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2월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도 설날이 찾아들었다. 전란 중이었지만 그래도 설은 설이라 차례도 지내고 식구들끼리 모여 막걸리라도 추렴해서 들이키며 명절 분위기를 냈을 것이다.
아이들은 때때옷 아니면 깨끗한 옷이라도 차려입고 동네마다 세배 다니며 ‘새해 복 마이 받으이소’를 합창했을 것이며, 어른들은 “전쟁이 언제나 끝나려나” 하면서 북쪽 하늘을 쳐다보았으리라. 정초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을 정월 초사흘, 양력으로 하면 2월 9일 마을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죽음의 사자들이 발맞춰 신원면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죽음의 사자는 외국 군대도 아니고 나라의 적 빨치산도 아닌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육군 11사단 13연대 3대대. 지휘관은 사단장 최덕신, 연대장 오익경, 대대장 최동석. 정월 초하루에 이미 신원에 들어왔던 11사단 13연대 병력은 적정을 찾지 못하고 일부 병력을 남긴 채 산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남부군이 신원면에 공격을 가하여 면사무소와 경찰 지서를 불태워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바짝 열받은 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3대대장 최동석 중령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린다.
명령은 세 가지였다.
“공비 근거지가 될 가옥 소각.”
“식량 확보 및 불가능시 소각.”
그리고 또 하나의 건조한 한 마디.
“작전 지역 내 인원 전원 사살.”
즉 ‘견벽청야(堅壁淸野)’ 명령이었다. 일찍이 일본군들이 의병 토벌할 때 사용했고 간도 특설대도 즐겨 써먹었던 작전 , 쉽게 말하면 ‘작전 지역 내 싹쓸이’였다.
사단장 최덕신은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최동오가 납북된 후 출세길이 막혔다고 생각했고, 군공을 세우리라는 강박감을 가졌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한 그가 휘하 연대장들을 다그치고 연대장에게 조인트를 까인 대대장들은 중대장들을 혼쭐내고 중대장들은 휘하 병력들을 닦달하는 가운데 복수심 불타는 3대대는 독이 잔뜩 오른 채 신원면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2월 9일 덕산리에서 남녀노소를 망라한 80여 명의 민간인을 총살함으로써 3일간의 거창양민학살의 끔찍한 서막이 올랐다.
1951년 2월 10일. 3대대는 이미 피맛을 본 야수와 같았다. 그들은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들을 소집하여 신원국민학교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노약자들이 다수였던 행렬이 지지부진하자 뒤처지는 마을 주민들을 끌어모아 탄량골이라는 골짜기로 끌려간다. 100여 명의 양민들, 그 가운데에서도 군인들의 “빨리 빨리 움직여”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약자들과 부녀자들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군은 골짜기로 몰아넣은 그들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겨눈다.
“군경 가족 있으면 나와.”
동앗줄이라도 잡은 듯이 몇 명이 뛰쳐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빈틈없는 총구로 메워졌다.
“사격준비!”
골짜기에서 울부짖던 100여명 가운데 단 하나가 살아남았다. 임분임이라는 1908년생 아주머니였다. 그녀에 따르면 군인들이 빙 둘러서서 총을 겨눴을 때 어떤 남자가 손을 들고 외쳤다고 한다.
“대장님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 한 마디 하고 죽읍시다.”
죽음을 예감한 이의 절망적인 외침이었으리라. 순간 총살 신호를 내리려던 장교의 손도 멈칫했고 애끓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십니꺼!”
그러나 그 피를 토하는 질문은 사격 신호와도 같았다. 너희 따위 백성은 필요 없다는 듯, 너희 따위는 없어지는 게 나라에 이롭다는 듯 엠원 소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군경가족이 아니면 다 통비분자라는 어처구니없는 분류에 의해 ‘전원 총살’의 대상이 된 주민들은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땅에 나뒹굴었고 군인들은 조명탄까지 터뜨려가면서 확인사살을 했다.
그리고는 나뭇단을 잔뜩 가져다 놓고 몇 시간 전만 해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 주고받으며 웃음 지었을 육신들을 깡그리 불살라 버렸다. 다음날인 2월 11일에는 517명의 생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대한민국 국군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지만 이승만은
“부끄러운 치마폭은 외부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라면서 사건을 덮고자 했다. 학살의 책임자들 가운데 최덕신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명령을 내린 연대장 이하 모두를 형집행정지로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진상 조사를 위해 거창을 찾은 국회 조사단에게 총질을 했던 김종원은 되레 경찰 간부로 특채를 한다. 그리고 사건의 최고 책임자라 할 국방장관 신성모는 주일 공사라는 최고의 땡보직으로 옮겨 버린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이었다. 높은 사람들 눈에 백성이란 안 되긴 했지만 작전상 죽어 줘야 할 지푸라기들에 불과했고, 수백 명 정도는 적성분자로 몰아 죽여 없애서 본보기로 삼아도 아무 아플 것이 없는 나무토막들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백성 민(民)이란 국호의 일부로만 존재할 뿐 누구의 염두에도 없던 나라의 실상이었다. 1950년 2월 10일 탄량골 어딘가에서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외치다가 총알에 몸을 뚫려버린 사람의 이름은 누구일까. 그 외침이 귀에 쟁쟁한 날, 함석헌 선생의 글이 맘을 울려 옮겨 놓는다.
“쓰다가 말고 붓을 놓고 눈물을 닦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눈물을 닦으면서도 그래도 또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역사, 써놓고 나면 찢어버리고 싶어 못 견디는 이 역사, 찢었다가 그래도 또 모아대고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이 역사, 이것이 역사냐? 나라냐? 그렇다. 네 나라며 내 나라요 네 역사며 내 역사니라.”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