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는 ‘조방’이라는 상호가 붙은 가게들이 꽤 된다. 서울 사람들도 ‘조방낙지’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지만 조방돼지국밥도 있고 조방김치찌개 집도 있었다. 그리고 부산 시민회관 가는 57번 버스의 종점은 ‘조방앞’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이 ‘조방’이란 무엇인가. 이서방 양념 통닭처럼 조서방의 준말일까? 무협지에 나오는 무슨 방을 뜻하는 것일까. 다 아니다. 조방은 ‘조선방직’의 준말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부산 범일동 평화시장과 중앙시장 일대에는 종업원 수천 명이 일하던 식민지 조선 최대의 방직 공장 중의 하나인 조선방직이 우람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이래 일본에 가까운 부산에는 일본인들이 특히 많이 유입됐다. 갑신정변 나던 즈음 1884년에 부산항에 들른 영국 외교관이 “여기가 조선이야 일본이야” 눈을 휘둥그레 뜰만큼 일본인과 일본인 가옥 천지였다. 1차 대전의 전시 호황을 누리던 일본 기업인들은 부산에 방직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공사에 들어가 1919년 완성은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1922년에야 가동에 들어가게 된다. 짓기로 작정하던 무렵에는 방직업이 호황이었으나 공장이 돌아갈 즈음에는 면사 가격이 폭락하는 등 그 반대였던 바, 공장 문을 닫을까 말까 하던 상황에서 총독부가 개입한다. “연 20만원씩이노 줄 테니 계속 돌리도록 하라데쓰.”
조선방직은 그렇게 민간기업이면서도 총독부의 국책 기업, 요즘으로 치면 공공 사업장 같은 공장으로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일터로 성장해 갔다. 2800명 정도의 노동자가 일했다고 하니까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그런데 공장 규모는 커졌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다.
공장 노동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여직공의 경우 최저 20전에서 최고 40전, 남공은 최저 28전에서 최고 60전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콩 300그램의 가격이 소매가 50전, 공설시장가 45전이었으니 하루 벌어 콩 두어 줌 사면 끝이었다. 거기다가 스패너같은 공구는 자비로 사서 장만해야 했고 충청도나 경북의 농촌에서 “떼돈 번다.”고 꼬셔 온 여성 노동자들의 경우 기숙사비로 한 달 4원을 뗐다고 하는데 한 방에 13명이 새우잠을 자고 침구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했다. 돈을 버는 건지 바치는 건지 모를 지경.
그 뿐이 아니라 일본인 노동자와의 차별은 바라보는 눈이 아플 지경이었고 실수로 불량이라도 나면 조장이나 관리자의 손바닥이 여지없이 노동자의 뺨을 향해 날아갔다. “바가야로” 밟으면 지렁이도 꿈틀하는데 이런 식으로 짓밟혀도 묵묵히 일만 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그냥 소나 돼지지. 조방 노동자들 역시 소나 돼지가 아니었다. 1930년 1월 10일 조선방직 공장에서는 파업의 깃발이 솟는다.
다음 날 오전 회사에는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확립” “승급제 확립” “해고반대” “식사에 대한 개선” “출문권 폐지” 등 12개 항의 요구조건이 작성된 등기 우편이 배달됐다. 회사는 코웃음을 치며 가가호호 방방마다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작할 것을 종용했지만 노동자들은 거부했고 어영부영 출근한 50여 명의 노동자도 죄다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파업의 주력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회사에서는 주동자만 분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파업 주동자 20여명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극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중요한 직공 이십 명을 짐을 싸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하자 나머지 여직공들이 앞서 말한 이십 명처럼 집에 돌아가겠다며 제각기 울며 아우성을 치니 보기에 처참하므로” (동아일보 1930.1.13) 이에 격분한 남성 노동자들도 기숙사를 박차고 나와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로부터 열 하루 동안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치열하게 싸운다. 총독부의 국책 공장이던 조선방직의 파업은 곧 일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고 일제 역시 그를 부인하지 않는다. 경찰 책임자는 “광주학생운동 주도 세력이 배후에서 노동자들을 선동해 조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으며 기숙사를 폐쇄하여 가족조차 접근하게 못하게 한 가운데 일제의 소방차는 영하의 날씨에 여공들에게 물대포를 선사한다. 여성노동자들은 전원 단식 투쟁으로 이에 맞서는데 한 번은 회사에서 회유한답시고 밥을 제공했는데 그 밥은 나흘 된 찬밥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밥그릇을 집어던지며 울부짖는다.
“세상에서 흔히 여자는 다 어리석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이고 약한 인간이라고 하고 더욱이 우리같은 여공들은 사람같이 보지 않고 무시하지만, 이번의 동맹파업을 일으킨 뒤로 우리 여공들의 단결된 굳센 힘은 회사 중역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요구하는 두가지 중요한 조건을 들어줄 때까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울 작정이다.”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경찰과 헌병대, 그리고 회사의 삼위일체 탄압과 한창 위력을 발휘하던 치안유지법을 근거로 한 지도부 체포, 여성 노동자 중심의 파업 동력과 남성 지도부의 엇갈림, 파업 지도부의 유약한 자세 등등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가운데 열 하룻만에 파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견결한 파업 대오가 무너지고 일부가 직장에 복귀하자 기숙사에서 농성 중이던 여성 노동자들 수백 명이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조방파업’은 끝났다.
당시 조선에서 조선방직 정도 규모의 공장은 흔치 않았다. 그런 공장에서의 파업은 조선 천지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대개 역사 교과서에서 이런 류의 사건은 “30년대 들어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등으로 인해 노동과 소작 쟁의는 치열해져 갔다.” 정도의 한 줄 속에 다 녹여 왔기 때문이고 시험에도 당연히 안 나오기 때문이다. 교과서가 중요한 이유다.
그렇게 노동쟁의의 역사를 외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조방 파업 당시 파업을 대하는 회사와 당국의 대응이 요즘과 그린 듯이 똑같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분열 공작과 지도부 매도, 농성장 폐쇄와 지원자나 지원 물품 차단, 그리고 찬물 세례와 사법적 구속과 회유, 이 모든 것은 21세기 한국에서도 버릇처럼 행해지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저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도 못한 것이 있다. 파업의 손해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여 수십억원 씩을 ‘손해배상금’으로 안겨 생사람의 피를 말리고 목을 죄는 짓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동남아에 수출도 하고 있다.
출처: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