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자스민을 비롯한 이주민 관련 문제에 유독 예민하고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 건 휴머니스트 코스프레도 아니고 진보/개혁 진영으로서 느끼는 당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주민들과 동고동락했던 개인적인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관심이거나 그들에게 지원되는 예산을 반대하는데 선봉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얼마나 봐줄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술김에 꼭 이 이야길 해보고 싶다. 알아듣기 힘들어도 술주정이려니 관대하게 읽어줬으면 한다.
99년도,내가 재수생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술과 음악에만 빠져 폐인처럼 지내던 내게 어느날 어머니께서 가슴에 비수를 꽂으시더라.
그럴거면 공장가서 일이나 해라. 니 주제에 무슨 공부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 입장에서는그보다 열배는 더 심한 말씀을 하셔도 나는 할 말이 없었겠지만 아직도 고치지 못한 욱하는 성질이 피 펄펄 끓던 20살엔 오죽했겠나.
부모님 잔소리를 피해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천안에서 공장을 하시던 고모부가 생각나 전화를 했다. 공부 때려치고 일이나 배우려니 일좀 시켜달라고.
그래 차라리 돈이라도 내가 벌어서 신세 안지고 살고 말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고모부는 처음엔 놀라서 만류하셨지만 2시간 뒤쯤 다시 전화가 오더니 짐 싸서 내려오라 하시더라.
나중에 안 얘기지만 고모와 아버지가 상의를 하시던 중에 공부보단 일단 철드는게 먼저라는 판단이 드셨는지 이왕 일 시킬거 조카라고 봐주지 말고 남들이랑 똑같이 대우해서 세상물정 알게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더라. 그렇게 나는 동남아, 파키스탄, 캄보디아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막노동을 하게 됐다.
나도 참 이런데는 자존심을 꺾을줄을 몰라서 이를 악물고는 포대를 나르고 하루종일 더러운 폐지와 공병을 분류했다. 동료는 대부분 외국사람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처음엔 말 할 상대가 없어 외로웠고 일도 잘 못하는 후임에게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자꾸 굽신거리는게 불편했다.
그러면서도 지저분한 몰골의 그들과 가급적 터치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다. 왠지 전염병이 옮을것 같은 두려움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정이 들고 마주치는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로 인사하고 힘든 일을 함께 해내면 하이파이브도 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또 한번의 오기가 발동하여 그들과 숙식도 함께 하겠노라 선언했다. 고모부 집은 꽤나 부유해서 집에 거대한 욕조도 있고 심지어 사우나도 있을 정도였다. 이를 포기한것도 역시 자존심 때문이었다.
처음 가본 그들의 숙소는 말이 숙소지…그냥 안 쓰는 창고에 어디서 주워온 담요를 시멘트 위에 겹쳐놓고 둘둘 말아 자는 수준이었다. 잠시 후회도 했지만 이마저도 곧 적응이 됐다.
한국인 작업반장은 그래도 이정도면 훌륭한 대우라고 했다. 적어도 이 공장은 외국인 노동자가 다치면 병원도 보내주고 월급도 다른곳보다 많이 주고 구타도 하지 않으니까. 동료들은 안 그래도 비좁은 숙소에 나까지 비집고 들어오자 불편한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곧 그들에게 히어로가 됐다. 마음 약한 고모가 매일 몰래 사식(?)을 넣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나라에서는 부유층이나 누릴 수 있는 치킨과 피자를 공짜로 먹을 수 있게 되어서 그들은 내게 매우 황송해 했다.
가끔 별 보며 소주도 마시고 짧은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몸짓과 눈빛으로 대화를 했다. 가족 소개도 하고 한국인 작업반장 흉도 봤다. 말은 안통하지만 무슨 얘길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다 흥이 나면 워크맨에 스피커를 연결해 마이클 잭슨을 틀어놓고 문워크와 무중력 댄스를 추며 밤새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어느새 우리는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고 있었다. 트럭 짐칸에 타고 작업터로 향할때도 무거운 폐품 포대를 머리에 이고 나를 때도 존레논의 스탠바이미나 비틀즈의 헤이쥬드를 유독 자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술이 많이 취하면 그 노래들을 찾는다.
그러던 어느날 동료들과 공병 박스를 누가 한번에 더 많이 드나 힘자랑을 하던 중, 5박스에 도전하다가 허리에 순간적인 마비가 왔고 그대로 드러눕게 되었다.
일어나려 해도 하체와 허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한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동료들이 현장 사무소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사장 조카가 와장창 소리와 함께 못 일어나고 있으니 공장 사람들이 일을 중단하고 몰려왔다. 잠시 후 마비가 풀리기에 별 일 아닌듯 툭툭 털고 일어나는데 이번엔 고모부가 노발대발하며 찾아왔다. 애지중지하던 조카가 하루이틀이면 포기할 줄 알았더니 하찮은 외국인 노동자와 동화되어 가는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으신게다.
당장 그만두고 올라가라고 버럭버럭 명령하시는데 노동자들과 작별이라도 하게 시간을 달라니 기가 찬 표정이었다.
그날 밤 사비를 털어 소주와 과자를 사놓고 동료들에게 얘기했다.
나, 끝, 가야돼, 내일, 이제 못봐
그들의 눈망울에 천천히 차오르던 눈물을 나는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
그날 밤 우리는 밤새 수다를 떨었다. 말은 달라도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건 진심을 전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같은 한국말로 얘기하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던가. 아쉽다, 슬프다, 보고싶을거다 란 말보다 미간과 눈꼬리, 입가의 움직임으로 전하는 말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 전염병이라도 옮을까 벌레라도 묻을까 접촉은 피했던 동료들을 이번엔 꼭 안았다. 사람 냄새가 났다.
전화, 꼭,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며 내 전화번호를 메모해주었다.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두손에 꼭 쥐었다. 하지만 이후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조카를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현장에 있던 노동자를 전부 쫓아냈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떠난 뒤에도 노래부르며 일하는 모습이 성실치 않아보여 그랬을 수도 있다. 작업반장은 그를 항상 못마땅해 했으니까.
견디기 힘든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당시의 죄책감과 뒤늦은 책임감을 이자스민에게 투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들이 나를 추억하고 있을지, 아니면 원망하고 있을지. 함께 부르던 스탠바이미를 바득바득 악을 쓰며 불러댈지 콧노래로 흥얼대고 있을지.
어느쪽이라도 내게 할 말은 없다. 내겐 스쳐가는 일탈일 뿐이었지만 그들에겐 생존이 달려있는 문제였으니까.
내가 이자스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보며 역겨움을 느끼는건 비난의 9할은 ‘어딜 감히 후진국 필리핀 사람이…’ 따위의 인종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증이 안된 의원이라고? 이주민 여성에게 대체 어떤 검증의 잣대를 디밀라는 말이냐.
국민정서적인 문제? 그게 기준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선되어선 안 될 의원을 적어도 100명은 그럴싸한 구실을 붙여 뽑을 수 있다.
이자스민법이라는 이주아동권리보장법을 보면 주요 골자는 이주아동에게 체류자격 부여, 부모에게 강제퇴거 유예, 무상교육/건강보험/무상보육혜택 지원, 한국어 교육 지원이다. 포커스는 아동의 생존문제에 맞춰져있다. 여기 대체 어느곳에 역차별 문제가 있나.
난 수십번을 뜯어봐도 못찾겠다. 공무원 가산점이 있나 대기업 채용 할당제가 있나. 치사한 새끼들.
어쨌건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차별받는 계층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은 우리 정치는 우리나라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은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던 그들의 등에 칼을 꽂는 것만 같아 난… 도저히 못하겠다.
원문: John Bi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