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북한 정권에 이를 가는 뉴라이트가 되어 있고 탈북자들을 돕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고초를 치른 바 있는 강철 김영환씨는 반공교육에서 본 북한 방송에서 김일성의 얼굴을 접하고 참 인자하게 느꼈다는 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싹수가 붉었던(?) 셈이죠.
그런데 고백컨대 저도 비슷했습니다. 공소 시효가 끝났으니 하는 얘기지만 저는 청소년 시절 북한 방송을 꽤 들었습니다. 그 생경한 액센트가 재미있었고 거기서 ‘당과 수령님 따라 천만리’ 따위 노래 들으며 낄낄거리는 건 입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그만이었거든요.
평양방송이든 좀 남쪽 해주에서 쏘는 한민전 구국의 소리 방송이든, 반도의 동남단 부산까지 다 들렸던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철저하게 AM 방송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음질은 나빴지요. 멜로디는 겨우 알아듣지만 가사를 이해할 수준은 못되는 음악이었고 이따금 나오는 북한 방송 아나운서들의 육성도 지직거리는 소리에 묻히기 일쑤였습니다. 이는 AM 방송이기 때문이었죠.
진폭 변조 방식인 AM은 그 전파가 멀리 가지만 음질은 그에 못미치게 마련입니다. 반면 북한방송을 듣다가 ‘김희애의 인기가요’나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을 들으면 마치 옆에서 김희애씨가 속삭이고 이선영씨가 도란도란 들려주는 것처럼 선명했지요, 그건 주파수변조방식인 FM 방송이었으니까요.
AM의 경우 무선신호의 세기가 발신되는 음성신호의 세기에 비례합니다. 그런데 그 전파가 거쳐야 하는 자연 속에는 무수한 변조 신호가 존재하며 이게 바로 잡음이 됩니다. FM방식에선 주 신호의 진폭이 아닌 주파수가 변동하고 FM신호처럼 변동하는 자연전파는 거의 없기에 음질은 깨끗할 수 있었던 겁니다.
1935년 한 과학자가 무선학회 세미나 실에서 FM 전파 시연회를 열었을 때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소리를 담아 먼 곳으로 실어나르는 기술을 개발한 이래 가장 맑고 선명한 음질이 참가자들의 귀를 간질였거든요. 그 과학자의 이름은 에드윈 암스트롱이었습니다.
그는 영화에서 흔히 보는 괴짜 과학자 스타일이었습니다. 외곬수에다가 자신이 궁금한 것이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 그리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순진함까지 말이죠. 그는 전기회로 문제를 개선하는 중대한 발명을 해서 그 특허권만으로 30대에 백만장자가 됐습니다. 콜롬비아 대학 조교수 시절 그는 단 1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 합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안된다는 호기였을까요. (학생들을 가르치지는 않고 연구만 했다고 합니다)
암스트롱은 FM을 발명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송수신기에 기본적인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기존의 라디오 제조업자들이 즉각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 연방 통신위원회를 설득해 42-49 Mhz의 라디오 주파수 대역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는 한편 1939년 FM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30만 달러 이상의 경비를 부담하여 최초로 완전한 규모의 FM 방송국을 세우고 각지의 독립 FM 방송망을 지원합니다. 획기적인 발명을 해 놓고도 이런 수고를 해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죠.
한때 암스트롱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도 했던 대기업 RCA가 이 FM을 탐탁잖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RCA는 AM 라디오 시장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FM이 활성화하면 그 손해를 자신들이 감수해야 할 형편이었으니까요. RCA는 대기업의 힘을 발휘하여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를 구워 삶습니다. ‘전리층에 위협을 준다.’는 황망한 논리를 동원해서요.
결국 1945년 FCC는 기존 FM 라디오 주파수 대역을 회수하고 전혀 새로운 대역 (오늘날 우리가 쓰는 88-108MHz)을 주지만 기존의 FM 수신기로는 수신할 수 없는 주파수였고 기껏 구축해 놓은 FM망은 일거에 무력화하고 맙니다. 여기서 그쳤다면 RCA의 행동은 그나마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발버둥(?)으로 여겨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원래 가진 놈들이 더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
RCA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FM 라디오 기술에 대한 암스트롱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고 FM 수신기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죠. 악전고투 끝에 FCC가 제시한 주파수 대역에 FM전파를 올려 놓는데에 성공한 암스트롱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죠. 1949년 그는 RCA에 특허권 침해 소송을 냅니다.
그러나 기나긴 소송 과정에서 그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파산합니다. ‘RCA가 독자적으로 FM을 개발했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는 상대편의 유능한 변호사들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비슷한 꼴을 두 번째로 당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는 20여 년 전 AT&T와도 멀쩡히 그가 특허를 낸 라디오 회로 기술 문제를 두고 소송을 벌여 패했었거든요.
40대의 팔팔하던 시절의 패배는 특유의 외곬수와 또 다른 능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지만 나이 예순을 넘긴 그에게 무일푼으로 남은 통장과 평생의 업적의 소멸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을 겁니다. 그는 1954년 1월 31일 자신의 뉴욕 아파트 13층에서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은 후 투신자살합니다. 아파트 저층의 돌출부에 떨어진 그의 시신은 며칠 동안이나 그곳에 방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RCA와 각을 세운 것은 암스트롱의 부인 매리언이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는 RCA 회장의 비서 출신이었습니다. 일체의 타협을 거부했던 남편과 달리 그녀는 강경과 타협의 양면작전을 구사하며 특허권 소송에서 승리를 거두고 배상금을 받아내 남편의 한을 푸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암스트롱이 인류에 선물한 FM 방식은 AM 라디오를 압도하는 라디오 송출 방식이 되어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게 됩니다.
가끔 신문지상에서 우리는 조금은 엉뚱한 하지만 결코 우습지 않은 전면 광고를 보곤 합니다. 회사 이름도 낯선 작은 중소기업의 사장이나 연구자가 신문의 전면을 사서 울부짖듯 써내려간 호소문이죠. 자신이 피땀 흘려 일궈낸 성과를 모모 대기업이 어떤 식으로 가로채 가고 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음을 국민 여러분에게, 대통령 각하에게, 공무원 여러분에게 절규하는 기사를 보신 기억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개인의 피땀 흘린 노력 따위를 이윤이라는 마차 앞의 사마귀보다도 못하게 취급했던 역사는 우리도 못지 않으니까요. 아니, 오히려 더 잔인하고 더 냉혹했음을 익히 아니까요. 그래도 암스트롱의 가족은 소송에서도 이겼고 암스트롱의 이름은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갑니다만, 한국에서는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