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참 나이 어린 작가가 황망한 일을 당한 뒤 “우째 이런 일이!”를 연발하는 걸 보았다. 경상도 출신도 아니면서 그 말을 쓰는 것이 우스워서 그 표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들 관용어처럼 사용하지 않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말이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아는 관용어로 자리잡은 계기를 아마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녀가 초등학생 아니면 유치원생 때였을 1993년 초의 일이었으니까.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1993년 초반, ‘문민정부’의 찬연한 타이틀을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는 하늘에 구멍을 숭숭 뚫을 듯 드높았다. 지지율은 96%에 육박했으며 이는 지금껏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에게 거의 표를 주지 않았던, 즉 야당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던 호남 지역에서도 그 현상은 다르지 않았다. 수십년 한국 정치를 지배해 왔고 그때껏 힘을 잃지 않던 정치군인들의 뿌리들을 “놀랬재?” 한마디와 함께 날려버린 두둑한 배짱도 멋있었지만 그의 인기를 치솟게 한 것은 거침없는 사정의 칼날이었다
오랜 세월 한국 사회에 칡넝쿨처럼 얽혀들어 있던 부정부패의 촉수들에 거침없는 (혹은 거침없어 보이는) 칼질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 시작으로 군 장성 진급 관련 비리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졌다. 워낙 많이 받아먹은 나머지 전 참모총장의 별명이 ‘금빨대’라는 둥, 돈 주고 별을 산 장군들은 “땅 팔아 별을 샀다”고 하여 땅별이라 불린다는 둥 흉흉한 소문들이 자명한 사실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80대의 일본인 은사가 글을 보내 “앉으면 다다미 한 장 누우면 다다미 두 장, 예나 다름없이 청빈을 달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무쪼록 거짓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힘써 주기 바란다”라고 한 얘기를 읽고 또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는 국회의장도 재산 신고 때 빌딩과 별장을 빼놓았다가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통령도 국회의장과 오랜 친구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씁쓸해했다고 했다.
이렇듯 대통령으로부터 상방검(옛날 임금이 출전하는 장수에게 하사했던 칼)을 받아 인정사정없는 사정(査正)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대통령의 오른팔 최형우 사무총장이었다. 최형우 사무총장은 속 시원하게 사정의 칼을 휘둘렀고 국민들은 환호했다. 칼끝이 향한 목표 중 하나는 대학 입시 비리였다.
기실 각 대학에 부정입학생들, 즉 시험을 보지 않고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많았다. 모 전직 대통령의 조카는 승마 특기자로 입학했는데 체중이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였다. 그 체중으로는 적토마를 데려온들 승마 특기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얼뜬 행동을 보이거나 하면 “너 잔디 깔고 들어왔지?” 즉 너 돈 내고 들어온 게 아니냐 하는 농담이 대학가에 횡행했던 것이다.
부정입학자들과 대학 관계자들의 이름이 연일 지상을 수놓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드높을 즈음, 천만뜻밖의 보도가 터졌다. 그렇게 개혁을 선도하며 성역 없는 사정을 주도하던 최형우 사무총장 본인의 아들이 대학에 부정입학했다는 폭로였다. ‘개혁 총장’ 최형우는 스스로 말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오른팔이 부러진 김영삼 대통령은 망연자실했다. 이때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이 “우째 이런 일이”였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그 후 이 말은 참담하고도 황망한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4천만 인구가 되씹는 읊조림이 된다.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그리고 1994년 3월 14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 말을 내뱉었다. 기가 막혀서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어느 고등학교 교사들이 강남경찰서 기자실로 몰려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리와 부정,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교장의 전횡에 대해 눈물로 폭로했다. 어떤 이는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격하게 대성통곡을 했다. 너무도 쌓인 게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그 내용을 들어보면 가히 대성통곡도 모자랄 지경이다.
“영어 채점을 하고 있는데 교감과 학년 주임이 와서 31점 받은 박아무개 군이 영어 수를 받을 수 있도록 34점으로 고치라고 강요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김포 세관 간부더군요.”
“이야기 나온 그 학생의 세계사 채점을 하고 있는데 비슷한 요구가 있어서 거절했더니 교감이 와서 왜 말을 안 듣느냐며 직접 고쳤습니다.”
“어느 회사 이사의 아들이 ‘우’가 나온 것을 교감이 직접 ‘수’로 고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여기까지도 분통이 터질 지경인데 2차 양심선언에 합류한 교사의 울먹임을 듣다 보면 그냥 같이 붙들고 통곡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학교는 돈 많은 집 아이들 성적을 조작했을 뿐 아니라 돈 없는 집 아이들을 억누르고 쥐어짜는 노릇까지 다 했다. 교사에 따르면 한 학생은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버스 운전사라는 이유로 반장을 맡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 선거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야 반장을 할 수 있었고 학생회장까지도 맡았는데 학교 쪽은 이 학생의 부모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졸업생 수상자에 해당하니 기부금을 내시오.”
담임 교사는 넉넉잖게 사는 학생의 부모로부터 100만원을 받아들고 가슴을 쳤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서까지 교사를 해야 하나 하고.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찬조금을 받아내지 못하면 자신의 월급으로 그걸 메워야 했으니 말이다. 교사들로 하여금 학교 옆에 세워진 재단 소유의 골프연습장에서 공을 줍도록 했던 학교에서 무슨 일이 가능했을까. 온갖 기기묘묘한 비리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이를 세상에 알려 보려는 교사는 으슥한 밤길에서 괴한들에게 폭행까지 당한다. 참 세상에나 만상에나 우째 이런 일이.
영화보다 더 한 사립학교 비리
이쯤 되면 대체 학교 이름이 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여기서 영화 두 편을 힌트로 드린다. 먼저 배우 권상우가 주연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있었다. 그가 울분에 차 “××! 대한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그의 일생일대의 연기였고 리얼리즘의 극치였고 두고두고 남는 명대사로 빛날 것이다. 그런데 그를 그렇게 울분에 빠지게 한 학교는 말죽거리를 ‘나와바리’로 한 ‘정문고등학교’였다.
두 번째 힌트. 정준호가 주연한 코미디 영화 <두사부일체>에도 아주 황망한 학교가 등장한다. 교장이 앞장서 성적을 조작하고 학교를 자기 호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르던 학교, 급기야 졸업장 따러 학교에 간 조폭 조직원이 열 받아 “학교를 접수한다”고 똘마니들을 출동시켜 학교 쪽 깡패들과 맞서기까지 했던 이상한 학교. 아이들을 때려잡는 데 일가견이 있던 교사마저 학교 쪽의 만행에 견디다 못해 눈물의 양심선언을 해야 했던 희한한 학교. 영화 속 학교의 이름은 상춘고등학교였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까라고 외쳤던 정문고등학교와 <두사부일체>의 상춘고등학교를 합치면 그 학교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상문고등학교다. 두 영화의 배경은 상문고등학교였고 위에 언급한 양심선언 속의 그 학교였다.
교사들의 통곡으로 이뤄진 양심선언으로 그 거악의 꼬리가 드러나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또 한 번 “우째 이런 일이” 소리가 튀어나왔던 것은 교육청 감사팀이 출동했을 때였다. 교육청 감사팀이 상문고등학교에 긴급히 쳐들어간 것은 좋았으나 학교 쪽이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버티는 통에 멀거니 앉아 있다가 돌아갔고, 교직원들은 취재진의 접근을 막으면서 증거가 될 시험 답안지들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머리가 심하게 짧았던(상문고등학교의 두발 검사는 악명이 높았다) 학생들이 달려와 자신들이 경험한 학교 비리를 쪽지에 적어 기자들에게 건네주며 파이팅을 외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미 그곳은 교육의 현장이 아니었다. 교장과 이사장을 꿰찬 부부의 왕국이었고 돈벌이 터전이었고 교사들을 농노, 아니 교노(敎奴)로 거느린 봉건영주의 성이었다. 내친김에 신문 기사 하나를 들춰 보자. 1985년 5월23일 <경향신문> 기사다.
“사회정화위원회는 상문고교 교장이 영어 수학 담당 등 4명의 교사를 동원, 비밀과외를 해 온 사실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구속된 인원은 교사 등 4명이었다. 그럼 동원한 교장은 어디에? 그다음 기사를 보면 더 아리송하다. “그러나 경찰은 교장에 대해서는 과외교사와 공범으로 처벌할 수 있으나 아직 학부모를 처벌한 전례가 없어 입건하지 않은 채 국세청과 교육위원회에 통보했다.”
즉, 교장을 처벌하지 못한 것은, 교장이 바로 ‘그 학부모’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문고의 교장이자 주인은 자기 학교 선생들을 불러 자기 자식 과외를 시켰다. 그런데 정작 어쩔 수 없이 과외를 한 교사들은 몽땅 쇠고랑을 찼는데, 막상 자기 애 공부 가르치라고 명령(부탁은 아니었을 테니까)한 교장은 ‘학부모’라는 이름으로 입건조차 안 된 것이다. 이 기묘한 나라, 그게 한국이었다.
이쯤 되면 우째 이런 나라가! 소리가 튀어나올지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상춘만 교장은 이렇게 얘기한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조선 땅에는 널린 게 선생이야.” 왕년의 상문고등학교 교장은 그의 반평생 내내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조선 땅에서는 사립학교 주인이 장땡이야.”
이렇게 한 학교를 말아먹고 수십억 돈을 챙기고 성적을 조작하여 뭇 선량한 학생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범죄를 저질러 처벌을 받고도 전 교장과 전 이사장 부부는 상문고등학교에 돌아오려고 기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다. 1974년 14평 연탄 아파트에 생활하던 사람이 1994년에는 200억원이 훨씬 넘는 거부가 됐다는 보도가 있었으니, 세상에 그런 재테크 수단을 뺏기고도 눈에 불을 켜지 않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당시의 기사다.
“교장 집의 1층 거실은 대리석 바닥이었고 호화가구와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었다. 각층을 연결하는 복도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10m 길이의 샹들리에가 지하 1층에서 2층까지 복도가 난 공간을 관통하면서 매달려 있었다. 지하에는 20여평 정도의 홈바가 있었는데 외제 양주 등 고급술이 벽 쪽에 가득 놓여 있었다. 홈바 밖에는 인공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탐욕과 주책은 죽어야 낫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횡령 등 혐의로 구속까지 됐던 교장 일가였지만 횡령 금액을 다 갚은 뒤에는 또다시 이사진으로 복귀했다. 학생과 교사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고, 교육청이 이사진 승인을 철회하자 이번에는 교장 일가는 행정소송을 낸다. 그런데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판결로 상문고 학생과 교사들을 기함하게 만든다.
“교사들이 불법적인 실력 행사로 재단의 이사진을 바꿀 수도 있다는 선례를 남겨선 안 된다.”
그 뒤 상문고등학교는 기나긴, 그리고 허다한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비리재단 반대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 소용돌이는 90년대를 넘어 21세기까지 이어졌다. 그 단면이 극적으로 표출된 순간 중 하나는 2001년 상문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이날의 주인공은 장아무개라는 새로운 교장이었다. 94년 교사들의 양심선언 당시 교감으로서 교사들이 성적 조작의 주범으로 지목했던 대상이며, 감옥까지 갔다 온 이였다, 그런 사람이 교장으로 임명돼 입학식에서 훈화를 하겠다면서 학교에 발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1999년의 사립학교법 개악으로 천하 없는 비리를 저지른 사람도 2년 뒤에는 복귀가 가능했으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퇴를 촉구하는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이 했다는 말은 이른바 교육자라는 사람의 얼굴이 어느 정도 두꺼울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1994년도에 나는 위에서 시켜서 한 죄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교장이 하고 싶었을까. 아니 대관절 이 나라의 법이 어떻기에 그런 사람이 교장으로 입학생들에게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훈계를 할 엄두씩이나 낼 수 있었을까. 아니 거슬러 올라가 대관절 상문고등학교라는 교장과 이사장 일가의 복마전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1994년 교사들의 양심선언 중의 일부 증언으로 짐작할 수 있다.
“교장은 학교를 입시사관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교사와 학생들을 옥죄어 명문대학교에 많이 입학시키면 모든 부정이 덮어진다는 것이 교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태의 주범이었던 교장은 많은 공범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장아무개 교감을 위시한 그 똘마니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애 성적이 잘 나오겠지요?” 하면서 돈봉투를 쥐여 주던 학부모들, 그럴 능력은 안 되어도 어쨌건 애들 잘 휘어잡고 공부 열심히 시켜 명문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면 좋은 학교라고 눈 지그시 감았던 학부모들, 교장 교감이 성적을 고치라고 지시할 때 울컥하다가도 “세상이 뭐 그런 거지”하며 마지못해 응하며 ‘내가 교장 비리 캐내서 뭘 어떻게 하겠냐’ 했을 교사들, 졸업이나 하고 좋은 대학 가면 그만이라는 학생들, 그 모두의 묵인과 좌시 앞에서 골백번 “우째 이런 일”을 읊을 사건들이 이 세상에 펼쳐졌던 것이다.
그래도 이 상문고등학교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2002년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비리 재단의 학교 복귀를 물리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학생과 교사, 학부모를 비롯하여 교장 개인의 전횡과 비리를 목도하며 울분에 떨었던 졸업생들까지 합세하여 행동에 나선 결과였다. 서른 줄에 접어든 졸업생들이 “정의는 살아 있다. 상문인아 일어서라.” 팻말을 들고 모교 앞에 섰던 모습은 기억에도 새롭거니와, 그들이 “이건 아니다!”며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학교는 이 나라의 ‘법’과 ‘전례’와 ‘분위기’로 인해, 귀신도 혀를 빼물 비리를 자행하던 이들에게 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저 혀를 차는 것 가지고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울분을 토하고 식탁을 두드리는 것으로는 숙취밖에 얻는 것이 없다. 행동에 나선 사람들만이 뭔가를 바꿀 수 있었다. 상문고등학교의 90년대는 그 사실을 선연히 증언하고 있다.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