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그 후, 탈북자가 나타나다
1990년대는 사실상 ‘혁명 그 후’의 시기였다. 1990년이 밝아오기 직전, 1989년 동구권 각국은 탈공산화 해일에 휩쓸렸다. 폴란드가 다당제를 선택했고 헝가리가 ‘철의 장막’을 스스로 걷어치웠으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한때 반파쇼 투쟁의 영웅이었던 루마니아의 지도자 차우셰스쿠는 민중 봉기를 피해 도피하던 중 혁명군에 사로잡혀 무려 100발이 넘는 총탄을 맞고 벌집이 된 채 죽어갔다. 그리고 1990년 한때 사회주의권의 선진국으로 한국처럼 분단국가의 한쪽이었던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1991년에는 한때 “피압박 민족과 착취받는 노동 계급”의 별 같은 희망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그 낫과 망치를 역사의 장막 뒤로 던지고 퇴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 정부와 반공 사상이 충만한 국민들 때문에, 사실상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졌으면서도 ‘좌경용공 매도 말라’는 항변을 하기 일쑤이던 한국의 진보 세력 사이에서 “본인은 사회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는 인간의 건전한 상식이 선택하는 자랑스런 칭호입니다”(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 관련자 윤철호씨의 법정 최후진술)라는 커밍아웃이 터져 나왔던 것이 1990년이었다는 사실은 묘하게 슬프다. 윤철호씨는 루마니아 검사가 “인간의 존엄과 사회주의의 제 원리를 위반한 차우셰스쿠”를 탄핵했음을 들면서 사회주의와 인간의 존엄은 동격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사회주의 인민들은 그 순간에도 그들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려고 열렬히 애쓰고 있었으니 이 어찌 공교롭지 아니한가.
동구권의 몰락 이후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북한이었다. 1990년대는 북한이라는 금단의 반쪽이 싫든 좋든 가까이 다가왔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야 북한은 책에서나 접하는 신비의 세계였고 라디오를 듣다 보면 어쩌다 튀어나오는 불청객 같은 나라였을 뿐이었지만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게 됐고 ‘남침야욕’을 제외하고도 북한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절감하게 됐던 시기였다는 뜻이다. 그것은 비단 내 개인적인 경험만은 아니었으리라.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는 ‘펠라그라’라는 병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북한 국민들이 영양실조로 걸리는 병으로 주로 단백질 부족으로 발생하는 병이라고 배웠고 교과서에 따르면 북한은 그야말로 가뭄 든 아프리카에 맞먹는 기아의 지옥으로 교육받았다. 하지만 이 편견은 대학에 입학한 뒤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북한이 한국보다 나았다”는 위험한 진실을 접하면서 깨졌고, 적어도 북한이 남한보다는 훨씬 못해도 괴물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로 여기게 됐었다. 그런데 북한에 진짜 ‘펠라그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뉴스가 등장한 것이다.
“수백만명의 북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최소 수십만명은 굶어 죽었다.” 북한에 호의적인 이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자들의 모략선전일 뿐이라고 핏대를 세웠다(심지어 최근까지도 북한의 기아가 그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내 눈으로 보았다). 나 역시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에게 밀어닥친 재앙에 가까운 굶주림을 선뜻 믿지 못했다. 북한의 참상이 생생히 알려지고 북한 자신이 세계에 도움을 청하는 지경에 이르고서야 현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짐짓 외면하거나 애써 부인하기 어려울 만큼 북한의 참상은 끔찍했다.
그즈음 북한의 형편이 악화 일로에 있음을 입증하는 신조어가 있었으니 ‘탈북자’라는 단어였다. 검색해 보면 이 단어는 1994년 이후에야 간간이 등장하는데 기아에 시달리다 못해, 아니면 정치적 압박에 직면하여 북한을 탈출한 이들이 본격적으로 우리 옆에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가뭄에 콩 같았던 그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비 온 뒤 죽순처럼 많아졌고 급기야 나와도 마주치게 됐다.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살아간다는 것
처음으로 만난 탈북자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김일성 주석과 먼 친척이라는 특권층 출신이었기에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특명 아빠의 도전>의 출연자로 만났다. <특명 아빠의 도전>은 아빠들에게 어떤 과제를 주고 1주일 동안 맹렬히 연습하여, 가족의 소원 상품 타기 도전에 나서는 프로그램이었다. 북한에 처자를 두고 탈북한 처지였으나 남한에 와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그 가족의 ‘특명 아빠’가 된 것이었다. 촬영 나가기 전 작가가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북한 아빠의 특성을 잘 살려 주세요.”
작가는 어눌하고 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순정남 같은 ‘북한 아빠’를 구성안에 써 놨지만 우리의 특명 아빠는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다. 애초 북한에서나 남한에서나 받을 대접은 웬만큼 다 받았고 산전수전 겪은 노회함으로 이미 ‘방송을 알아서’ 본인이 판단할 때 꼭 필요한 연출 아니면 절대 응해 주지 않던 깐깐한 출연자였던 것이다. 그때 몇 차례 퇴짜를 맞으면서도 이것만은 해 달라고 아금바금 요청한 게 가족과의 통일전망대 방문이었다.
“거기는 와 가는데? 볼 게 뭐가 있다고.” “하여간 가 주세요. 사모님 모시고.” 이런 입씨름을 수십번 거친 뒤에야 나는 힘겹게 그 가족들을 통일전망대에 모시고 갈 수 있었다. 그분은 계속 투덜거렸다. “볼 게 뭐이 있다고.” 통일전망대에 가면 좀 감정이 풀리고 북한 땅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나는 후회막심 실망백배였다. 그런데 방송 녹화 당일은 달랐다. VCR 속 통일전망대에 선 자신을 보면서 아저씨 마음이 점차 젖어드는 걸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에 북한 풍광이 담길 때 비록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울컥하는 표정, 그리고 끝내 손가락을 눈가로 가져가는 모습이 담기는 순간까지도. 녹화가 끝난 뒤 그는 내게 이렇게 푸념을 했다. “왜 저길 데려가 가지고…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얼마 전 나는 그를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다시 접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소련이 해체되는 걸 보고 기절초풍을 했고 (북한도 한국과 미국이 점령하리라는 걱정 속에) 가족이라도 살리겠다고 먼저 탈북을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후의 말에 스튜디오에서는 폭소가 나왔지만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북한이 오래갈 줄 알았으면 안 나왔을 겁니다.” 그 역시 1990년 이후 세계를 뒤흔든 태풍에 휘말려 버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평생을 믿어온 삶의 방식이 흔들려 버린 사람의 서글픈 결단이랄까.
그는 최근의 그 방송 중에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는 말을 해서 스튜디오를 술렁이게 했었다.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남한에는 아무도 없다. 기쁠 때 슬플 때 이야기를 나눌 아무도 없었다”고 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15년도 전 그가 가장 열을 내며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997년 이한영 피살 사건이었다. 북한 최고위층의 가족이었던 이한영은 남한에서 망명자로 살다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총격에 피살됐다.
“이건 남북이 같이 죽인 거야. 북한이야 죽이고 싶었고 남한은 귀찮아서 눈감아 주고. 안 그러면 증거 다 있는데 왜 잡을 생각을 안 하는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 처지가 좀 그래. 결국 북한에서는 반역자 되고 남에서도 국민 대접 못 받는구나 싶어서.”
‘이 땅에서 우리는 이것도 못 하는가’
그 이후 나는 심심찮게 ‘북한 이탈 주민’들을 만났다. 북한의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황보영씨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이후 한국 대표팀으로 국제 경기에 출전했다가 북한 선수들에게 반역자 소리를 듣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고 했다. 그때 그녀를 인터뷰하던 중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질문하는 거요. 북한은 정말 굶어 죽냐. 정말 이러이러하냐 다 아는 걸 묻고 또 물어요. 아는 걸 왜 묻는지 모르겠어요.”
그로부터 몇 년 뒤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맡게 됐던 나는 색다른 제보를 받게 된다. 탈북자가 업주로 북한 출신의 여성들을 고용해서 ‘남성 편의 시설’ 즉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몇 번 보도가 된 바 있으나 당시로서는 통일부 관계자를 만났을 때 “이런 사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토로를 들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현장에 잠입했을 때 그곳에는 실제로 탈북 여성들이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나는 앞서 얘기한 황보영씨가 그렇게 싫어하던 질문을 또 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많이 굶어 죽었나요?” 그때 들은 이야기를 나는 지금도 끔찍하게 기억한다.
한동안 탈북 여성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처해져서 그냥 궁금해서 여쭤 본 거라고 얼버무리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려는데 그녀는 내게 찌르듯 질문을 해 왔다.
“선생님. 사람이 굶어 죽을 때 어떻게 죽는 줄 아십니까?”
함경도 억양이 그렇게 건조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급작스런 반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아침에 잠을 깨서는 누워서 동생하고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어드메 가서 뭘 먹을까. 어찌 구할까. 그렇게 아이가 웃기도 하고 얘기도 하다가 갑자기 말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 말이 없니 하면서 일어나서 보면… 애 얼굴 위로 파리가 왱왱 돌아다닙니다. 기러문 죽은 겁니다. 내 형제 다섯 중에 셋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눈앞이 아득했다. 마치 영화 <쉬리>에 등장하는 북한군 중좌 박무영(최민식 분)이 영화에서 내지른 일갈을 받는 느낌.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에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헤쳐 먹고 있어!” 여기에 내가 만난 그녀들은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아홉 나라 국경을 목숨 걸고 넘어 한국에 와서는 이렇게 서울의 밑바닥을 쓸고 있어. 궁금하나? 뭐가 그렇게 궁금하나? 알고는 있는 거가? 모르는 체하는 거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경찰과 함께 그들의 ‘업소’를 단속했을 때 그녀들은 덫에 걸린 호랑이들처럼 울부짖으며 경찰과 취재진에게 저항했다. “부모 형제 가운데 다섯이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조국의 반역자가 되어”, “일곱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국에 온 그녀들의 절규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선배 PD는 “이것이 불법인지는 아느냐?”고 냉철하게 물었지만, “피디 양반, 나랑 같이 강남에 가자. 그 번쩍거리는 룸살롱들 들어가서 여기는 불법입니다 외치면 내 당신 인정해 줄게” 하는 그녀들의 반박에 더 귀가 쏠렸던 탓이다. 그녀들은 울부짖었다.
“우리는 이것도 못하는가.”
그녀들의 등을 떠밀어 벼랑으로 내몬 것은 누구이고, 그녀들을 두고 정신이 썩었다고 말할 만한 용사는 누구일까.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유익하기라도 한 일인지, 또 방송을 한다는 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지 등등 머리가 터질 듯한 시간을 보냈다. 결국 이런저런 사정으로 방송은 나가지 못했다. 완성된 디지털 비디오테이프는 꽤 오래 내 책상 서랍 속에 보관돼 있었지만 이사를 다니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쓰레기장에 가지 않았다면 다른 용도로 재생됐을 것이다.
이건 업이다,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이렇게 이래저래 수십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건 업이다. 우리 조상들이 멍청해서 남북이 갈렸고 그들이 전쟁까지 치르고 갈라진 업을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거다. 우리가 지금 이들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 아들들이 손자들이 이 업을 물려받게 될 거다.”
1990년대는 그 ‘업’의 무게가 우리 어깨에 드리워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직후 마주쳤던 탈북자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작년에는 참 겁났습니다. 서해 교전(1999년 6월 일어났던 전쟁 후 최초의 군함끼리의 ‘정규전’) 때는 정말 이러다 무슨 일이 나는 거 아닌가 싶고. 우리야 옷 한 벌 입고서 하늘에서 툭 떨어진 고아 같은 사람들 아닙니까. 아무도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통령이 평양에 방문한 오늘은 좋습니다.”
그즈음 탈북자 수는 1000명 규모였다. 지금은 2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을 놓고 볼 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변한 것은 더 무거워진 업의 무게 뿐이다.
출처: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