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없는 날나리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이랍시고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야. ‘예장’ 은 뭐고 ‘기장’ 은 뭐고 ‘합동’ 은 뭐고 ‘통합’ 은 뭐냐. ‘고신’ 은 또 뭣하는 거냐.”
이는 개신교 내부의 교파들의 차이를 묻는 것일 게다. 사실 교리 차이는 없다. 오히려 역사의 문제고 실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분할, 분열
조선 선교 초기의 일이다. 선교사들이 ‘미전도 종족’ 의 땅 조선에 몰려들었다. 여기서 ‘나와바리’가 겹치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됐었다. 이 때 네비우스라는 선교사가 조선 땅을 나눠서 선교하자고 제안 한다. 호남과 충청은 미국남장로교, 경남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선교회, 평안과 황해, 경북은 미국 북장로교가 맡기로 한 것이다.
떡 받아먹을 사람 의견보다는 떡 줄 사람들이 알아서 정한 이 ‘분할’은 현대 기독교의 역사를 형성한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이들은 지금 ‘고신’ (고려신학) 이라 불리우는 이들이다. 고신은 호주 장로교 선교 지역인 경남을 중심으로 했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버젓이 했던 인물들이 중심을 이룬 교단에 반기를 들고 갈라져 나와 그 명칭을 표방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의 중심은 평안 황해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매우 보수적인 교리를 고수하는 목사와 선교사들로 주축을 이뤘다. 어느 목사가 이런 설교를 했었다.
“교회에서 여자가 조용히 해야 하고 여자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은 2천년 전의 일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요 만고불변이 진리는 아니다.”
그 목사는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제소돼 혼찌검이 나고, 그 주장을 철회토록 강요 받았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평사리 중) 그런데 캐나다 본국의 여러 가지 상황 변화에 따라, 그 구역이었던 함경도에도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닌 선교사들이 꽤 활약했다. 이들은 간도 지역까지 발을 넓히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도 결합했다. 용정에서 자란 문익환과 윤동주의 신앙의 결은 그래서 “믿슙니다”와 다르다. 1901년 함경북도 최북단 경흥에서 난 장공 김재준 목사의 삶 역시 향용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신교의 주류와는 남한강과 북한강처럼 갈라졌다.
1947년. 장로교 내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교장 김재준을 공개적으로 비난한다. “성서무오설을 비판하여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는 것이었다. 김재준 교장의 주장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슨 기성품처럼 완성시켜서는 그것을 그 사람에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후다닥 집어 넣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말씀’을 외치는 축음기로 삼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통하여그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신학생들 일부는 이 주장에 격렬히 반발했으며, 역시 앞서의 종교 재판 (앞서 ‘여자는 잠잠하라’는 성경 말씀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던 사건) 때 재판장 노릇을 했던 평안도 출신 목사 박형룡은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인가하며 사실상 조선신학교의 존재를 부정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분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해괴한 말을 하기도 한다.) 전쟁 중에 다시 통합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지만, 교수진은 보수색 일색이었다. 분란이 그치지 않은 끝에 한국 예수교 장로회는 김재준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이단’으로 선고 한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것이 ‘기장’. 즉 기독교 장로회다. 김재준은 그 교파의 시조(?)가 된다. 교세로 따지면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발끝도 못 따라가나,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최소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무당같은 주문을 외우지는 않는 교회일 것이다. 그럼 예수교 장로회 내 ‘합동’은 뭐고 ‘통합’ 의 차이는 뭐냐? 나중으로 미루자.
신성 대신 인성으로서의 하느님을 믿다
김재준은 ‘꼴통 기독교’, 즉 인간을 하느님의 부속품 취급하고, 성경 말씀 하나 하나가 절대적인 진리이며 거기에 어긋나는 모든 행태를 이단시했던 강퍅한 기독교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그 막막한 공간을 유영했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歷史)를 통해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따랐던 사람이었다. 김재준은 호세아, 아모스, 예레미야 등 “불의에 가득 찬 시대에 있어 예언자의 용기”를 강조했으며, “어쨌든 권력자는 하느님의 기름을 부은 자”라는 일제 시대 선교사들과 해방 이후 보수적 목사들의 편리한 규정에 반발했다.
그의 일생은 투쟁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에 세 가지의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복음을 성경무오류설에 입각하여 성경주의적 ‘책 종교’로 전락시키는 위험.
둘째는 몰역사적이어서 사회참여와 비판을 오히려 비판하는 타계주의적 신앙.
셋째는 물량주의적 성장론에 빠져버린 데서 오는 세속화의 위험이었다.
(김재준 평전 – 김경재 저 중)
그는 성서 속에 나타난 출애굽의 정신, 예언자들의 정의, 그리고 예수가 선포한 사랑이 단순한 영적 구원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가르침임을 설파했으며 이를 현실 속에서 구현했다.
이후, 김재준은 60세 이상은 대학에서 물러나라는 박정희의 말에 한국신학대학교 (조선신학교의 후신) 를 물러나야 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아주 짧은 글 하나가 독재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었노라고 말한다.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 학생 등이 망동한다’는 담화가 발표했다. 그에 대해 나는 ‘누가 몰지각하냐?’는 식으로 반격하는 발언을 어느 신문에 발표했다. 그게 박의 독재지향성에 대한 나의 선전포고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서 전면에 나선 후, 본의 아닌 망명길이 되어 버린 74년의 캐나다 딸 방문 이전까지 국내에서 벌어진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누군가 “목사가 무슨 투쟁이냐?”고 딴지를 걸면 “예수 역시 싸움을 일으키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가 의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에 매달렸겠는가.” 라고 맏받아 쳤다.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느냐?”는 물음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하룬들 살 수 있느냐.”라고 맞받아 쳤다.
10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도 한국의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던 목사 김재준. 그는 죽기 여드레 전, 성고문 사건과 건국대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등으로 정권이 악행의 극단을 달리고 그에 대한 분노가 무르익을 즈음, 함석헌과 함께 유언같은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한다.
“국민(씨알) 여러분! 우리는 이 이상 상전 모시는 종의 시대에 살지 맙시다. 그러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제 임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국민 여러분밖에 이 나라를 바로잡을 힘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이는 20세기의 첫 해 한반도의 극변방에서 태어나 시대의 무게를 지고 나가며 허공에 뜬 십자가를 지상에 뿌리박으려 노력하던 한 목사의 마지막 설교였다.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버거운 적을 상대로 투쟁했고, 제자의 건강을 위해 모진 눈보라를 뚫고 간어유 한 병을 전하고 돌아가던 살뜰한 스승 (강원룡 목사의 회고) 이기도 했다. 그리고 살인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제자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말라고 독려하던 바위같은 스승이었다.
그런 김재준 목사가, 1987년 1월 27일 역사 속으로 돌아갔다.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