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올해 임금을 동결했다는 뉴스를 접하니 우리 기업들이 성장에 있어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전에 없이 효율에 대한 논의가 많아진 듯하다. 생산성과 일의 질, 업무의 효율은 다 일맥상통하는 주제인데, 이런 얘기가 나올 때 자주 언급되는 글이 있다.
2014년 LG경제연구소에서 발표한 “헛손질 많은 우리 기업들, 문제는 부지런한 비효율이다”(링크) 이라는 보고서인데, 한국 기업들이 효율적이지 않게 일한다고 분석하면서 그 유형을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보여주기, 시간끌기, 낭비하기, 방해하기, 분산하기 등으로 명명된 비효율적 일하기 방식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표했다.
핵심만 말하자면 쓸데없는 일을 열심히 한다는 얘긴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오래 전부터 직장인들 사이에 회자되어 오던 직장 상사 분류법을 2*2 매트릭스로 정리해 보았다.
성실함과 유능함을 기준으로 나눈 직장 상사는 이렇게 4가지로 분류된다.
똑게
이런 부류는 자기의 위치에 따른 업무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나 약간 게을러서 주요 업무를 부하직원에게 떠맡긴다. 좋게 말하면 권한위임에 능하다.
대신 본인은 중요한 일만 하려고 하므로 초기에 일의 방향을 제대로 제시하고 경영진의 압력을 막아준다. 부하 직원들은 다소 일을 많이 하더라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시간의 압박이 덜하다는 점에서 이런 상사를 가장 좋게 평가한다.
똑부
똑부는 해야 할 일과 방향을 잘 알고 또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부하 직원도 열심히 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상사는 부하 직원의 업무에 간섭이 심하고 부하가 결정을 내릴 여지를 남겨 주지 않는다.
임원이지만 ‘김대리’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타입인데, 부하직원은 판단력을 키울 기회가 없어 성장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고, 많은 시간 혹독하게 일을 해야 하므로 똑게보다 인기가 덜하다.
멍게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도 않으므로 부하 직원은 시키는 일만 적당히 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회사에서 이런 멍게를 가만 두지 않으므로 부지런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따라서 마음은 멍게라도 형식적으로나마 멍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멍부
슬프게도 가장 많은 상사가 이 타입에 해당하지 않을까. 멍부는 일의 방향이나 결정적 타이밍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부지런을 떤다.
그러나 대부분 불필요한 경우가 많아 부하 직원은 상사의 독촉에 성과도 없는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 고달파 한다. 일은 해도 빛이 안 나며 상사로부터 시달림을 받기 때문에 이런 리더를 만나는 부하 직원은 멍부의 상태가 심할 경우 직장을 나가거나 상사가 바뀌기를 하릴없이 기다릴 뿐이다.
대부분의 2*2 매트릭스에서처럼 갈등의 유형은 똑게와 멍부로 압축된다. 똑부와 멍게는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는 존재들이니까.
똑부는 얼핏 모든 조직에서 환영받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깊은 통찰이 필요한 일에 대해서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반면, 똑게는 여유가 있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가능성이 있다는 측면에서, 의외로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보다 장기적인 관점이 중요한 기획, 인재육성 등의 업무에 적합한 인재형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하지만 많지 않은 일을 완벽하게 하는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멍부다
멍부는 정말 조직을 미치게 만든다. 쓸 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오로지 부지런하기만 한 이런 유형을 상사로 만나면 정말 직장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런 타입을 위에서 소개한 LG경제연구소 보고서는 ‘부지런한 비효율’이라고 점잖게 표현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회사에 죽치고 앉아서 부하들을 닦달하는 인물이 온갖 뻘짓을 도맡아 하는 것을 보면서 부하들은 뒷담화에 열을 올린다. 혹시 이 글을 경영진이 읽으신다면, 조직관리 차원에서 아무래도 부지런한 간부를 중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제발 참으시라.
당장 실적과 무관한 일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멍부 밑에서 배운 것 없이 성장한 후배는 장래 또다른 멍부가 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멍부는 조직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암덩어리일 뿐이다.
엊그제는 LG전자 프랑스현지법인 사장을 지낸 현지인이 “Ils sont fous, ces Coréens(이 한국인들은 미쳤다)”는 도발적인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일하지만 의전 등 쓸데없는데 너무 많은 노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도 담은 모양이다.
역시 비효율 문제를 꼬집고 있다는 얘기.
국기를 세워 놓고 밀담을?
LG경제연구소에서 분석한 멍부 유형 가운데 보여주기와 낭비하기의 전형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내가 근무한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중요한 입찰이 있었고, 여러 사람이 노력한 끝에 입찰평가의 최종 단계까지 도달, 해외 경쟁사 1개 업체와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산술적인 수주 확률 1/2인 상황이지만, 가격 외에 부가적인 내용을 제안해 두었기에 평가 과정에서 앞서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황이다. 결과 발표를 2주쯤 앞두고 발주처 장관이 공무로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여러 차례 현지 면담을 시도했으나 성사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어렵게 만든 ‘슛 찬스’였다.
같이 근무하던 부장이 본부장과 함께 면담에 나섰다. 평소 지나치게 의욕적인(!) 업무처리로 사내에서 유명한 부장이었는데, 엔지니어 출신이지만 주재원 시절 철저한 의전으로 인정을 받아 영업에 나서게 되었다는 인물이었다. 중요한 기회이니 만치 그 부장도 나름 철저하게 준비를 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노라고 보고를 했다.
그러나, 나중에 면담 과정을 들으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 비즈니스 센터 회의실을 빌려 열린 면담에 발주처측 장관과 보좌관 2명, 우리측 3명, 외국계 협력사 3명 등 도합 9명이 참석했다.
탁상용 양국 국기를 교차해서 꽃과 함께 테이블 가운데 올려두고 수십페이지 짜리 회사presentation을 시작으로 면담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게 뭐가 어떠냐고?
의전이라는 것은 ‘적당’한 것이 가장 큰 미덕이다. 상황과 내용에 걸맞아야 한다.
위에 설명한 영업현황을 다시 살펴보면, 입찰에 참여한 Bidder가 최종결과 발표에 앞서 발주처에 특별한 어필을 하는 자리인 것이다. 게다가 그 발주처는 그때까지 만남을 피해왔다.누가 봐도 비공식적 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양국 국기를 걸어 놓고 장시간의 presentation(면담에 할당받은 1시간의 반을 넘는 과도한 presentation)으로 면담을 시작했다. 참석 인물 중에는 우리측에서 브로셔와 선물 등을 가져다 두러 간 다른 지역 담당 사원급까지 포함되었다. 단지 세과시를 위해서…
면담이 끝난 후 장관의 발언 요지는 간단했다. ‘경쟁사나 당신들이나 제안서 내용은 비슷하다. 부수적인 제안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다. 이달 말 결과를 발표하겠다.’ 이 중에서 과연 무엇을 좋은 결과라고 보고한 것일까?
이 사례에서는 2가지 치명적 실수가 있었다.
첫째는 비공식적인 어필을 하는 자리를 너무 공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심리학이나 그에 기반한 행동경제학적 측면에서 보면, 공식적인 이미지를 너무 강하게 만들어서 발주처 수장이 무언가 솔직한 얘기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왜 의사가 되는 자리에서 얼굴도 모르는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따라하게 하는가? 왜 사법연수원 복판에 눈을 가린 채로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동상을 세워 놓았는가? 그리고, 이 사례와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예를 들자면, 왜 공무원들의 집무실마다 국기와 대통령 사진, 복무신조를 붙여 놓겠는가?
협상기법, 행동경제학에서 사람을 통제할 때 유용하다고 알려준 한 가지 방법, 즉, 상징물 제시를 통해서 사고와 행동이 어떤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바로 그 기본적인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넓고 환한 회의실에 온갖 쓸데없는 사람들을 도열해 앉혀놓고 심지어 양국 국기까지 앞에 놓고 무슨 은밀하고 중요한 얘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단 몇 분이라도 조용한 자리에 장관과 본부장이 독대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두번째는 그 소중한 시간을 쓸데없는 회사소개 presentation으로 절반 이상 날려먹은 것이다. 어차피 PQ(pre-qualification 입찰자격사전심사)를 거쳐서 본입찰 막판까지 치고 올라간 판국이다.
입찰평가 과정에서 이미 두 차례나 clarification 미팅을 갖기도 했다. 이제와서 뜬금없이 무슨 회사소개냐?
문제의 그 부장의 마음 속에는 모시고 들어간 본부장이 자신의 고객이었다. 겉으로는 앞에 있는 장관에게 침 튀겨가며 회사를 소개하는 것 같지만, 실은 옆에 앉는 본부장에게 마음속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부장님, 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저 잠시 잊었던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들이 몰랐다고, 의식하지 못했다고 본다.
왜? 영업은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고, 의전은 내 보스를 위한 것이라고, 오로지 경험만을 통해서 몸에 익혀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멍부들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처리 방식이다. 오류를 인지할 여지가 없다.
멍부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읽을 시간에 뭔지 몰라도 일을 한다. 멍부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할 시간에 또 다른 일을 한다.
멍부는 그렇게 해서 자기도 모르게 조직을 망친다. 멍부를 경계하라. 나아가서 자신이 멍부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 속의 멍부를 죽여라.
원문:개발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