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나는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국립예술대학교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연극원(연극 단과대학) 최초의 지체 장애 학생이었다. 우리 대학교에는 장애 학생을 도와줄 수 있는 장애 학생 전담 선생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장애 학생들은 학생들의 전반적인 편의 복지를 담당하는 학생과 담당 선생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나는 겨우겨우 학교에 적응하며 학교 측에 제도를 개선해달라고 직접 요구해야만 했다.
가장 먼저 해결했던 것은 기숙사에 대한 문제였다. 기숙사는 총 4층으로 구성된 남녀 공용으로 남자 층은 고층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엘리베이터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상경한 나는 기숙사 생활이 불가피했지만, 기숙사의 고층 계단을 올라갈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결국, 학교 측과의 협의 끝에, 1층에 위치한 교수용 게스트룸을 장애 학생에 한해 개방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주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자 다음으로 도서관의 엘리베이터 전 층 운행과 장애인용 화장실의 설치를 요구했다. 학교 측은 마찬가지로 이를 수용해주었다. 3~4년 전 당시에는 장애 학생이 나를 포함해 10명 안팎이었다. 학교 측의 적극적인 수용 여부와는 별도로 장애 학생에 대한 지원 상황은 다소 열악했다.
2012년 하반기에 이르러서야 학교에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새로이 개소했다. 그때부터 장애 학생을 전담하는 선생님이 오셨고, 이후 더욱 쉽게 편의를 개선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처음 개소했을 당시에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제는 내가 직접 학교에 요구하지 않고도 선생님을 통해 다양한 점들을 개선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초창기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최초의 장애 학생 전담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일하셨으나 개소 후 처음 발령된 신참 구성원이어서 행정 업무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약 6개월 후 선생님과 나 또한 학교 시스템에 적응이 되었다고 느낄 때쯤 갑작스레 선생님이 퇴임하시고 새로운 분으로 교체되었다. 장애학생지원 담당자가 1년 계약직 채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다른 장애 학생들은 당황했다. 장애 학생을 전담하는 일이란 그 어떠한 보직보다도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이해를 요구하는데, 행정적 절차만을 이유로 1년 계약직이라니, 장애 학생 당사자에게 있어서 너무도 가혹했다.
결국 내가 재학하는 4년간 4명의 선생님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더이상 장애학생지원센터에 찾아가지 않았다. 곧 떠날 계약직 선생님과 딱히 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스레 정을 나누어 마음이 힘들어질까 봐 갈 수 없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이 되었을 때, 문득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학교에 입학할 후배들과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을 위해 용기를 내어 처음 대자보를 썼다. 그리고 다음 날, 대자보를 학교에 게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체장애 3급, 한예종 4년 차 장애인입니다.”
이 인사말은 제가 매년 신학기, 3월의 봄에 반복하는 말입니다. 제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지도교수님이 아닙니다. 학과 친구들도 아닙니다.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입니다.
우리 학교에는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있습니다. 장애학생지원센터는 본관 1층 맨 끝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입학할 2012년 당시에는 장애학생지원센터도 없었습니다. 학생과의 직원 한 분께서 ‘장애학생 관련 업무’를 대신해 맡았고, 이듬해 장애학생지원 센터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나마도 당장 센터를 설치할 자리가 없어 구석에 파티션 한 칸 깔아 놓고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초라하게 개소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장애학생지원센터는 본관 맨 끝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장애 학생을 위한 학습 환경이 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이 1년 계약직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1년 계약직인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이 사실상 유일한 직원입니다. 한 명의 선생님이 석관동·서초동 캠퍼스의 모든 장애 학생 지원 업무를 한 사람의 선생님이 모두 도맡아 하는 실정입니다. 일주일 근무 중 사흘은 서초동, 남은 이틀은 석관동을 오가며 출장 근무를 병행해야 하는 상당히 힘든 직책입니다.
개인의 업무 강도나 능률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애 학생들 또한 학교생활을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희는 매년 바뀌는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께 본인의 장애 정도와 교내 불편사항을 계속 반복해서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낯선 사람에게 매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은 장애학생뿐만 아니라, 비장애학생들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낯선 장애학생 지원센터 선생님이 한예종 장애 학생들과 친해지고 학교 환경을 익히는 것만 꼬박 반년 넘는 시간이 걸립니다. 장애 학생을 보조하는 특수 업무는 교내 업무 들 중에서도 높은 숙련도와 이해를 요구하는 전문적인 업무입니다. 그런데도 학교에서는 1년 계약직 채용을 고집하여, 이러한 비효율적인 제도를 4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는 장애학생 중에는 자폐를 겪는 장애 학생들도 많습니다. 그 친구들은 비록 공동체 생활 혹은 교우 관계에 있어서는 능숙하지 못합니다. 본인의 전공 실기 외에 사회적 관계와 생활에 있어서는 다른 학우들보다 조금 서툴고 때로는 느립니다. 따라서 해당 친구들이 대학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의 적극적인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실정입니다. 하지만 1년 계약직의 한계로,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조차 교내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처음부터 함께 적응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또 그들의 마음을 여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특수 교육직 선생님이 1년 계약직인 것은 장애 학생 당사자에게도 어려움이자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근무하고 계신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은 이미 지난 2월 말에 퇴임을 예정하고 있었음에도, 인수인계를 해 줄 후임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1년 계약직은 장애학생, 선생님 양 당사자에게 모두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다음 달, 우리는 새로 부임하는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께 같은 인사를 반복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OO장애 O급, 한예종 O년차 장애인입니다. 제가 장애를 가지게 된 이유는요… 제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은…. 제게 필요한 것은….”
저는 이 글을 쓰기까지 무수히 고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학교를 폄훼하는 것은 아닌 지,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괜한 걱정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눈 감고 넘어가도 될 문제입니다. 저는 올해를 끝으로 이곳을 졸업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일 년, 조용히 지내며 좋은 추억만을 안고 가는 일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학교 시설과 절차에도 이미 다 적응하여 딱히 불편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효율적이며 불합리한 제도는 무한히 반복될 것입니다. 새로운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은 몇 주 내에 새로이 부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은 또 이듬해 해임될 겁니다. 그 뒤에는 또 새로운 분이, 그 다음 다른 새로운 분이, 그 그 다음 새로운 분이 차례로 부임하실 겁니다. 우리는 매년마다 도움을 새로이 구해야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정된 일입니다.
작년, 청각 장애를 가진 권예린 학생의 대필 도우미였던 방송영상과 이길보라 학생은 총장님께 장문의 편지를 써 장애학생지원센터의 선생님을 더 이상 1년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학교 측은 예산상의 이유로 보류 조치하고는 지금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절을 이미 경험했기에, 당장 몇 달 내로 학교가 변화하 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글을 써야 했습니다. 올해를 끝으로 한예종 장애인 4년차인 저는 졸업하고 떠나겠지만 이제 갓 입학한, 그리고 앞으로 입학할 장애인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불편함과 불합리한 제도를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앞으로 부임하실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은 맘놓고 학생들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나아가 한예종이 진정으로 학교 측의 홍보대로 ‘장애 학생과 함께 예술하기 좋은 학교’로 거듭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총장님! 현재 1년 계약직인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을 부디 정규직으로 전환해주세요. 장애 학생들도 마음 놓고 예술할 수 있도록, 입학식에서 말씀하셨듯 학교가 다행(多幸)일 수 있도록 부디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 변재원
이 대자보를 학교에 부착한 이후로 한 달 동안 학교 측에 투쟁했다. 끝내 3월 25일 학교 측의 답신을 듣게 되었다. 원래 요구했던 정규직 채용은 현재 국립대학의 규정상 힘든 대신, 두 가지 사안 (각 캠퍼스별 장애학생지원센터 담당자 채용 및 무기계약직 전환 실천)에 대해 수용하기로 했다.
이날 밤,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께서 내게 전화를 하셨다. 그녀는 내게 거듭 고맙다고 말했다. 비록 본인은 사정상 이 학교를 떠나지만, 미래에 들어올 후임 장애학생지원센터 선생님들은 본인보다 훨씬 나은 근무환경에서 진심으로 장애 학생을 위해 근무하게 되었다고 기뻐하셨다.
이 한예종 장애학생지원센터의 근무환경 개선으로 우리 학교의 장애학생지원센터는 국내 대학 중 가장 안정적인 시스템을 가지게 되었다. 나의 문제 제기가 좋은 결과를 얻어내어 너무도 뿌듯했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장애 학생 지원 시스템은 옛날에 머물러 있는 곳이 많다. 이제는 한예종뿐만 아니라 계약직 초,중,고 특수학급 교사 및 다른 대학의 장애학생지원센터 계약직 제도도 바뀔 차례이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대한민국, 장애인이 공부하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꿈꾼다. 우리의 후배이자 아들, 딸 장애인들이 더욱 평등한 조건에서 차별받지 않고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나서 개선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원문: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