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들에게 가장 괴로운 순간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절박한 순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여 간절히 부르짖었는데도 그가 침묵하실 때일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가장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였던 그 때에 오직 하나님의 손길만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그 순간, 아무런 응답도 도움도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버림받은 배신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때까지 확신있게 믿었던 ‘신의 실존’까지 의심하게 된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태신앙이든, 나중에 믿게 된 경우든 누구나 한번 이상 ‘혼란의 순간’들을 맞게 된다. 그 혼란의 순간은 바로 가장 비참한 삶의 굴곡을 지나갈 때에 ‘하필 그 순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시기다.
그 전까지 나와 내 인생을 선한 목자처럼 인도하시고 책임지시던 하나님의 손길과 임재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모든 은총이 사라진 팍팍한 삶의 현장에는 쓰나미같이 밀려오는 재난의 파국이 연속적으로 들이닥친다.
이런 이야기… 어딘가 낯이 익지 않은가?
사실 이런 비슷한 이야기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 속 ‘욥’의 이야기다.
욥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기 1:13-19]
욥기는 어찌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한다는 설정도 그렇고, 그 내기의 대상인 욥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끔찍한 재앙이 연속적으로 닥쳐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이야기도 황당하다. 욥기의 이야기가 들려주는 주제는 심오하고 어렵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두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첫째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세계가 ‘권선징악’적인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욥기는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대체로 ‘권선징악’의 세계관을 선호한다. 그래야 이 ‘세계를 일관된 원리로 다스리는 신’을 믿기가 더 편하고 현실 속 부조리와 모순 속에 살아갈 용기를 얻으니까. 욥기에서는 그런 믿음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이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지만, 결국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네가 뭔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신께 대한 불경한 죄가 있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며 욥을 정죄한다. 욥은 그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며 논박한다. 욥과 친구들이 논쟁하는 내용이 욥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기 11:4~6]
※욥의 친구 소발의 첫번째 공격. 소발은 욥이 아무런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당한 재앙의 수준을 볼 때 그는 분명 하나님께 커다란 죄를 지었으리라고 확신하고 그를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 성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지하고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인과적 세계관이 현실속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가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신앞에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죄를 범하면 저주를 받는 기계적 세계관으로 욥의 비극들을 해석했다. 욥이 스스로 자신의 무죄함을 강변하지만 저런 끔직한 고난과 비극이 연속해서 닥친 데에는 분명 욥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한 것이라 이해한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설마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욥이 저런 황당한 재앙을 당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이든 다른 무엇이든간에 욥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단순한 인과율의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욥기가 가르쳐 주는 두번째 분명한 사실은 신앙을 갖고 있는 (심지어 하나님이 각별히 사랑하는) 신앙인 조차도 끔찍한 고난과 재앙을 당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있다. 더군다나 욥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근데 이게 참 무척 불편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15:16-
무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하려 하신다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소소한 기도의 응답은 하시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는 심각한 고난과 재앙 속에서는 왜 침묵하시는가?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 정도 풍성한 기도응답의 약속을 하셨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내 삶에서 가장 심각한 재앙과 고난의 위기에서만큼은 지켜주셔야 하지 않는가?
아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신앙인들이 이런 회의와 질문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욥기는 결국 끝에가서는 욥의 건강도 회복되고, 친구들의 오해도 풀리며 처음의 복이나 소유보다 더 큰 복과 소유를 축복으로 받으며 끝이 난다. 그러나 현실 속 많은 신앙인들의 삶은 꼭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이 말하는 것
우린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와 비밀을 캐내는데 혈안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서점의 기독교 서적 코너만 가보더라도 ‘기도응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아우성치는 책들이 차고 넘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난 속에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기도응답이 없는 현실에 대해 깊이 성찰한 책은 상대적으로 무척 적다. 물론 개중에는 ‘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롱/ 새물결 플러스) 같이 훌륭한 책도 있지만~그런 주제를 다룬 책들의 수는 ‘기도응답’의 주제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안될 만큼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고난 속 신의 침묵과 기도의 응답이 부족한 것을 해석해 내는 것은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해석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응답받는 풍성한 기도’의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고난 속 신의 침묵’가운데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어느 누가 ‘정작 내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깊고 선한 뜻을 헤아리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기독교가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보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속 신의 침묵에 대해 묵상하고 깊이 사유하는 것이 신앙과 인생에 대해 더욱 더 많은 통찰과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한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이, ‘기도응답 속 신의 임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왜 악이 득세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고난을 받고, 항상 정의가 승리하는 것은 아니며,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은 고쳐지지가 않는 것인지’ 이런 근본적인 질문앞에 기독교인들은 마땅히 대답할 논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사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저런 이슈에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과 자기가 다니는 교회활동에만 관심있는 교인이라 하더라도, 예외없이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재난은 닥쳐온다. 그리고 그 고난과 재난 속 신의 침묵은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교회봉사 열심히 하면 복받는’ 단순한 은혜와 축복의 원리가 지배했던 그의 인생을 혼란과 고통이 가득한 회의의 세계로 던져버린다. 그리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회의와 번민은 지금까지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삶의 원리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은 신앙인들을 ‘정답이 있는 온실 속 신앙’에서 ‘정답이 없는 현실 속 모순과 고통’ 앞에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침묵하는 신’앞에 계속 억울함을 토로하며 따지듯 묻는다.
‘왜 하필 나입니까?’
내 삶에도 그런 고통과 회의의 시간이 참 길었다.
인생의 고통에 신앙이 대답하지 못한 시절
내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은 오랜기간 기도했던 가장 간절한 기도가 끝내 응답받지 못한 아픈 기억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 1학년때 친구가 건네준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의 성취를 이뤄낸 한 인간이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신앙적 회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너무나 설득력있고 진솔하게 그려낸 책이다. 내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쉰의 나이에 나를 자살의 직전까지 몰고 온 그것은-더할 나위 없이 간단한 질문, 모든 인간의 영혼에 깔려있는 질문이다…대답을 얻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질문. 그것은:
“오늘이나 내일 내가 하는 일의 결과는 무엇인가?
아니, 내 인생 전체의 결과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왜 살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무언가를 희망하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걸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내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를 기다리는 저 죽음도 파괴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레오 톨스토이,<참회록 (A Confession)>에서-
그리고 6개월 후에는 어머니를 전도하여 같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사소한 기도를 해도 모두 다 응답이 되는 신비한 체험의 연속이었고, 책을 통한 지적인 설득이 기도응답을 통한 경험적 확신으로까지 발전하며 ‘신의 실존’을 그 누구보다 열렬히 믿었던 신과의 뜨거운 첫사랑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앙적 첫사랑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가 신비한 예언의 능력을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어떤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었는데 점점 더 그런 체험을 이야기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점점 더 그런 환상이나 환청이 어머니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불신하고 관계를 파괴시키는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어머니 주변의 모든 사람 (친척, 친구, 교회 교우들, 심지어 내 친구들까지) 모두가 작당하여 어머니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하나의 세력으로까지 이야기가 발전해 갔다. 결국 2년이 넘는 기간동안 어머니가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하다가 ‘기독교인의 정신질환’ 세미나에 참석해서 어머니가 망상형 정신분열증을 앓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임상사례들이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어머니와 너무 똑같아서 그제서야 어머니가 심각한 정신분열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증세를 알고나서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까지 무려 15년의 시간이 걸리게 될줄은 몰랐다. 어머니의 망상을 심화시키는 정신분열은 결국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신뢰의 관계였던 나와의 관계마저 파괴시켰다. 내가 회사를 출근해도 자기가 잠시 집을 비우면 내가 몰래 집에 숨어들어와서 어머니가 아끼는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해를 가하려 한다는 망상의 수준까지 발전했다.
게다가 이런 피해망상에서 비롯되는 어머니의 격렬한 공격성과 집요한 집착은 주변사람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심각한 피해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파국을 불러왔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몇차례나 119를 불러봤지만, 격분한 어머니가 주체할 수 없는 공격적 반응을 보여서 결국 병원으로 데려갈 수조차 없었다.
다른 친척들도 모두 어머니의 상태에 질려버려서 연락이 끊어지고 나 혼자 안절부절 못하며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어머니가 제 정신을 찾게 해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참 오랫동안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정말 심각하게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10여년이 넘어가며 언제부터인가 더이상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가 이 상황을 잘 견디길 바라는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치유를 포기하며 무디어지는 순간에도 가족이라곤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와 더이상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데서 오는 외로움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고아가 아닌데 고아가 되어버린 것 같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그리고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신앙적 회의와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발전해서 각 지방자치단체, 구청별로 ‘정신보건센터’가 생기게 되었고 정신보건센터에서 도움을 받아 겨우 어머니를 믿을만한 좋은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신앙의 의문과 회의는 풀리지 않았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고백
간절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결핍의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에 대한 뿌리깊은 냉소주의와 회의가 생긴다. 나에게도 그런 상태가 몇년간 지속되었는데, 기적처럼 우연히 읽은 하나의 글을 통해 지난 십수년 동안의 아픔과 신앙적 회의가 풀리고 위로받게 되었다. 그 글은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과 신학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기사였다.
“아들과 함께 살아남으려 몸부림쳤다” 스텐리 하우어워스 교수, “정신질환자 가족은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는데, 놀랍게도 그가 겪었던 일들이 내가 겪었던 일들과 너무 유사했다. 그 역시 아내의 정신분열로 말미암아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그 아픔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삶을 유지하고, 아들을 키워냈는지 진솔하게 풀어낸 고백이었다.
“나는 아담과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달리기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나와 같이 정신질환자 가족을 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두었다. 나 역시 그런 가족의 일원으로 겪는 상실감과 고독감과 절망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이 약, 저 약을 시도해볼 때마다 조금은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거의 대부분 그런 희망은 헛된 꿈으로 판명 나곤 했다. 만약 당신이 정신질환자와 함께 산다면 희망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집에서는 5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함께 사는 누군가가 정신질환에 걸렸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인생이 계속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다면 살아남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더군다나 조울증(bipolar)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앤처럼 격심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결국 지쳐 쓰러졌던 것은 앤의 병이 아니라 앤의 분노였었다.”
정신질환자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스트레스는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멈추지 않은 분노와 끝없는 피해의식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그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자신의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그런 정신질환자 가족이 겪는 상실감과 고독감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는 글을 읽으며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시간들이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마치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지금까지 내삶을 지켜보다가 건네는 따뜻한 위로의 말 같았다. 그동안 수고많았다고…네 아픔을 이해한다고…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그가 나보다 앞서 고통을 겪어내고 살아가며 그렇게 버티어 준 것이 고마왔고, 그렇게 진솔한 고백과 위로의 말을 남겨 준 것이 고마왔다.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글은 내 오랜 신앙적 고민과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었다. 그의 글은 내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이유와 유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정한 기도응답은 무엇일까?
기도응답의 간증이 넘치는 시대다. 각각의 내용들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한 기도응답을 통해 ‘물질적인 축복과 성공, 높은자리’에 올라가게 하셨다는 내용이 대세다. 그러나 그런 기도응답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응답은 아닐 것이다. 물질적인 부요와 번영, 권력을 얻는 것이 기도응답의 전부라면 이땅의 기독교는 얼마나 천박해질까?(지금도 충분히 천박하지만)
필요에 대한 기도와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 수준낮은 기도라거나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가 삶에서 필요한 것들만을 구하고 얻어내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기도의 진짜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결국 기도응답에 있어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하나님이 원하는 목표는 바로 우리 ‘존재의 변화’가 아닐까?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스스럼 없이 원하고 욕망하는 시대에 살고있으며 그 욕망의 대상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측정되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대상’들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도도 ‘눈에 보이는 그 무엇’에 대한 결핍의 충족이 가장 중요한 기도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신앙인들이 그런 가치관에 오염되어 착각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충분한 소유가 존재의 결핍을 대신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충분한 소유’가 ‘존재의 결핍’을 대신할 수 있다?
신앙인들 또한 이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에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식이다.
교회의 부흥=많은 교인수
좋은 기업=재벌 기업
좋은 직업=돈많이 버는 직업
행복한 가정=돈많은 가정
좋은 남편=돈많이 벌어오는 남편
좋은 자녀=성적이 좋은 자녀
위의 예들은 모두 ‘존재됨이 소유함으로 치환’되어 동일한 가치라고 착각하는 것들이다. 충분한 소유는 꽤 능력을 발휘하고 편리하지만, 존재의 결핍을 채워주진 못한다. ‘존재의 결핍’은 오직 ‘존재됨’으로만 채워야 한다. 돈많이 벌어오는 아빠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빠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좋은 아빠는 아내와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다. 그러나 많은 아빠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두둑한 용돈과 월급봉투를 갖다주며 ‘존재의 부재’를 ‘돈’으로 대신 채우려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교회의 부흥은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교회의 부흥’을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본질을 상하게 하는 행동’조차 서슴지 않고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가히 ‘맘몬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기도의 응답’은 욕망하는 대상의 결핍을 채워주는 ‘신의 능력’(램프의 요정 지니같은) 정도로 잘못 이해되고 변질되고 있다. 그러나 차고 넘치는 물질적 축복과 소유는 ‘존재의 변화’와는 그다지 큰 상관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기도응답이 ‘존재의 변화’라면 ‘넘치는 물질적 부요와 풍요’로 그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풍요로움 속에서 ‘존재가 변화되고 다듬어지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고난과 결핍 속에 다듬어지는 열매
성경 속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셨다. 사실 사람을 거치지 않고 그분의 전능한 능력으로 직접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수많은 순간에도 그는 그 상황에 적절한 ‘사람’을 보내셨고, 다듬어 준비시켰으며, 그를 통해 공동체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고 구원해주셨다. 결국 하나님이 준비한 최고의 기도응답은 바로 동일한 ‘고난과 결핍 속에 빚어진 사람’이었다. 스탠리하우어워스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장 필요했던 기도의 응답이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만이 곧 ‘신의 임재’는 아니며 기도에 대한 장기간의 침묵이 곧 ‘신의 부재’는 아니다.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소유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다. ‘소유의 변화’는 단번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존재의 변화’는 예외없이 충분한 시간과 인생의 경험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인격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데에는 ‘결핍과 고통’이야말로 필수적인 요소다.
왜냐하면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고통과 결핍은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에 자기가 아팠고 깨어졌던 크기만큼 ‘타인의 아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공명의 공간’이 생겨나게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공감능력과 사랑은 오직 ‘고통과 결핍’의 눈물 속에서만 싹이 튼다.
인류의 구세주였던 예수님의 가장 큰 특징도 결국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대다수 평범한 인간들이 겪는 고통과 결핍의 생생한 체험자가 되어주신 ‘성육신’ 의 은혜가 아니었던가?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사야 53:3,4-(새번역)
‘삶의 모순과 신비’를 이해하는 신앙
오랜기간 ‘고난과 결핍’으로 다듬어진 사람의 특징이 또 한가지 있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는 것이다. 오랜기간 고난과 결핍 속 신의 침묵으로 빚어진 사람은 몇가지 원리로 규정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한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단순하게 판단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신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결핍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 삶인지 헤아리는 성숙함과 사려깊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삶을 분석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삶의 모순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놀랍게도 ‘욥의 친구들’과 같은 단순한 신앙의 원리로 중무장한 교인들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삶의 정답과 원리’가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사업이 실패하거나, 결혼이 실패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을 잃게되는 비극을 누군가가 겪으면 그들은 단숨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간파한다. “새벽기도를 등한시 했거나, 주일성수를 빼먹었거나, 교회 직분에 게으름을 피웠거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거나, 기타등등~~” 그들이 보기에 ‘고난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신앙적 결격사유’들을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서 잘도 찾아낸다. 그래서 그가 속히 회개하고 회복되길 원한다며 ‘확신에 찬’ 조언과 지적질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고난을 당한 이웃과 동료 교인들의 가슴에 이중 삼중의 상처를 주며 대못을 박는다.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그러나 오랜기간 고난속 신의 침묵에 연단된 신앙인들은 타인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당한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보다, 그가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실천한다.
삶의 불가해한 모순과 신비를 이해하는 신앙인들은 그렇게 이웃의 아픔과 고난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며, 현실 속 수많은 불의와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간다는 것이 흔히 착각하듯 ‘교회안에 신자들만의 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통받는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동행하신 하나님’ 처럼,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비극의 현장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기도 응답이다.
내게 있는 결핍과 고통의 상황 속에 묵묵히 내 곁을 함께 걷는 그 분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신앙의 경지일 것이다.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와 함께 동행하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 우리들은 신의 임재와 축복을 나의 소유나 내가 처한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깊은 신의 섭리와 임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어쩌면 이 신앙의 경지야말로 ‘시편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축복이 아닐까?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23:6-
커다란 결핍과 고통의 상황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고난받는 이웃들 속에 함께 거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고통과 결핍의 현장에 동참시키며 함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없다. 존재를 대신할 소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고통과 결핍으로 빚어진 ‘당신의 사람’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IS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 고토 켄지는 고난 받는 이들의 아픔의 현장에 동참하며 활동하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는 카메라를 들고 달려갔다. 4년 전부터 내전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시리아를 오가면서, 아이들의 눈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힘써 왔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로 불면의 밤을 보내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진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당신이 고통가운데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외면하신 게 아니라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을 다듬고 계신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결핍과 고통의 현장 속에 가장 소중한 신의 선물로 선택된 사람이기에, 당신의 존재가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응답이 되기 위해서…
예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