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하다 보면 나보다 연배가 높은 30대를 필두로 한 분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한두 번 접한 것도 아니고 일종의 컨센서스가 있는 듯한 말이다.
현재의 10대와 20대의 지적 역량과 경험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뒤따라
1) 야성과 열정 2) 모티베이션 3) 통찰의 부재 라는 평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평가가 왜 이렇게 잦은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엿보인다.
중요한 순서대로 언급하면 1) 사회의 변화 2) SNS의 교류방식의 특성 3) 교육의 변화가 있다.
1. 사회의 변화 – 취향존중, 최적화, 양극화
취향의 존중
앞서 언급한 화두에 대해서 주변의 또래들은 “개인들의 ‘성능’은 분명히 경미하게나마 높아졌다. 그러나 공론이라는 차원에서는 후퇴하지 않았는가?” 라는 답변을 했다. 이 평가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 평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취향존중, 최적화, 양극화라는 세 개의 화두에서 시작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사회적으로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받게 되면서, 과거 세대에 비해서 청년들은 훨씬 더 개별적이고 다양한 호불호를 갖게 되었다. 뭔가에 홀리거나 미치는 것은 과거에 비해서 훨씬 사람들에게 권장된다. 그런 시대의 청년들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호불호가 더 확고하며, 더 취미에 깊게 파고든다. 그 과정에서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은 늘어나고 표현 수준은 높아진다. 당연히 제한적인 범주에서 ‘똑똑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현재의 청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평균압’이 낮다. 각자의 취향과 개성은 존중의 대상이다. 인디 밴드를 아는 것은 이제 ‘힙’하지도 않다. 마블 코믹스 매니아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미친 사람에 가까웠을 것이다. 요즘 누가 그렇게 여기는가? 그러나 이 흐름에서 청년은 ‘원하지 않으나 알아야 하는’, 혹은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들이 더 적어진다.
최적화
다른 각도에서 청년의 성장을 보자. 청년이 독립된 인간으로 서기 위한 ‘취업’이라는 관문 말이다. 기업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학은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특성화와 전문화다. A를 하고 싶으면 이전부터 깊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지식을 쌓고 활동을 한다. 최근의 입학사정관제 역시 비슷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구태여 지식 차원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대학에 가봤자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빈곤 청년들은 어떤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빨리 깨닫는다. 단지 학식이 아니라 현실을 지배하는 법칙을 빨리 깨달을 뿐이다. “배운 게 없으면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법칙 말이다.
비록 스티브 잡스로 인해 인문학과 통섭이 주목받고 있다지만 기본은 변한 것이 없다. 과거 세대에 비해 청년으로 갈수록 생존을 위해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시기는 더 빨라지고 수준은 더 높아져야 한다. 20년 전과 지금 금융권에 들어가는 신입사원들을 비교해 보면 극명히 드러난다. 후자 쪽이 실제로 똑똑한지와 별개로 ‘금융에 대한 관심도와 지식’은 압도적으로 높다.
누구에게나 시간과 돈은 제한적이다. 즉 필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교양과 잡학에 대한 투자는 줄고 필요한 부분에 대한 최적화(Optimize)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청년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어떤 분야에서’ 더 높은 성취를 보인다. 청년은 적응한다. 그런 것이 권장되고 있으며 필요하기 때문에. 최적화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반대로 어떤 부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줄어든다. 대표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타인에 대한 관점이다.
어떤 청년이 관련 분야를 좋아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현 시대의 다양한 IT 기반 플랫폼이 일으키는 세상의 변화를 세련되게 풀어낸다고 치자. 그 사람은 SNS에 밝고 모바일 및 IoT(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와 같은 트렌드에 민감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심을 해 볼 수 있다. 이 청년은 과연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에 민감할까? 그들의 경제적 상황에 민감할까?
아마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 청년의 관심사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IT와 SNS와 모바일의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떠나서 그 청년이 그 분야에 대해서 많이 알려면 당연히 많은 시간을 투자해 관련 정보를 살폈을 것이 아닌가. 취향존중과 맞물려 생각해 보면 어떤 문제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심이 없거나 필요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이해도는 낮아진다.
양극화
양극화 역시 주목할 만한 변화다. 청년 세대는 명백히 양극화되어 있다. 단순히 경제적인 차원이 아니다. 생활양식 자체가 그러한 것이다. 막대한 자본을 통해 어떤 청년은 손쉽게 어떤 분야의 지식과 표현력을 쌓아올린다. 하다못해 테크에 대한 시각은 테크에 관련된 아이템을 써봐야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어떤 청년은 트렌드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도 벅차다.
모바일과 인터넷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그로 인한 정보격차를 일으킨다. 스마트폰이 없거나 지나치게 구형인 청년이 어떻게 모바일과 관련된 트렌드에 빠르게 편승하고 거기에 대한 지식과 사고를 쌓을 수 있는가? 모바일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SNS에서 배제된다.
취향에 대한 이해와 감상 수준이 높아지고 지식의 포인트를 좁혀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모두 시간과 자본이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을 가진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들이 있다. 그 격차는 계속 확대된다. 개별 분야에서 ‘똑똑한 장면을 연출하는’ 20대는 그럴 여건이 된 20대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는 20대는 더욱 진보한다. 보이지 않는 20대는 그렇지 않다.
2. SNS의 교류방식
“10대와 20대가 똑똑한 것 같다”는 화두는 현실보다는 SNS, 특히 업계이나 사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SNS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여러 원인이 있으나 핵심은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이건 그 주변에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지 다른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SNS에서는 특히 그렇다.
시니어가 SNS에서 주니어를 접하는 상황을 보자. 이 사람이 직장 후배나 친인척, 제자가 아니라면 십중팔구 관계를 맺는 주니어는 정해져 있다. 어떤 식으로든 시니어가 관심이 있는 주제나 분야에 대해서 시니어를 ‘놀래킬 수 있는’ 사람이다.
특히 인텔리적인 분야에서 그렇다. 사회, 정치, 경제, 첨단 기술 등의 분야에서 ‘똑똑한 20대’가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그 양식 역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다. ‘똑똑한 20대’의 글을 보고 시니어 쪽에서 관계를 맺으려 드는 것이다. 긴 글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SNS에서 눈에 띄는 주니어는 거의 항상 ‘평범하지 않다’. 엣지가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같은 시점의 과거 세대보다는.
이런 분과에서 시니어를 놀래키는 청년들은 경제 성장의 수혜를 잘 받았다. 정보화 수준 역시 높다. 실제로 개별 분야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 여건과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청년들이 만든 컨텐츠는 전파와 공유가 빠른 SNS에 의해 쉽게 퍼져나간다. 시니어는 놀란다. “아니, 얘는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청년의 ‘똑똑한 장면’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똑똑한 장면을 본 것이 아니라 청년이 똑똑하다고 이해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똑똑한 시니어’가 ‘주니어들의 똑똑한 장면’을 계속 접한다. 그 결과로 주니어가 속한 세대에 대해서 ‘똑똑한 세대’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왜 허상인지는 같은 글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보면 알 수 있다. 분명히 같은 글인데 어떤 사람에겐 쉬운 문체로 룸펜(실업자라는 뜻이지만, 냉소, 허무주의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기미 없이 잘 쓴 글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어떤 사람에겐 너무 어렵고 현학적으로 쓰였다는 평가를 받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전자의 사람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은 그냥 똑똑한 사람이다. 그에 비해 후자의 사람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현학적인 헛똑똑이에 더 가깝다. 끼리끼리 모여서 살피다 보니 평균(Average)이 사라지고 편향적인 인식이 강화된다.
3. 교육의 변화
사실 청년이 ‘똑똑하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언급한 상황과 같이 시니어가 주니어의 어떤 ‘생각’을 보고 그렇게 믿는 경우다. 다른 하나가 있는데, 학력으로 입증되는 상황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지표는 바로 문해력이다. 청년들의 문해력은 과거 세대에 비해 훨씬 높다.
또는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느낌이 있다. 학생들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외국어 능력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식. “요즘 애들 무서워. 어떤 애 보니까 중딩인데 토익이 990이던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느낌은 주의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빈부-교육-정보의 격차는 크다. 토익 만점을 받는 중학생은 그리 특이하지 않게 되었지만 반대로 ‘초등학교 2학년’인데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초등학생 역시 등장하고 있는 세상이니까.
교육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이유가 있다. 사회의 변화와 SNS의 소통양식을 언급했던 지금까지의 맥락을 돌이켜 보자. 시니어가 주니어를 보고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는 많은 상황은 순수하게 문해력이나 학력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나 이슈에 대한 ‘생각’과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 받는 느낌이다. 문해력 수준이 올라간 정도로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기는 어렵다. 초등학교 1학년이 영어를 조금 유창하게 한다고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 아이가 금수저라는 의심은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교육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애초에 학력이나 문해력의 문제와는 좀 거리가 있기 때문에. 똑똑한 아이들은 눈에 띄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사실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아 가려져 있다. 평균적인 문해력 수치가 올라가는 것과 개인이 ‘세대가 똑똑하다’는 인식을 받는 건 꽤 차이가 크다.
‘헛똑똑이’
‘똑똑해 보이는’ 청년은 다른 가능성 역시 안고 있다. 특정 분야나 취미에 대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 높은 수준을 성취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분명히 반대급부가 있다. 그 반대급부는 무엇일까?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지방에는 아파트가 없다’고 생각하는 서울의 청년(실화다)같은 것도 있겠고.
청년들이 똑똑해졌다기보다는 ‘예리하게 다듬어졌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다른 각도에서 왜 ‘똑똑하긴 한데’ 라는 사족이 붙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똑똑한 청년들에 이끌려 가깝게 지내기 시작한 시니어들은 다른 것을 계속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에티켓, 인성(글은 잘 쓰는데 태도는 좀 아니다), 자신이 관심이 없는 분야에 대한 저열한 수준의 인식. 축구선수로 치면 킥력은 좋은데 정확도가 없거나 스피드는 빠른데 피지컬이 이상한 상황을 계속 목격한다. 시니어들은 과거의 지성들에 비했을 때 지금의 청년들이 가진 훨씬 불안정한 편차들을 맛본다.
그 과정에서 어떤 시니어들은 ‘요즘 세대는 똑똑하긴 한데 뭔가 이상해’ 같은 결론을 얻는다. 앞서 말한 야성과 모티베이션의 부재, 빈약한 상상력, 통찰력 없음과 같은 다양한 수식어가 붙고 드디어 ‘헛똑똑이’가 등장한다. 최적화가 이루어지면서 ‘쌓을 필요가 없었던’ 어떤 지식의 필요성이 나타나고 거기에 대응이 안 되는 순간 똑똑한 청년이라는 생각은 무너지거나 바뀐다.
결론
어떤 세대나 집단을 얘기하는 데에 있어서는 크게 세 가지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첫번째로 평균. 두번째로 분산(Variance). 세번째로 추세.
분산이 크면 ‘평균적 인간’이 의미가 없어진다. 추세가 다르면 지금 시점의 평균은 의미가 없다. 청년들의 사는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분산이 크다). 청년들의 사는 모습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추세가 급격하다). 결국 ‘평균적 청년’의 모습은 거의 어림잡기가 불가능하며, 어떤 세대를 갖고 통째로 논의하는 것은 거의 무기력하다. 대표성이 떨어지는 상황인데다 남아있는 대표성도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과연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혹은 멍청하다고 믿는 청년은 어떤 청년인가? 청년은 거대한 집단이다. 내가 본 청년들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우위에 있지도, 별로 탁월히 똑똑하지도, 별로 놀랍게 유능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필요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리 세대를 포함한 청년이 과거 세대에 비해서 지적 기반이 약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지표들은 과거 세대에 비해서 청년이 평균적 지적 능력에서 우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년에 대한 인식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청년들은 꾸준히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었으며’ ‘격차가 커졌다’. SNS는 그런 청년들 중 원하는 사람을 취사선택하기에 편리한 매체다. 애초에 사람은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적대적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는 길다. 고작 100년 정도에 뭔가가 크게 변했을 리 없다. 결국 인간을 둘러싼 것이 변하면서 인간에 대한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서 청년이 똑똑하다 말하셨던 분들의 지적인 능력은 사회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들은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을 주변에 둔다. 정말로 그런 문제일 수 있다.
원문 : 잉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