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가 아직도 살아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기현 전 계명대 교수(사학)가 자기 책 ‘해방일기 2’에 쓴 내용이다. 저기서 ‘해악’은 심지어 “남북 분단”이다. 도대체 어떤 기사였기에 이런 비판까지 듣게 된 걸까.
미국, 영국, 옛 소련 외무장관은 1945년 12월 16~26일(현지 시간) 소련 모스크바에서 모여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 동아일보는 12월 27일자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전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이는 명백한 오보였다. 실제 합의문은 이랬다.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미, 영, 소, 중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이를 두고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은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서 ‘의도적 오보’를 냈다고 설명하고 있다. ‘민족이냐 반민족이냐’하던 싸움을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바꾸려던 의도를 깔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게 결국 남북분단 불씨가 됐다는 얘기다. 친절하게(?) “당시는 인터넷과 같은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신문이 가진 정보의 독점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설명한 블로거도 계시다.
정말 그럴까. 일단 이 기사 바이라인(기자 이름)은 “華盛頓二十五日發合同至急報(화성돈이십오일발합동지급보)”라고 돼 있다. 화성돈(華盛頓)은 미국 워싱턴을 뜻하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기사는 25일 워싱턴에서 날아온 외신을 합동통신사를 통해 받아서 전한 것. 요즘이라면 네이버에 ‘워싱턴=연합뉴스’라고 쓰는 상황이었이다. 위 블로거 설명처럼 인터넷이 없었으니 종이 신문에 이렇게 나가던 방식이었다
당연히 동아일보뿐 아니라 조선일보, 신조선보 같은 당시 신문 다음날 아침자에 똑같이 실렸다(당시는 석간이던 동아일보 27일자가 26일 오후에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또 원래 소스였던 UP(United Press·현 UPI)에도 같은 기사가 남아 있다. 이 통신사 기사를 똑같이 전재한 미국 신문사도 있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언론사에는 ‘받아쓰기’, ‘우라까이’ 전통이 굳건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기사가 나올 때부터 좌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싸웠던 것도 아니다. 우익은 영어 trusteeship을 ‘신탁통치’라고 번역한 반면, 좌익은 러시아어 попечительство를 ‘후견’으로 받아들였다. 한쪽이 보기엔 자주독립과 배척하는 개념이었던 반면, 다른 쪽에서 보기에는 자주독립으로 가는 과정을 돕는 개념이었던 것. (엄밀히 말하면 찬탁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저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문제로 싸울 필요도 없다. 소련이 붕괴한 뒤 공개된 비밀문서를 보면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한 뒤 ‘인민정부 수립 요강’을 앞세워 사실상 분단을 의도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 선배들이 부럽기도(?) 하다. 무려 남북 분단을 일으킨 오보를 썼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영향력 있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사 읽기: http://bit.ly/16VwY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