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소식지 <산재없는 그날까지>에 기고됐습니다.
‘받아쓰기.’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이 정확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을 익히기 위해 선생님이 불러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학습방법이다. 말의 내용에 대한 의심은 필요 없다. 그저 잘 받아쓰기만 하면 100점을 얻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론보도가 그랬다. 그러나 결과는 빵점이었다. 언론 역사상 길이 남을 대형 오보가 쏟아졌다. 300여 명의 원통한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참사의 첫 오보는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였다. 경기도교육청과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한 결과였다. 한국 언론의 참사였다.
문제는 이런 ‘받아쓰기 오보’가 세월호 참사에서 어쩌다 생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처럼 만천하에 밝혀진 대형 오보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는 ‘받아쓰기 오보’는 한국 언론에서 그냥 비일비재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보니 사실(fact)을 보도한 기자가 오히려 이상한 놈 취급을 받는 일도 생긴다.
1. ‘받아쓰기’는 권력에 굴복해온 비겁한 역사에서 비롯
1991년 10월 10일이었다. 당시 진주시 하대동에 있던 진주전문대에서 생긴 일이다. ‘운동권’ 후보와 ‘비운동권’ 후보가 맞붙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 쪽의 천재동(당시 24세) 후보가 200여 표 차이로 당선됐다.
사건은 개표가 마무리되기 직전 발생했다. 사건을 감지하고 기자가 진주전문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30~40여명의 경상대 학생들이 C동 101호 강의실에서 꿇어 않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강의실 바깥에는 수많은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몰려와 있었고, 강의실 안에서는 각목을 든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비운동권 후보 측)이 기세등등한 자세로 꿇어앉은 경상대생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고개를 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 경우 거침없이 발길질과 각목세례가 가해졌다.
이런 와중에 누가 연락을 했는지 후문 담장 바깥엔 경찰의 ‘닭장차’가 도착했다. 이 학교 교수· 학생들과 경찰이 모종의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강의실에 ‘감금’당해있던 경상대 학생들이 예의 각목을 든 청년들의 감시를 받으며 머리에 양손을 올린 채 ‘오리걸음’으로 줄줄이 끌려 나왔다. 이렇게 끌려나온 경상대생들은 후문 담장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의 ‘닭장차’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이렇게 연행된 학생은 33명이었다.
상황이 종료된 후 기자는 처음부터 현장을 목격한 학생들을 상대로 취재를 시작했다.
선거 하루 전인 9일 진주전문대 선거유세 과정에서 양측 후보 지지자들 간에 욕설과 폭언 등 다툼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당시 진주·충무지역총학생회협의회(진충총협·의장 이일균 경상대총학생회장)에 접수됐다. 그 이전에도 주로 여학생들로 구성된 운동권 측 선거운동원들이 상대측 운동원(남학생)들로부터 “강간을 해버리겠다” “너희가 선거에 이기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공공연한 협박으로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튿날인 10일 오전 진충총협은 이 학교 선거개표 후 폭력사태가 예상된다며 급히 경상대에서 사수대를 모집, 33명을 진주전문대에 파견했다. 이들 경상대생들은 이날 오후 3시 30분께 진주전문대에 도착, 개표장과 떨어진 강의실에서 이 학교 학보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4시께 운동권 측 천재동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될 무렵, 갑자기 강의실 유리창이 깨지면서 앞문과 뒷문으로 15명가량의 진주전문대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위협을 느낀 경상대생 중 한 명이 비닐봉지에 싼 최루가루를 뿌렸고, 몇몇 학생이 강의실 밖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바깥에 있던 수많은 진주전문대생에게 포위당해 이들 역시 제대로 저항도 못해본 채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경상대생들은 천막가방 속에 넣어 간 쇠파이프를 미처 꺼낼 사이도 없이 모두 빼앗겼으며, 각목과 책상, 빼앗긴 쇠파이프 등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완전히 제압당한 경상대생들은 강의실에 꿇어앉은 채 진주전문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이 학교에 들어온 경위 등에 대한 진술서를 썼다. 이 진술서와 쇠파이프· 최루탄 등은 모두 ‘증거품’으로 경찰에 인수인계됐다.
2. 경찰 불러주는대로 ‘받아쓰기’한 한국의 모든 언론
이처럼 사실(fact)관계만 놓고 본다면 경상대생 33명이 다수의 진주전문대생들로부터(집단폭행), 강의실에 감금당한 채(감금폭행),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특수폭행) 일방적인 폭행을 당한 사건이다. 즉 피해자는 33명의 경상대생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운동권’이라는 것, 남의 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피해자라는 사실이 바뀌진 않는다. 다만 쇠파이프(사용해보지도 못했지만)를 천막용 가방에 넣어 갔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쌍방폭행’ 정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피·가해자를 바꿔치기하여 경상대생 19명을 폭력 혐의로 구속했다. ‘타 학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쓰기’ 시작한 언론이었다. 어떤 언론도 ‘사실 확인’은 커녕 ‘취재’도 하지 않았다. 1991년 10월 1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를 보자.
“10일 오후 5시반경 진주시 하대동 진주전문대 201호 강의실에서 진행된 이 학교 총학생회장 선거 개표장에 경상대 써클인 지리산결사대 소속 유형민 군(19·경상대 무역과 1년) 등 대학생 33명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갖고 들어가 20여 분 동안 난동을 부렸다.
경상대생들은 진주전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인 천재동군(19·전자계산과 1년)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실 유리창 2장을 깨고 들어가 최루탄 1발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 기사는 짧은 2개의 문장 대부분이 오보로 구성돼 있다. 사실보도의 구성요소를 6하원칙이라고 할 때 이중 사실과 부합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언제(when)에 해당하는 ‘오후 5시반경’이 틀렸다. 학생들 간에 충돌이 일어난 시간은 오후 4시께였다. 또 어디서(where)에 해당하는 장소도 틀렸다. 경상대생들은 개표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개표장과 다른 101호 강의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who)에 해당하는 난동과 폭력을 주체도 오히려 뒤바뀌었다.
무엇을(what), 어떻게(how)에 해당하는 행위도 잘못된 것이다. 주체가 바뀌었으니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터뜨리고 쇠파이프를 휘두른 행위도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다.
이유를 설명하는 왜(why)도 마찬가지다. 기사는 ‘운동권후보의 낙선이 예상되자 선거무효를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실상은 그 반대였다. 심지어 천재동 후보의 나이도 안맞다. 그는 1학년이었으나 늦깎이 입학으로 실제 나이는 24세였다.
이처럼 사실관계에서부터 오보 투성이인 기사가 당시 모든 언론에 그대로 보도됐다. 조선·동아·중앙 등 전국일간지의 경우 취재기자가 진주에 없어 일방적인 경찰 발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나 현지에 많은 취재기자를 두고 있는 지역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경남일보> <경남신문> <경남매일> 등 3개 지역일간지도 모두 경찰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언론노보> 10월 21일자는 이렇게 폭로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14일. 이날 진주경찰서는 ‘지리산결사대’ 관련 보도자료를 진주 및 경남도경 기자실에 보냈다. 첫 보도 때 이미 단추를 잘못 끼운 연합통신 진주주재기자가 또다시 확인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해 본사로 송고했다.(…중략…) 이날 오후부터 서울에 있는 지방담당데스크들이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연합통신 기사를 서비스 받은 이들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왜 안 보냈느냐’는 투의 전화를 해당지역에 했다. 이에 따라 경남주재 중앙지 기자들은 별다른 확인과정 없이 경찰 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첫 보도 겸 ‘결사대’ 속보를 작성해 본사로 송고했다.”
이에 따라 전국일간지와 양 방송사 등은 ‘폭력투쟁 앞세운 운동권 전위 / 경찰이 밝힌 ‘지리산결사대’ 정체’ ‘극렬·소수화 운동권의 전위대 / 경상대 ‘지리산결사대’의 정체’ 등 특집 해설기사 등을 일제히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언론의 앵무새 같은 보도에 힘입어 경찰과 검찰, 그리고 법원은 이들 경상대생 18명에게 대부분 폭력혐의를 인정, 유죄선고를 내렸다. 물론 진주전문대 학생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던 경상대생들은 10년 후인 2001년 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게 ‘빨치산과 일본 적군파를 모방한 극렬운동권의 소수 전위부대’라는 딱지를 선사했던 언론은 사과하지 않았다.
3. 기자는 ‘묻고 확인’하는 직업인데..
이뿐일까? 아니다. 79년 부마항쟁, 80년 광주항쟁, 87년 6월항쟁 때도 그랬다. 항쟁이 승리하면 슬그머니 논조를 바꾸지만, 진압되면 그냥 쌩까고 넘어가는 게 언론이다.
진주의료원 폐업, 밀양송전탑 사태에서도 이런 언론의 ‘발표저널리즘’ ‘받아쓰기 보도’는 이어지고 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진주의료원 노조를 ‘강성 귀족노조’라 매도하면서 “1999년에는 노조가 원장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거짓말을 반복했다. 언론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기’했다. 우리가 당시 기록과 취재노트를 바탕으로 확인해보니 오히려 원장이 주먹을 휘둘러 간호사 노조원들을 폭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처럼 누군가의 발표, 누군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건 언론이 아니다. 기자가 아니라 한글을 아는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름 많이 배웠다는 기자들이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까? 정말 바보여서 그런 걸까?
내가 보기엔 앞의 사례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력에 굴복하고 순치되어온 비겁한 한국 언론의 역사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국 언론인 이지 스톤의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자라면 ‘저 말이 과연 사실일까’라는 의심에서부터 취재를 시작해야 한다. 경기도교육청이, 안전행정부가 ‘단원고 학생 전원구조’를 발표했을 때, 기자라면 응당 ‘어떻게 구조했는지, 구조된 학생들은 어디 있는지’를 묻고 확인했어야 했다.
원문 출처 : 김주완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