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의제설정 능력은 탁월하다. 물론 그 의제 설정은 철저하게 일반적인 인간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쪽이다. ‘달관 세대’라는 프레이밍을 시작한 조선일보의 기사를 봤다. 조선일보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 세 개를 하고 싶다.
- 이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있으며’ ‘권장할 만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고 보는가?
- 이 사람들이 ‘세대’라고 부를 만한 특수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가?
- 다른 걸 떠나서 이 사람들은 취재를 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기획 과정에 만들어낸 사람들인가?
이 기사에는 ‘달관 세대’의 대표격으로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씨, 박씨. A씨. 내 기준에서 이씨와 A씨는 있긴 있는 인물이다. 조선일보에 의해 멋대로 평가당했을 뿐이다.
그런데 박씨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에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다. 이 사람은 진짜 있는 사람인가? 정말로 이 사람이 존재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보인다. 우선 우선 서울 명문대 신방과 졸업 후 금융기관에서 6개월짜리 인턴을 하고 있다는 이씨, 그가 어떻게 조선일보에 의해 멋대로 평가당했는지 살펴보자.
이씨를 둘러싼 컨텍스트
이씨는 100만원을 벌고 있다. 월세가 25만원이라고 한다. 그는 ‘칼퇴’를 하고 신촌으로 달려갔다.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라고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는 오로지 월세 25만원만 내고 있다. 서울에 월세 25만원이 가능한 곳은 몇 군데 없다. 대표적으로 몰락 일로인 신림동 고시촌이 있다. 그리고 ‘공과금’이라는 압박을 받지 않을 만한 거주지는 딱 하나다. 고시원. 고시원도 월 25만원이라면 고급은 아니다. 중급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
구태여 이씨가 영화를 완전히 합법적인 방식으로 다운받아 보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노트북과 노트북에 연결할 TV 모니터는 어디서 났는지 역시 묻지 않겠다. 햄버거를 즐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올바른 식생활이라고 할 만한가 역시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씨는 조선일보를 상대로 “영원히 이렇게 살 수 있다”, 또는 살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연한 이치다. 이씨는 서울 명문대를 졸업했다. 애초에 인턴이라는 것은 왜 하는가? 정규직을 얻기 위한 스펙으로서 하는 것이다. 인턴을 평생직장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이씨에게 지금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턴이 박봉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씨가 정규직이 되는 순간 이씨는 그 소득수준에 맞춰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더 높일 것이다. 심지어 이씨가 ‘채용전제형 인턴’이라서 시간만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생각해 보자(드문 일도 아니다).
아마 이씨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월세 25만원의 고시원에서 벗어나는 일이라 생각된다. 예전 월 28만원 고시원 거주자의 경험으로서 말하건대, 월세 25만원의 고시원은 1년 이상 버틸 수 없는 공간이다.
이씨는 박봉에 맞춰서 적당히 살고 있을 뿐이다. 영화관 대신 IPTV와 (아마도 불법적인 소지가 있을) 영화 다운로드, 고성능을 요구하는 게임 대신 노트북으로도 돌아가는 무료 게임을 하는 식으로. 금 대신 황동, 금박, 18K를 다양하게 섞어 끼운 생활이다.
그리고 이씨는 단 한 번도 자기가 ‘계속 이렇게 살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냥 “생각보다 싸게 살 수 있더라고요” 정도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아무리 금과 비슷해 보여도 황동이나 14K, 도금은 금과 다르다. 얼핏 괜찮아 보이는 이씨의 주거 환경과 식생활은 매우 열악한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이씨의 취미는 비정상적인 저작권 상태에 의지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높다.
이씨가 뭔가 달관한 것이 있다면 있다. 인턴 월급을 내가 올릴 수는 없으니 거기에 달관한 것이다. 아니면 영화 저작권 문제에 달관했든지. 아니면 점차 망가져갈 몸 상태에 달관했을 수도 있겠다.
초현실적인 박씨
박씨는 매우 초현실적이다. 서울 K대를 졸업했다. 건국대건 고려대건 절대로 평가가 낮은 대학이 아니다. 그런 박씨는 놀랍게도 취업은 커녕 매일 호프집 야간 알바를 한다. 그래서 월 40~60만원을 번다. 심지어 이걸로 옷값도 쓰고 수영장도 다닌다. 매일 밤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한다고 한다.
이 사이에 박씨의 주거 문제는 없다. 뻔히 집에 얹혀 살고 있는 것이다. 호프집에서 받은 돈은 생활비가 아니라 용돈임이 분명하다.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
“백수”. 또는 “갓수”, 더 고전적으로는 “식충이”.
그런데 박씨의 인생관은 놀랍다. 박씨는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 부모가 당연히 바랄 법한 어떤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집에 눌러앉아 전혀 경력과 상관없는 비숙련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런 박씨는 놀랍게도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부모님은 걱정하시지만 정말 알차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글쎄, 뭘 했기에 이렇게 주변의 기대앞에 당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팟캐스트로 세상을 바꾸고 있나?
일반적인 대학 졸업생이라면 1) 졸업을 하고서도 집에 눌러앉아 있으며 2) 주변 친구들과 달리 비정상적인 저임금 알바만 하고 있고 3) 그것을 벗어날 노력을 따로 하고 있지 않으며 4)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자존감이 없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박씨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그 와중에 ‘알차게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강철같은 멘탈리티를 가진 사람은 정말 극히 드물다. 초현실적이다.
A씨와 명품
A씨의 대목부터 조선일보는 아예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내기 쓰기 시작한다. A씨가 서울대 졸업생, 즉 학력 계층의 엘리트 중 엘리트라는 사실은 일단 접어두자. A씨가 어떤 종류의 계약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역시 묘사되어 있지 않으니 별개로 한다. 그런데 A씨가 십자수를 즐기고 중저가 브랜드 쇼핑을 한다는 것부터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생각해 보자. 십자수가 취미라는 것이 어떤 부분에서 특이한가. 특히 ‘청년’이 십자수가 취미면 안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가? ‘중저가 브랜드 쇼핑’이 무엇이 어쨌다는 것인가? 아니면 A씨가 돈이 있는데도 명품을 사지 않는 이유가 있는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냥 돈이 없으니까 명품을 사지 않는다. 주변도 돈이 없어서 명품으로 부러움을 느낄 일이 별로 없을 뿐이다.
A씨는 대체 무슨 종류의 ‘세대’를 상징하는가? 돈이 없고 학창 시절에 한번쯤 해보게 되는 것이 십자수이니 십자수를 하는 것뿐이다. 돈이 없으니 돈에 맞춰 중저가 브랜드를 쇼핑하고 명품의 이미테이션을 두른다.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특수한가? 이미테이션 백을 들고 다니는 40대 아주머니와 A씨의 생각 간에 무슨 차이가 있긴 있는가?
평범한 인간에겐 원래 명품이 없고 명품의 ‘짭’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중저가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A씨의 어떤 부분이 특별하기에 ‘달관 세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가?
조선일보의 의도는 이쯤 되면 뻔할 뻔자다. ‘명품’이나 좋아하고 과소비하기 좋아하며 복지가 어쩌고 정규직이 어쩌고 하는 너희 기득권 3040 정규직과 다른 청년이 있다는 얘기다. 새 시대의 청년들은 이미 그런 것과 거리를 두고 알아서 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A씨는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조선일보에 의해서 특별해진 것에 불과하다.
이들을 둘러싼 ‘달관’
같은 20대로서 저 셋이 정말로 존재해서 취재를 한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이전에 저들은 아무것도 달관한 것이 없다. 그냥 되는 대로 맞춰서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런 건 달관이 아니라 체념과 뻔뻔함이라고 한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체념하면 된다. 부모와 타인의 기대에 대해서는 뻔뻔해지면 된다. 그러면 백수도 알차게 산다는 말이 입에서 나온다.
오히려 진짜로 달관한 것은 부모일 것이다. 이씨의 주거 환경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거나 해줄 수가 없어서 달관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 부모의 기대같은 건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사는 박씨에 달관한 부모가 있을 수 있다. 서울대 나와서 계약직 신세를 전전하는 A에 대한 부모의 달관이 있을 수 있다.
그 3인은 모두 어떤 종류의 ‘기대’를 본의든 아니든 무시하고 있다. 그게 달관 세대라고 조선일보가 이름지은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왜 이들이 전부 청년 내 고학력자에 해당하는지도 명확하다. 이들과 이들 주변의 눈높이에 맞는 직종과 임금을 획득하기는 원래 어렵다. 이들은 어쨌든 배운 사람이고 인텔리에 가깝다. 그런 그들이라서 ‘생산직’ 같은 건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비생산 정규직은 원래 적으니 그냥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프리터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어째서 전부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왔는지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달관 세대’라고 조선일보가 이름 붙여준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딘지 아는가? 신림과 노량진이다. 거기 장수생이 있다. 공부 자체는 달관했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대충 일은 한다. 동네의 물가는 낮으니 살만 하다. 거기 고시 낭인들이 조선일보의 ‘달관 세대’에 가장 가깝다. 뭔가 달관한 게 있기도 하고. 부모 역시 달관했다.
도금은 금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청년도 자기 스스로를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돈 없어도 할만한 것 많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우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소비를 한 다른 사람을 비난할 때다.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한다고 일갈하는 것이다. 자기 기준에서 ‘과소비’를 하다 돈이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많이 봤다. 아니면 실제로 ‘돈 없다’의 기준이 정말 다른 금수저 청년이거나.
청년들은 디지털과 모바일, SNS에 익숙하다. SNS에 같이 놀 사람이 많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타인의 즐거움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의 욕망과 그것이 충족된 광경에 쉽게 노출된다. 그런 청년들이 어째서 안분지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SNS를 한다고 부유한 게 어떤 건지 모르고 사랑이 뭔지 모르겠는가?
돈이 없어도 할만한 건 없다. 모든 것은 돈이 든다. 단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바꾼 것이다. 금 대신 18K. 그것도 안 되면 황동. 그것도 안되면 금박지. 그런 식의 자기기만은 오래갈 수 없다. 아무리 그래봤자 암울한 주거환경에서 심신은 망가진다. 승진할 수 없는 환경에선 일하는 동기가 없다. 또한 아프거나 사고를 당해도 ‘작은 소비’로 만족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달관 세대’는 아무것도 달관한 것이 없다. 애초에 세대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계층의 등장을 암시한다. 한국형 프리터. 그들의 모습이 일본의 프리터보다 나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의 프리터만큼 행복할 수 있는지도. 정상적인 대학 졸업생이 박씨와 유사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면 박씨보다 대충 천 배는 더 자신이 불행하다 느낄 것이다.
편가르기와 분할지배
솔직히 조선일보가 왜 이렇게 뜬금없는 기획을 미는지,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번 생각해본 결과 의외로 단순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조선일보가 일상적으로 하는 분할 지배(Divide & Conquer)에 지나지 않는 문제였다. 청년들의 아주 일시적이거나, 아주 비정상적이거나, 세대를 떠나 너무나 평범한 상황을 가져다 놓고 조선일보가 달관 세대라고 포장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조선일보가 이런 달관 세대라는 프레임을 짜 놓으면 모든 것이 편하다. 실제로 ‘달관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청년을 비정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본 많은 갑들은 달관하지 못한 청년에게 물을 것이다. 왜 이렇게 세상이 좋아졌는데, 경제는 어려워졌는데 많은 걸 요구하냐고.
너희 힘들다더니 이렇게 100만원 갖고도 잘만 살아가잖아? 심지어 저축도 하잖아. 어째서 임금 올려달라, 등록금 내려달라 난리야? 너희들 아낄 수 있는 데 까지 아껴 봤어? 이 청년처럼 IPTV 보면 영화값도 안 들잖아? 왜 요구하는 것이 많아?
이들은 명품도 안 바란다. 몸이 망가지건 어쩌건 좁고 더러운 방에서 잘 산다. 영화관에 가는 법을 잊는다. 왜 너희는 그렇지 못한가?
저임금과 저소득에 맞춰서 사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서 적응해야 한다는 논리다. 임금 제대로 달라, 일 그만 시켜라, 정규직 시켜달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 꼴에 반대하는 악질적인 청년들은 곧바로 종북 빨갱이가 된다.
심지어 이 논리는 청년 대부분의 문제에 공감하고 해결을 모색하려 드는 ‘어른들’에게도 미친다. 조선일보가 뽑아낸 이런 청년, 그리고 이런 청년이 마치 동년배 모두를 상징하는 듯한 ‘달관 세대’의 등장은 중장년 여론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해결책이다. 이미 청년들은 잘 적응해서 나름대로 행복을 잘 찾아냈다. 왜 청년들이 힘들다고 뭔가 요구하려고 하는가? 아니, 조금 더 조선일보 식으로 표현해 보겠다.
어째서 청년들을 정략적으로 동원하는가?
결국 이 달관 세대라는 기사로 청년들은 ‘올바른 달관 세대’와 다르기에 갑에게 두들겨 맞는다. 문제를 바꿔 보려는 사람들은 청년을 동원하는 정치꾼 취급이나 당한다. 그 외의 용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업주부와 워킹맘을 나누는 수법이 생각난다. 똑같은 사람 일각을 ‘신인류’인 것처럼 포장해 나머지 사람을 이기주의에 찌들은 바보로 만드는 수법.
누구도 달관한 적 없다. 달관한 것처럼 보여질 뿐. 그런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