이게 래리 니븐의 “Magic Goes Away” 시리즈를 연상시킨다면, 사실이 그랬다. 심지어 게임 안에는 니븐의 이야기에서처럼 주변의 모든 생물과 마법물체를 파괴하는 마법의 원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원반의 이름은 “네비니랄의 원반(Nevinyrral’s Disk)”으로, 거꾸로 읽으면 원반의 기원이 드러난다.
매직 더 개더링은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들도 주변 사람들 모두와 즐겼다. 블리자드(Blizzard Entertainment)의 사람들도 포함이었다. 원래 어바인에 위치한 블라자드 사람들은 베이 에이리어에 있는 자매사인 블리자드 노스(Blizzard North) 사람들처럼 비디오 게임을 만들다가 쉬는 시간에 매직 더 개더링을 즐기곤 했다. 블리자드 노스의 아티스트 중 한 명인 Michio Okamura가 예전에 Arduin Grimoire의 일러스트를 맡았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된 업계였다.
블리자드는 1994년에 컴퓨터 게임인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Warcraft: Orcs & Humans)을 발매하면서 역사를 만들었다. 지금은 워크래프트 I이라 불리는 첫 번째 워크래프트는 “실시간 전략” 또는 “RTS” 게임이었기 때문에 혁신적이었다. 이전에 대부분의 전략 게임들은 기본적으로 체스처럼 움직였다. 당신이 먼저 모든 유닛을 움직이고, ‘턴 종료’ 버튼을 누르면, 컴퓨터가 자기의 유닛을 움직이는 식으로 계속 진행했다.
워크래프트는 최신 PC 성능의 도움을 받아 ‘실시간’으로 움직였다. 당신이 부대에 명령을 내리면 바로 눈 앞에서 부대가 움직였다. 그 게임은 오늘날의 조마조마하고 중화기로 살육 잔치를 벌이는 것과는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는 것보다는 천천히 뭔가를 쌓아올리듯이 고조되는 것과 더 비슷한 리듬이었다.
이 쌓아올리는 느낌은 말 그대로 당신이 건물을 쌓아올리기 때문에 더 늘어났다. 워크래프트에서 당신은 부대 뿐만 아니라 경제도 지휘해야 한다. 당신은 몇 마리의 일꾼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농장과, 병영과, 제재소와 성을 짓는다. 그리고 병사들이 전선을 압박할 수 있도록 자원 흐름을 조절해야 한다.
워크래프트의 주문을 쓰는 유닛들은 주문 점수 작동원리를 사용했고, 그들의 마법적인 에너지는 녹색 막대로 측정되었다. 어떤 종류의 마법적인 에너지였을까? 누구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보아하니 개발자들은 그들의 게임에 대해 “오크와 인간이 싸운다”보다 깊은 배경 이야기는 만든 적이 없었다. 직원 하나가 다른 일을 진행하면서 배경 이야기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995년에 발매된 워크래프트 II에서 모든것이 바뀌었다. 게임을 위해 세계를 만들고 배치하는 일을 전담하는 직원 하나가 있었다. 이 게임에서, 마나는 이제는 푸른색으로 변한 막대로 측정되는 마법적 에너지의 공식적인 단위였다.
1996년에 블리자드 노스는 첫번째 액션 RPG인 디아블로를 만들었다. 디아블로는 심지어 워크래프트보다도 배경 이야기가 없었지만(블리자드 노스의 창립자인 Max Schafer는 “모두가 몽둥이로 좀비를 때리고 싶어했지만, 모두가 어설프게 쓰여진 판타지 원고를 보고 싶어하진 않았죠”라고 밝혔다.), 마나를 측정하는 크고 파란 구체가 있었다. 마나는 이제 블리자드 용어 사전의 일부였다.
곧 판타지 우주 전체가 디아블로와 워크래프트를 둘러싸고 생겨났다. 워크래프트 III와 그 확장팩인 워크래프트 III: 프로즌 쓰론이 나왔다. 오크 대 인간의 종족간 대립은 호드 대 얼라이언스의 다종족 연합 대립으로 바뀌었다. 더 많은 파벌들이 참전해서 이제는 엘프와 드워프로도 플레이할 수 있게 되었다. 컷씬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졌고, 사실적인 3차원 캐릭터가 전투에서 싸우는 모습을 휙휙 움직이는 시네마 베리떼 스타일의 카메라로 담아냈다.
처음으로 불타는 군단(Burning Legion)의 지옥불정령(Infernal)이 아제로스에 떨어졌을 때는 마치 TV 촬영팀이 목숨을 걸고 그 사건을 찍어낸 것 같았다. 전투들을 연결하는 이야기들은 숙명의 대결과 연속극을 반씩 섞은 순수 문학에 가까워졌고, 게임의 줄거리와 등장인물들은 몇 년에 걸쳐 쓰여지면서 하나의 세계, 전설, 정신이 되었다.
워크래프트 I 발매 10주년인 2004년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나왔을 때 워크래프트는 일리아드 만큼이나 크고 치밀하게 쓰여진 신화적 세계이자 맥도날드와 대적할만큼의 수익을 내는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마나는 거기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태평양의 제도민들에게 마나의 역사는 그것이 그들의 삶과 유산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마나의 역사가 중요하다. 일단 들여오고 나서 마나는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마나의 일대기를 식민지의 문화를 뒤지고 다닌 서양인들이 마나를 문화적으로 도용한 이야기로 읽고 싶을 것이다. 그들이 옳을수도 있다. 선교사들, 인류학자들, 역사가들은 마나를 그들의 책에 실어 전 세계의 도서관들에 보관했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그들과 달리 마나를 소중히 여겼다.
그들은 판타지 게임과 상상속의 세계를 만들었고 자신들이 만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나를 놀이 속에 집어넣고, 삶의 일부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역사와 자기 이해 속으로 끌어다 놓았다. 그들은 자신의 치유 주문을 최적화하기 위해 몇 시간씩 쓰고 드레나이 주술사의 삶을 살았다. 게임은 그들이 누구인지의 일부가 되었고, 마나는 그들의 유산 일부가 되었다.
그들이 마나를 빌려온 건가? 맞다. 그들이 마나를 이국적인 것으로 취급했나? 아마도 그렇다. 하지만 마나와 함께 즐기면서, 그들은 마나를 명예롭게 만들었다. 세계는 마나의 일대기와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하고, 문화를 가로지르고 시간을 관통한 그 이야기들은 드물게 기록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가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마나처럼, 그들은 뒤쪽에서 누군가가 그 위에 빛을 비출 때까지 놓여 있다가 – 딸깍 – 우리는 그들이 지닌 진정한 힘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 글에 도움을 주었다. 이 글의 학문적인 버전의 공저자인 Jon Peterson이 꼼꼼하게 읽어준 데 대해 감사하고 싶다. 또한, 그들의 작업과 경력에 대한 질문에 답해준 Steve Perrin과 Larry Niven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Robert Blust 교수, Terry Brown 목사, Michael Craddock이 내가 사실들을 제대로 썼는지 감수해 주었다. 혹시 오류가 있다면 모두 내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