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실험, 남한의 PSI 전면참여 선언 등 국지전을 넘어 전면전이라는 ‘전쟁공포’가 쓰나미 처럼 몰려오는 시점인 지난 6월 1일부터 3일, 나는 본의 아니게 예비군 훈련을 떠나야 했다.
하필 동원예비군 마지막 년차에, 이런 해괴한 기분으로 예비군을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나는 군화끈을 질끈 동여매고, 써지지 않는 모자는 손에 든 체, 혹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집을 한 차례 둘러보고 나섰다.
이 엄중한 현실 속에서 떠나는 동원예비군 훈련이기에 “혹시나 교육훈련이 거세진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는 별 시덥잖은 걱정으로 버스타고 가는 내내 잠 한숨 못 이룬 나는 뙤약볕이 내리 쬐는 훈련장에 도착했고, 곧 부대 앞에서 입영열차를 타는 기분으로 입영 셔틀버스에 올라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뭐 정신교육이 좀 강도 높아지긴 했으나, 지난 동원예비군과 큰 차이는 없었다. 엄중한 전쟁위기의 현실을 바탕으로, 예비군 내 분위기를 전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던 나는 별 차이 없는 상황에 허무함을 느낀 체, 예비군이 가진 진보적 가치들을 찾기 시작했다.
1. 평등
예비군은 평등하다. 이들은 입소와 동시에 공동체를 형성한다. 나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서는 ‘아저씨’란 호칭이 통한다. 구분이 어려울 경우, 현역시절 소속 사단의 번호가 동원된다. 나는 ‘30사단 아저씨’였고, 내 옆자리는 ‘9사단 아저씨’였다. ‘아저씨’ 앞에는 빈부격차가 소용없다. 심지어 하사, 소위, 소령도 상관없다. 오로지 ‘아저씨’일 뿐,
다만 아쉬운 것은 그 평등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비군들을 통제하는 현역병들에게는 반말이 사용된다. 반면 현역들은 예비군에게 존대말을 쓴다. 참고로 나는 만인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에 현역병들에게도 존대말을 사용했고, 앞으로도 예비군 훈련을 가는 분들이 현역병들에게도 존대말을 썼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2. 평화
군대조직에 무슨 평화냐고? 이들은 엄청난 평화주의자다. 이들은 단연코 전쟁을 거부한다. “아 놔, 제대도 했는데 전쟁나면 어떻해?”라는 우려섞인 목소리는 이번 예비군 훈련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게다가 이들은 현역 때와 달리 집총을 거부하는 사례도 높은 편이다. 이들은 총 자체를 굉장히 싫어하기에(무거우니까;;) 꼴보기 싫은 물건 아무데나 던져놓고 자기 볼일을 보는 경우가 많다. 사실 그 이유가 평화적 관점이라기 보다 ‘귀찮아서’라는 표현이 맞지만.. 어쨌든 집총은 거부하니까.
그 뿐인가? 교육훈련 중 수류탄, 지뢰 같은 대량살상무기 관련 교보재라도 만질라 치면 기겁을 한다. 이들은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던지고, 터트리고, 지뢰를 설치하고 이런 행위들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3. 생태
예비군 훈련은 자연을 벗 삼는 과정이다. 이들은 예비군 훈련 입소 동시에 생태주의자로 거듭난다. 종이컵은 대체로 사용하지 않고 남이 먹던거든 뭐든 정수기 옆 쇠컵을 이용한다.(이 역시 ‘귀찮아서’;;) 또한 교육훈련 중에는 뒤편에서 야산에 누워 하늘을 보거나 풀 내음을 맡으며 잠을 청한다.
벌레가 기어 올라와도, 옷이 더럽혀 져도 상관없다. 마지막 날에는 잠시 소낙비가 내렸는데, 이들은 판쵸우의를 바닥에 깔고 다시 판쵸우의를 덥고 삼삼오오 잠을 청했다. 역경 속에서도 자연과 함께하는 이들은 엄청난 생태주의자다. 그야말로 이 시간동안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인 셈이다. ‘물아일체’
4. 연대
개인행동을 즐겨 할 것 같은 이들이지만, 이들의 연대 정신은 엄청나다. 기본적으로 평등사회이기 때문에 내무실 안의 대상들의 빈부격차와 상관없이 동일한 돈을 걷어 PX로 향한다. 한 명이 줄을 서면, 다른 한명이 그의 식판을 갖다놓는다. 엄청난 연대의식이다.
훈련 중 교육훈련이 과하다 싶으면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야말로 한 목소리로 ‘쉬었다 합시다’를 외친다. 아침 점호 중 간부가 늦게라도 나올라치면 이들은 한 덩어리로 그냥 내무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연대 아닌가?
원문:달고나 블로그
ps1. 정신교육을 받으면서 느꼈던 부분이 있다. 중학생 대상 여론조사를 했는데, 가장 전쟁위협적인 국가로 미국과 일본을 꼽았다며, 교육관이 안보의식이 엉망이라고 푸념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아 우리 청소년들의 세계관이 정확하구나 싶었다. 미국은 지난 몇 십년 간, 발생했던 전쟁의 대부분에 관여했던 국가고, 일본은 핵무장과 선제타격론을 주장하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국가다. 게다가 또 다른 전쟁위협국인 북한이 3위를 했으니, 큰 오류는 아니다.
ps2. 참고로 위에 ‘평등-평화-생태-연대’의 가치는 진보신당이 전면에 내세우는 가치다. 거기서 모티브를 얻었기에 출처를 밝히지만, 나는 진보신당 당원은 아니다.(200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