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ㅍㅅㅅ를 보고 있는 독자라면 아마도 실패에 익숙한 분이 많으실 거다. 성공한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포춘이나 시사경제지 같은 것을 읽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 실패한 사람들은 우리들뿐만이 아니다. 잘나가는 IT 업계에서도 실패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 첫 시간으로 자신만 아니라 산업 전체를 붕괴시켰던 아타리 VCS 게임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게임업계의 문을 열고, 게임업계를 사라지게 한 아타리
그룹 너바나(Nirvana)의 보컬 ‘커트 코베인’은 얼터너티브 록을 시작했고, 완성시켰으며, 그의 자살과 함께 얼터너티브 록을 끝냈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얼터너티브 록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지만 세간의 평은 그랬다.) IT 업계에 비슷한 예가 있다면 바로 아타리(Atari)이다. 아타리는 비디오 게임기를 시작했고, 완성했으며, 마침내 하얗게 불태워 버렸다!
아타리는 미국의 놀란 부시넬이 1972년에 창업한 회사로 세계 최초의 게임인 <스페이스 워>를 모방한 <컴퓨터 스페이스>라는 게임을 개발하며 최초의 비디오 게임회사로 화려한 첫발을 디딘다.
그리고, 곧 1972년 <퐁>이라는 게임을 만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퐁>은 탁구를 소재로 한 간단한 게임으로 동전을 넣고 즐기는 게임기의 원조 격이었다. 그 당시 <퐁>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어서 고장신고 대부분이 기계에 동전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까지 전해질 정도이다. 아타리는 승승장구했고,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한때 아타리에 취업하기도 했었다.
아타리의 엄청난 성공과 그것을 잊게 만든 어어엄청난 실패
그리고, 1977년 운명의 <아타리 VCS 2600>이 발매되기에 이른다.
사실 아타리 VCS는 비난을 받기 전에 가장 성공한 가정용 게임기 중의 하나였다. 그 이유는 아타리 VCS가 게임기에 내장된 게임 형태가 아니라 카트리지만 갈아 끼우면 언제든 다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오늘날 게임기의 원조 격이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쟁 게임기였던 페어차일드 채널F에 비해 CPU 성능이 뛰어났고, 조이스틱을 채택해서 게임성도 높았다.
그러나, 이 아타리 VCS가 초창기 때는 판매가 신통치 않아서 아타리의 창립자인 놀란 부쉬넬 사장은 실적 부진과 경영진 간의 불화로 인해 아타리를 그만둔다. 놀란 부쉬넬의 퇴진과 함께 아타리 VCS는 거짓말처럼 히트를 기록하고, 히트 게임이었던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성공으로 인해 아타리 VCS는 총 2,500만대를 판매하며 전 세계 가정에 게임기를 보급시킨다.
이런 놀라운 성공으로 인해 아타리는 1980년도에만 수익이 2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런데, 3년 만인 1982년 아타리는 미국 역사상 사상 최고의 적자기록인 5억 3천만 달러의 순손실을 입는다. 왜 3년 만에 이런 엄청난 적자를 본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카트리지만 갈아 끼우면 다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혁신적인 방식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코드만 겨우 뗀 개발자들이 무작위로 개발한 질 낮은 게임이 넘쳐났고, 그걸 선별해줄 매체도 없었다. 개 사료 업체도 뛰어들고, 식품회사도 뛰어들었다. 게임만 만들면 돈이 된다고 하니 아줌마도 뛰어들고, 옆집 아저씨도 뛰어들었다. 소비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 산 게임이 엄청나게 허접함을 알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게다가 포르노 게임도 등장하기 시작해서 학부모들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때마침 등장한 PC도 게임기 산업을 위협했다. IBM PC와 애플 컴퓨터는 학습도 되고, 게임도 된다는 매력으로 게임기의 존폐를 뒤흔들었다. 마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PMP나 MP3플레이어 산업이 망했듯이 말이다.
최악의 게임 E. T. 의 등장과 열려버린 헬게이트
시장 상황은 이렇게 되어 갔지만 아타리와 게임 업계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외면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엄청난 돈을 벌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에 매달렸다. 아타리는 많은 돈을 들여 아타리 VCS 2600의 후속작인 아타리 5200을 내놓았고, 아타리의 경쟁 게임회사들도 1982년 연말에 10여 개가 넘는 게임기를 내놓았다. 또한 이들 게임기에서 실행될 엄청난 양의 게임이 개발되었고,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끝판대장이자 오승환을 능가하는 진정한 클로저인 최악의 게임 <E.T.>가 등장했다.
스티브 스필버그가 감독한 <E.T.>는 1982년 개봉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다. 성공에 확신을 가진 아타리 경영진은 2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E.T.의 판권을 샀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서 불과 5주 만에 날림 게임을 개발해서 내놓는다. 1982년 연말 게임 시장을 겨냥해서 무려 500만 개(일부 자료에는 400만 장)의 카트리지를 미리 찍어 놓았다. 도매상들은 앞다투어 E.T를 구입했고, 소매점에도 E.T. 소프트웨어로 탑이 쌓였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大亡)의 1982년 크리스마스 시즌. 오라는 산타할아버지 대신에 헬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날림으로 만든 E.T.는 사상 최악의 게임으로 알려졌고, 반품 사태가 속출했다. 500만 장 중에 150만 장이 팔렸으나 그 중에 80만 장이 반품됐을 정도였다. 아타리는 그 430만 장의 게임과 안 팔린 게임기들을 뉴멕시코 사막에 실제로 묻어버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며 전설의 기승전병을 완성한다.
아타리의 실패는 한 회사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30억 달러로 예상됐던 크리스마스 게임시장은 1억 달러 매출에 그쳤고, 필연적으로 연쇄부도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타리에 실망한 소비자들은 빗발치는 항의를 했고, 게임기 자체에 실망한 소비자들은 경쟁 게임기도 구입하지 않아서 다른 회사들도 게임기 산업을 접거나 도산했다. 미리 게임기와 게임 소프트웨어를 선매입했던 도매상은 줄도산했고, 게임 소프트 회사들은 매출을 올리지 못해 줄도산 대열에 동참했다.
이로 인해 게임기 산업 전체가 흔들리며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다. 게임 산업에 투자했던 이들은 자신의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게임 산업에 있던 대부분의 인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버렸다.
실패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아타리 쇼크’
이를 아타리 쇼크(Atari Shock)라고 하는데, 얼마나 쇼크를 먹었느냐 하면 미국의 소매점들이 자신의 진열대에 게임기 관련 제품을 절대로 올리지 않기로 결의를 할 정도였다. 1985년 닌텐도가 미국에 상륙할 때까지 미국에서 ‘게임기’는 금기어였다. 닌텐도도 이를 의식해서 자신의 게임기인 패미콤의 미국 이름을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으로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닌텐도는 서드파티를 엄격히 관리했고, 스티브 잡스 역시 애플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감시, 감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서적
애플과 닌텐도 (김정남)
그래서 그들은 디지털 리더가 되었다. (이정일)
세계 최고의 게임 크리에이터 9인의 이야기 (김정남)[/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