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필요없고 가장 중요한 건 인간의 존엄성이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민주주의란 결국 누구든 네 목숨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는 것이라고. 당연하다. 인간의 기본권은 죽지 않을 권리다. 사실은 거기서 출발한다. 그 두려움을 벗어난 다음에 굶주리지 않고 뭔가를 의지하고 나아가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 자유에 이를 것이다.
진보건 보수건 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 바 여기엔 다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내가 시비를 걸고 싶은 건 진보 쪽이다. 과연 진보는 1987년 1월 15일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진심으로 묻고 싶은 거다.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동진 27호 납북 사건이다.
동진 27호는 1987년 1월 15일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납북됐다. 80년대에는 피차 납북과 납남이 흔했다 특히 서해상에서는. 북한 어부들이 남한에 끌려왔다가 송환될 때 남한에서 준 옷 다 벗어 던지고 빤스 사람으로 북한으로 만세 부르며 돌아가는 광경이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뭐 그 이전부터 북한에 끌려갔다가 온 어부들은 많았고, 중앙정보부나 안기부가 그 순박한 어부들이 술 먹고 북한 표류기 몇 마디 한 걸로 간첩단 그림 그린 적도 많았고.
동진호가 납북됐다. 며칠 뒤 북한 적십자사는 대개 하던 대로 조사 뒤에 어부들을 송환한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 납북되던 날 함경도 해안에서 김만철의 가족들이 순시선을 타고 탈북한 게 화근이 됐다. 그 사람들을 두고 남북의 승강이가 벌어지고 결국 남으로 오게 된 것이 동진호 선원들에게는 암담한 벽이 됐다.
북한은 이 배가 간첩선 임무를 띠고 왔다고 주장했고 송환은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내일 송환될까 모레 돌아갈까 하던 이들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다. 백보 양보해서 그들이 간첩이라고 치자. 선원들 상당수는 북한에서 가정을 꾸렸고 얼마전 이산가족 상봉 때에도 등장했다.
좋다, 그렇다고 치자. 그들 주장대로 남한의 힘겨운 삶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선원의 삶이야 짐작이 가지 않는가)에서 벗어나 국가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들이 납북된 게 27년이면 그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돌려 보내져야 한다.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눈물 흘리던 진보의 감수성이라면 마땅히 휴전선 이북의 비전향 장기수(?)들에게도 관심을 둬야 한다. “이념을 떠나서 충분히 고통을 겪었고 자신의 희망에 따라 갈 곳을 가는 것이 인간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진보였다면 최소한 동진 27호의 선장 등 북한도 근황을 알려주지 않는 이들에 대한 귀환 호소는 기본으로 했어야 옳았다는 뜻이다.
북한이 공개한 동진호 선원의 근황은 딱 절반이다. 그 나머지는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걸 물어 봐야 하는 건 자칭 진보였다. 왜. 진보의 관심은 이념을 떠난 인본주의여야 하므로 , 정권이 숨긴 사람의 권리를 찾아내야 하므로. 그러나 자칭 진보는 그렇지 못했다.
30년 장기수를 ‘이념을 떠나서’ 그 신념만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진보라면 지금껏 북한이 내세우지 못하는 동진호 선장 이하 몇 명에 대해서는 행방을 물어야 하지 않는가. 그 신념을 존경해야 하지 않는가. 이념 떠나서 돌아오고 싶어하는, 동진 27호 선장의 딸은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다. 그 딸의 증언을 들어보자.
“민주노총 집회에서 장기수를 통일일꾼으로 소개하더군요, 우리 아버지나 장기수나 사실 비슷한 처지인데 왜 우리 가족에게는 그렇게 무관심한가 화가 났어요.
연단 밑에 가서 나도 조합원입니다 하니 반겨 주는데, 납북자 가족협의회 명함을 건네니 안색이 변하고 자리를 뜨더군요.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릅니다. 우리 가족은 노조원 가족도 아니구나….. ”
기실 보수와 진보의 가름은 없다. 단지 억압 앞에서 누가 더 인간을 위하고 권력의 강함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느녀의 차이일 뿐이다. 진보의 가치는 약자에 대하여, 누구도 돌아봐 주지 않는 그늘에 대하여 빛을 비추는 데에 있지, 그걸 못하면 진보도 뭐도 아니고 그냥 시시껍절한 잘난 체 또는 도그마에 갇힌 악다구니일 뿐.
그럼 동진27호 선장의 딸이자 사반세기 동안 아버지 없이 큰 딸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녀와 함께 해 줘야 진보 아닌가. 그냥 쉬쉬? 북한이 사정이 있겠지? 아니면 간첩 아니었을까? 까지 말라는 거다. 이건 진보라는 이름의 수치인 거다.
27년이다. 87년 1월 15일 동진호는 북한으로 끌려갔다. 기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삼을 찾았고 남한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의거입북하면 대우 괜찮았고 월남한 사람들은 한몫 잡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지금도 소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진보는 물은 적이 있는가? 사람의 권리에는 결연히 나설 줄 알고 또 그것이 의무여야 한다고 믿으며 저 노인들이 죽기 전에 고향을 밟아야 하지 않느냐고 목멘 사람들이 동진호를 얘기한 적이 있는가? 나는 그게 애가 탄다. 도대체 그러고서 무슨 신뢰를 기대한단 말이냐.
당시 소녀였던 선장의 딸이 지금은 중년이 됐다. 그녀에게 진보는 대체 뭐라고 할 거냐?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