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신발이라는 빗나간 우화
‘착한 신발’이라는 탐스슈즈에 대한 논란은 등장할 때부터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여러 해를 넘겨가면서 찬양과 비난이 엇갈리고 있다. 재미있는 건, 같은 신문에서조차 몇 달 사이에 극단의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경제’에서 7개월 간격으로 내놓은 기사 두 편을 보자. ‘극과극’인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을 헷갈리게 할만하다. 다행히 기자는 다른 사람들인 모양이지만…
탐스슈즈는 2006년 시장에 등장해 선진국 소비자가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를 저개발국 어린이에게 기부하는 운영방식을 통해 1년 만에 5배의 성장을 이뤘다. 이제 연간 2억5천만불을 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으며, 누적 실적으로 2010년에는 1백만 켤레를, 2013년에는 1천만 켤레를 넘는 신발을 기부했다.
탐스슈즈는 좋은 일을 하면서 이익을 내는 사회적기업의 성공모델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기업이기도 하지만, ‘자선마케팅’을 통해 영리를 추구하는 업체일 뿐이며 저개발국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끼치는 폐가 더 크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그나마 양호한 평가를 받고 있다. 영문으로 구글을 검색해 보면 탐스슈즈와 Buy-one-give-one 모델에 대한 비난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찬양보다는 비판을 해야 보다 지적이고 양심적으로 보인다는 미디어의 특성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탐스슈즈(와 그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간 모든 기업)에 대한 비난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미국에 본사를 둔 이 회사의 신발 가공공장은 중국에 있다. 가장 싼 제조원가를 찾아서 중국에 가있는 것이다. 신발을 기부받는 저개발국 신발산업을 황폐화 시킨다는 비난을 받자, 가치사슬의 상당부분을 저개발국으로 옮기기도 했다. 기부되는 신발에 대해서만 말이다. 선진국에 판매되는 신발의 주력 생산공장은 아직도 중국에 있다.
이 회사는 서구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일반 소비자들의 기부 수요를 영리하게 충족시켜 주면서 이익을 내고 있다. 무엇보다 개도국에 있는 유치산업을 말살하고 있다.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런 모델을 의류와 안경 등의 소비재 산업에서 따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충분한 비난의 밥상에 수저 하나 더 올리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아이 신발이 아닌 아빠 직장이 필요하다
이런 실패사례를 보면서 개발협력계에 속하는 우리가 취하는 행동이 더욱 실망스럽다. 경제와 산업의 메커니즘에 대해 충분하게 배운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신발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다. 신발을 살 돈이 없는 빈곤이 문제다. 당장 신발 한 켤레를 줘도 그 신발이 헤져서 못 신을 때가 되면? 다시 또 신발을 구걸해야 하는가? 신발이 없는 아이의 아버지가 안정적인 직장을 얻으면 신발뿐 아니라 교육과 보건 등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빈곤의 핵심 문제는 그냥 돈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발협력계는 거기로부터 눈을 돌리고자 한다. 공장보다 학교, 공장보다 병원, 공장보다 도로를 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지난 블로그에 직업훈련소 얘기를 했으니 오늘은 병원 얘기를 해보자.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가서 보건 당국자를 만나 ODA 자금을 활용해 병원을 짓자고 했다. 그는 예상 외로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
-병원이 있으면 좋겠지…
유체이탈 화법이다. 보통 자신이 관할하는 분야에서 ODA 프로젝트를 만들자고 하면 다들 반기는데, 이 사람은 왜 이럴까?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묻기 시작한다.
-병원이 있으면 좋지 않아요?
그가 털어놓기 시작한다.
-음… 사실 병원이 있어도 의사가 없어…
-왜 의사가 없어요?
-의사를 키울만큼 제대로 된 의대가 없어
-아니 독립한 지가 언젠데 아직 의대가 없어요?
-의대를 만들려고 해도 교수가 없어”
-교수는 키우면 되잖아요?
-교수를 양성해봐야 실습할 병원이 없어
-아니, 그러니까 대학병원을 지으면 되는 거잖아요???
-글쎄…
이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무한반복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이들이 말하지 않는 원인에 주목하게 된다. 궁극적 원인은 한 가지다. 의료시장이 없다. 즉, 의사들의 의료서비스를 적당한 가격에 구매할 소비자와 그것을 떠받칠 의료보험이 없다.
의사가 되려면 십 년 이상의 시간과 노력,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아프리카라고 고스톱 쳐서따는 의사면허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막대한 직접비용과 기회비용을 투자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의료봉사 밖에 할 일이 없다면?
우리가 슈바이처가 아니듯, 우리가 이태석 신부가 아니듯, 그들도 아니다. 의료인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봉사 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히포크라테스 이름 앞에 선서 한번 한다고 평생을 희생하며 살라고 한다면 당신은 의사가 되겠는가?
어쩌다 유럽 등으로 유학을 가서 의대에 가는 아프리카 청년이 정작 의사가 되면 고국으로 돌아올까? 본전 생각나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냥 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의원을 열고, 벌이도 좋고 존경받는 의사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을 욕할 수 있을까?
여기서도 궁극적인 문제는 돈이다. 많은 수의 가장들이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세금을 내고, 의료보험료를 내면 (또,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의사와 병원은 해결될 문제다.
의사가 외부에서 대량으로 주어지면 어떨까? 이런 특이한 상황은 중남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쿠바는 그 동네에서는 상대적으로 앞선 의료기술과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나라다.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 (Escuela Latino-americana de Medicina)을 만들어 해마다 수 천명의 의사를 배출한다.
수업료는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하게 전액 무료다. 경제적 지원은 창설 당시부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맡아왔다. 졸업후 의사들은 최면에 걸린 것처럼 각국으로 흩어져 희생적으로 의료활동을 펼친다. 정말 눈물나는 사회주의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피델 카스트로가 쓰러져 누워있고, 차베스는 이미 죽었다. 언제까지 의사가 그렇게 대량으로 무상교육을 통해 육성될지 모르겠다. 또, 이들 쿠바산 의사는 각국의 의료체계를 흔들고 있다. 당장은 쿠바 의사가 고마울지 모르겠지만, 쿠바 의사 때문에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현지인 의사들의 인기는 시들하다.
현지인 의사의 공백을 메우고 있는 외국인 의사들. 그들의 언제까지 존재할까? 물론, 이들의 희생으로 중남미 의료현실은 투입에 비해서는 좀 나은 성과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경험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외국에서까지 환자를 유치할 정도로 꽤 앞선 의료기술을 가진 한국 의사들을 선진국에서 키워줬는가? 대형 병원과 동네 의원들을 선진국에서 지어줬는가? 아니다.
우리 의사와 병원은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발전과 세계적으로 칭송받는 국민건강보험이 만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었으면, 우리 역시 자기 아이가 왜 죽는 지도 모르는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반사적 기피를 우려한다
이만큼 한 사회의 소비력, 즉 구매력 있는 소비와 그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안정적 고용, 고용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제조업 중심의 산업 발전은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개발협력계는, 특히 시민사회와 원조기관은 상업성 있는 산업 프로젝트에 대해 무조건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시민사회는 마치 빈곤의 원인이 (공여국이든 수원국이든) 불완전한 시장과 탐욕스런 기업가에게 있으니 기업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원조의 기본정신에 어긋난다고 여기는 듯하다.
기업은 사회공헌 활동으로 그 존재의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건전한 기업 본연의 영업활동을 통해 스스로 존재할 가치를 보여준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조기관의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 (commercially viable project) 취급에는 원칙이 있다. OECD 가이드라인은 상업적으로 충분히 채산성 있는 프로젝트는 기업의 투자에 맡기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최빈국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최빈국에는 상업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기 어려우므로 상업성 여부를 가리지 않고 원조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길을 터 놓았다.
그러나, 우리 원조기관들은 OECD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최빈국에 대한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지원을 꺼린다. 보통 제조업에 속하는 프로젝트들은 교육, 보건, 인프라 사업들과는 달리 시장상황에 노출되게 되고, 운영에 상당한 기술과 자본이 요구된다. 그런 속성을 원조기관으로서는 운영위험(Operation Risk)로 보고, 지속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지원을 꺼리는 것이다.
맞다.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는 당연히 구조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운영과정에서 문제가 노출될만한 약점이 많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원조만 염두에 둔 것이다. 원조가 아니라 개발이라는 포괄적 관점에서 보면, 수원국의 궁극적인 지속가능성은 산업에 대한 투자에서 나온다. 우리는 단위 사업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평가기준 때문에 정작 중요한 수원국의 장기적, 본질적 지속가능성을 외면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사례로서, 영국의 CDC(Commonwealth Development Company)같은 원조기관은 수원국의 상업적인 프로젝트에 대해 대출뿐만 아니라 지분투자까지 지원하고 있다. 제조업을 넘어서 관광 등 서비스업, 상가 등 부동산개발업에 이르기까지 고객국(수원국) 내에서 산업을 일으키고 고용을 확대하는 사업이라면 제한없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최빈국이 아닌 경우에도 원칙은 같다.
국제 개발협력계에서는 상업성 있는 프로젝트를 원조자금으로 보다 완결성 있게 추진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어 왔으며, 이미 시장에서 실증된 모델도 많다. 현지 내국인 투자나 외국인직접투자(FDI)와의 연계, 공공조달 물품의 고객국(수원국)내 생산을 통한 수입대체, 기존 산업의 전후방 산업에 대한 가치사슬 확장 등의 비즈니스 모델은 원조사업과의 혼용가능성과 사업적 타당성이 이미 확인되어 있다.
이제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 막연하게 제조업 운영의 어려움과 장래 발생할지도 모를 운영상의 문제, 그것에 대한 비난과 질책을 두려워만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고객국(수원국)에 중요한 사업이라고 판단되면 어떻게든 비즈니스 모델을 수립하고 적극적으로 현지, 우리나라, 제3국의 파트너를 찾아 사업화 하여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토록 강조하는 ‘우리의 개발경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조가 고객국(수원국)의 진정한 수요를 몰라볼 때,
시장을 무시한 근시안적 처방을 공급할 때,
개발이 아니라 원조에 만족할 때,
빈곤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원문: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