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확신은 시기적·우연적 요소를 간과한다
모든 것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 조언 역시 독이 될 수 있다. 특히 개인적 경험의 지나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진심 어린 조언은 시기적·상황적 차이를 무시한 채 낡은 사고방식을 세습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너무 쉽고 성급하게 과거를 단정 짓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B를 초래한 것은 과거의 A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인데, 문제는 과거의 A를 추론하는 범위가 본인의 경험과 지식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건을 단정 짓는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선택’ ‘나의 행위’ 등 본인의 시점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시기적·우연적 요소들은 대부분 인지되지 못해 무시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심하게 저평가된다.
하나의 사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그러므로 과거 역시 이미 일어난 ‘사실’이 아닌 개인적인 ‘해석’이고 하나의 ‘의견’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거듭해서 미래를 설계하는 것에 실패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확신을 주재료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시기적·우연적 요소는 언제나 가장 큰 원인이고, 개인의 의지와 행위가 가진 영향력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한두 줄의 문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단순한 경험조차도 막상 꺼내놓고 그것을 둘러싼 모든 요소를 하나씩 되짚어 보면,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 특정 시기에 한정적이고 수많은 우연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경험에서 시기적·우연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그 경험은 오로지 본인에게, 그리고 특정 시기와 상황에만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의 과거는 타인이 다시 밟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흩뿌려진 입자들이 우연히 만들어냈던 찰나의 형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본인이 조언을 듣는 사람의 존재가 되어 미래를 다녀온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또는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 등 확신에 찬 이야기는 해선 안 되는 말들이다.
나에게 과거는 다른 사람에게도 과거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한다. 어제와 동일한 행위가 어제와 동일한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다. 조언이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미래가 아닌 과거를 가리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는 시대를 초월한 원초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극히 원론적인 개념들을 제외하고 개인의 경험이 시대적 문맥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없다.
지금의 20-30대와 이들의 부모가 살았던 세대의 환경은 비교할 수 없이 다르다. 정보의 양, 소통의 방법, 삶의 방식, 보편적 가치관 등 거의 모든 것이 변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시대 의존적인 경험을 마치 불변의 가치인 것처럼 착각한 일부 기성세대는,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채 본인이 믿고 있는 구시대적 가치관을 자식 세대에게 강압적으로 주입한다. 결과는 물론 아름답지 않다.
수많은 젊은 세대가 아직도 수십 년 전에 각광받던 직업을 좇고, 노년기의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의 안정을 추구하는 등 이미 낡아 버린 가치들이 변화된 세상에 들어맞지 않으며 사회 전체가 삐걱거리고 유연성을 잃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조언자의 ‘진심’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스스로 옳다 믿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와 사회 시스템을 초월할 수 있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은 많지 않다
적어도 읽는 동안 만큼은 변화의 희망을 품어볼 수 있게 만드는 철학, 인문, 자기계발서들은 반박하기 어려운 혜안들을 꺼내놓아 독자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은 후,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 주제의 깊이는 그것의 일반적 실천 가능 여부와 무관하다.
오히려 현실에선 반비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사회적 통념과 문화적 굴레를 무시하고 일상생활에서 철학적 신념들을 실현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들이 흔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혹은 비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문화 속에서 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자신의 노후와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개인이, 본인의 의지만으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며 진정한 행복을 찾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마찬가지로 특정 분야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둔 이들이 자주 던지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 또는 ‘잘하는 일을 하라’ 등의 조언 역시 사실 책임감 있는 말은 아니다.
특정한 일을 하고 싶은 목표와 동기는 아무에게나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 역시도 그것을 잘하기 위한 과정만큼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시절을 모조리 ‘교과과정 암기’에 쏟아부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도 찾으라는 것은 마치 배트도 쥐여주지 않고 홈런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조언을 하는 사람에겐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었던 환경과 운이 있었다는 뜻이다. 역시나 그런 환경적·우연적 요소를 무시한 채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에 잘 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심각한 과거 미화고 무지한 교만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에게 문화와 사회 시스템을 초월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조언이 빚은 사회
그렇다면 조언이 없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그건 알 수 없다. 그런 사회는 내가 알기엔 없으니까. 하지만 시대적 변화를 무시한, 위계적이고 무책임한 조언이 남발하고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어버리는 지경에 이른 사회에서 걱정해야 할 것은 오히려 조언의 남용이 낳는 문제이지, 그것의 결핍에 대한 우려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됐으니, 너도 그렇게 해라’, ‘나는 이렇게 해서 실패했으니, 너는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 등의 단순하고 무책임한 조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해롭다. 누군가 내린 성급한 결론이 독단적 확신으로 무장한 채 조언의 형태로 타인에게 주입되기 시작되면, 개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모습은 다양성을 잃게 되고 그것은 사회적으로 소수의 가치관을 말살하려는 다수의 폭력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미 내린 결론을 타인에게 그대로 주입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판단과 해석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조언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가능(혹은 불가능)했던 시대적 상황과 다양한 우연적 요소들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복잡한 것을 다 따져서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타인의 인생 설계에 조금이라도 개입한다는 것은 원래 그렇게 어렵고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