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 족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아는 바가 없지만 그들의 민요 하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기차게 불렀고 5천만 인구 중 최소 3천5백만은 그 노래를 부를 줄 알거나 최소한 들어 봤다.
‘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건너서…..’
하는 <연가>가 바로 마오리족의 민요이기 때문이다, 이 민요가 한국에 전해져 국민가요처럼 불리우게 된 연원은 6.25에 있다. 6.25에 참전했던 뉴질랜드군 중에 마오리족이 끼어 있었고 그들이 흥얼거리던 노래가 널리 퍼진 것이다.
대개 백인들과 마주한 신대륙, 또는 각지의 섬들의 원주민들은 대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수천만 인디언을 필두로 서세동점의 시기 헤아릴 수 없는 원주민들이 조직적인 학살과 처음 접하는 병균의 습격에 쓰러져 갔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아보리진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는 조금 달랐다. 뉴질랜드에는 마오리 족이 있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전투적인 종족이었다. 그들의 촌락 자체가 요새같이 세워졌고 그 부족간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서로를 잡아먹기도 했다. 한 전쟁이 끝나면 전쟁에 패한 부족의 하층민은 노예가 됐지만 상층 귀족은 승전 귀족들의 식사꺼리가 됐다. 그래야 그들의 기운이라고 할까 힘이라고 할까 그런 걸 섭취할 수 있다고 봤다.
마오리족 전통 댄스의 숨겨진 비밀
그렇게 잡아먹고 잡아먹히다가 일종의 유화책(?)으로 나온 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용맹스런 몸짓과 표정을 하면서 요가의 사자후처럼 혀를 쩍 내밀고 상대를 위압하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는 마오리 족 특유의 ‘댄스 배틀(하카)’이었다.
가끔 뉴질랜드 축구나 럭비팀의 백인들이 그 몸짓을 하면서 용기를 과시하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마오리족들에게는 살벌한 전투의 전초였다. 그걸로 승부가 안나면 피를 보는 것에 끝나지 않고 누군가의 허벅지를 뜯거나 뜯겨야 했으니까.
이 용맹성은 백인들이 온 다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 쇠”에 등장하는 마오리족은 백인들의 전투 방식을 놀랍게도 빨리 응용하고 있다.
그들은 소총을 얻게 되자 바로 부족간 대학살에 가까운 전쟁을 벌였고 백인들의 배를 얻어 타고는 동쪽으로 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채텀 제도의 모리오리족을 공격해서 싹쓸이를 한다. 모리오리족은 거의 죽거나 잡아먹힌다.
이렇듯 싸움에 관한한 마오리족은 그 방면에 탁월한 백인들도 아연실색케 할 정도였다. 백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해 온 원주민 몰살 방식은 뉴질랜드에서는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프랑스 세력이 뉴질랜드 근처에 출몰하고 세력을 뻗쳐 오자 영국은 마오리족과 협상을 통해 뉴질랜드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고 마오리족 일부도 이에 호응한다.
1840년 2월 6일, 와이탕기 조약 서명
그 결과 맺어진 것이 1840년 2월 6일에 맺어진 와이탕기 조약이었다. 43인의 추장이 서명했고 내륙을 돌아다니면서 참여하지 않은 추장 500 여 명의 동의도 받아냈다. 물론 일부는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오늘날 뉴질랜드의 건국문서럼 치부되는 이 와이탕기 조약은 사실은 간단했다.
첫째 마오리족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영국 여왕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영국 여왕은 마오리족의 토지에 대한 독점 매입권을 가지며 마오리족의 소유물을 보호하며, 이 조약에 서명한 마오리족은 영국 백성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그 골자이자 거의 전부였지만 이 조약은 당연히 순탄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백인들의 땅 욕심은 끝이 없었고 마오리족의 소유를 보호한다는 약속은 공허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나오는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가 추장과 총독의 대결.
마오리 땅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추장 한 명이 영국 국기를 내려 찢어 버린다. 영국은 지지 않고 다시 깃발을 휘날렸고 추장은 또 깃대를 꺾어 국기를 땅에 내동댕이친다. 이렇게 네 번이 반복되자 총독이 분노한다.
“100파운드를 줄 테니 저놈의 목을 가져와라.”
그러자 추장도 선언한다.
“100파운드를 줄테니 총독의 목을 가져와라,”
100파운드를 받자고 총독이나 추장의 목을 노릴 대담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유야무야되긴 했지만 이런 대결은 결국 마오리 전쟁을 유발시킨다. 10년이 넘는 전쟁 동안 영국군 정예 수만 명이 남방의 원주민을 상대로 혈투를 벌인다. 마오리족은 용맹했고 영국군은 때로 곤죽이 되도록 참패하기도 했지만 마오리족이 무력에서 대영제국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마오리족은 수십만이 죽고 단 4만명만 남았다.
하지만 와이탕기 조약의 의미는 적지 않았다. 영어와 마오리 어로 번역돼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승인된 이 조약은 비록 퇴색했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오리족의 권리를 인정한 와이탕기 조약은 130년 뒤 와이탕기 법정으로 되살아났다.
뉴질랜드 정부는 와이탕기 분쟁재판소를 설립하였으며, 이 법정에서 마오리 부족들의 옛 권리에 대해 금전적 보상이나 토지의 반환을 판시한 판결들이 잇달아 내려졌던 것이다. 심지어 1984년 노동당 정부는 마오리족들의 국가 상대 청구 소송 시한을 1840년대까지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는 서양 세력에 의해 스러져간 곳곳의 역사, 백인이 주도권을 잡은 나라에서는 별로 찾아 보기 힘든 예다. 물론 대부분의 마오리족이 2등국민 취급을 받으며 사회적 고립 상태에 처한 것도 사실이지만. 역사상 식민지 본국과 토착민들의 합의로 일구어내고 한 나라의 근간을 이룬 것은 와이탕기 조약이 유일하다. 그 문서가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남을 만큼.
그 역사를 생각하면서 흥얼거려 본다. 비바림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그대만을 기다리리…..
원문 :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