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대 가전쇼인 라스베가스 CES에 다녀왔다. 2년만에 다시 방문했는데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커지는 규모, 여전한 인파, 엄청난 참가업체수에 정신이 없었다. 이틀동안 주마간산으로 대충 살펴봤다. 그리고 든 생각과 찍은 사진 몇장을 간단히 메모해서 공유.
2년전의 CES와 비교해서 비슷한 점은 대기업들의 부스였다. 삼성, LG, 소니, 퀄컴, 인텔 등 주요업체들의 부스는 2년전과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크기였다. 세부 전시내용은 달랐지만 전체적인 부스디자인은 예년과 비슷한 경우도 많았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자회사인 애플이나 요즘 한창 뜨는 샤오미가 참가하지 않은 CES에서 여전히 가장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회사는 삼성전자였다. 윤부근사장의 키노트발표는 미국언론의 CES 개막기사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하지만 주로 대기업관이 있는 센트럴홀과 노스홀은 지루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불만이 없을 정도로 요즘 TV는 이미 충분히 화질이 좋다. 그런데 TV업체들은 4K다 8K다 SUHD다 퍼펙트블랙이다 퀀텀닷이다 온갖 마케팅용어를 가져다
대며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별 의미없이 공허했다. 혹자는 부스에 정신없이 장식된 대형TV스크린들을 보고 “하이마트에 온 것 같다”고 평했다. 포드, 아우디, 현대자동차 등이 나온 자동차관도 솔직히 2년전과 비교해 그다지 색다른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반면 다양한 웨어러블, 사물인터넷(IoT), 스마트홈관련 스타트업이 나온 테크웨스트관(샌즈엑스포)와 수많은 작은 전자업체들이 나와 드론 등이 전시된 사우스홀은 달랐다. 이곳에서는 스타트업과 작은 중국중소업체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휠씬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다. 많은 참관객들이 대기업관보다 스타트업과 작은 기업들이 모여있는 이곳에서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혁신은 이쪽에서 나오고 있구나”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끈 것은 중국의 부상이었다. 특히 심천(Shenzhen)의 부상이었다.
구글을 다니다 나와서 50여 스타트업에 엔젤투자를 한 미국친구와 CES에서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 “심천이 대단하다”는 말을 서로 했다. 아니 얼마나 많은 중국회사들이 CES에 온 것이냐며 놀랐다는 얘기다. ‘Shenzhen’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중국회사를 수십개는 본 것 같다는 얘기를 하자 그 친구가 말했다. “CES공식디렉토리를 보면 Shenzhen회사가 4페이지를 차지한다.” 찾아보니 정말 그랬다.
그밖에 심천인근지역인 동관, 항조우, 광조우 등지에서 온 업체들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휴대폰배터리나 케이스, 주변기기 등을 들고 나온 이들은 다 비슷비슷해보이고 촌티나는 부스를 열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비즈니스기회를 잡겠다는 열정 자체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지나쳐가려는 나를 불러세우고 제품을 열심히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많이 왔다면 분명히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어봤다. 정부나 시당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 있냐고. 단호하게 없다고 한다. 협의체를 구성해서 오기는 했지만 그런 것 없단다. 다 자기돈 들여서 왔다는 얘기다.
하이얼, 창홍, TCL, 하이센스 등의 중국대기업들이 큰 부스를 열어놓고 삼성, LG 못지 않는 대형TV를 전시하고 있다. 화웨이도 다양한 스마트폰모델을 내놓고 전시하고 있다. 중국세가 갈수록 CES를 압도한다는 생각을 했다. 전체 3천6백여 참가업체의 4분지1 쯤이 중국업체들인 것 같았다.
우리가 다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 일본전자회사들도 많이 나와있다. 샤프, 파나소닉, 소니 같은 전통의 전자회사들외에도 니콘, 캐논, 샤프, 카시오 등의 전자회사들과 자동차관쪽에는 자동차부품업체인 덴소, 자동차스테레오를 만드는 파이오니어, 켄우드 같은 회사들이 열심히 전시중이었다.
프랑스기업들이 은근히 많은 것도 눈길을 끌었다. 위딩스, 네타모 같은 흥미로운 IoT기기를 내는 이 분야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이 프랑스회사다. 드론으로 유명한 회사 Parrot도 프랑스회사였다. 이들이 내놓은 제품들은 CES에서 대기업제품들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스타트업들이 모여있는 ‘유레카파크’ 전시장에서는 이스라엘, 대만,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우크라이나 등 다양한 국가출신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프랑스가 66개팀이 참가해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를 압도했다.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CES에 공을 들인 것 같기도 하지만 상당히 유니크한 IoT기업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CES 전체에서 한국은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이외에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열심히 돌아다녔지만 내가 실제로 만난 한국중소업체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몇군데 더 있었지만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았던 것 같다.) 코트라에서 지원한 한국관이 있었다고 했는데 구석에 있어서 그런지 나는 만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을 보고 나는 우리 기업생태계의 신진대사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특히 전자업계의 경우 글로벌하게 알려진 몇몇 재벌 대기업이외에는 눈에 띄는 기업이 없다. 지난 몇 년간 전자업계의 패러다임이 헬스케어, 웨어러블, 드론, IoT 등을 중심으로 크게 바뀌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 이 분야에서 새로 주목받는 기업은 거의 없는 것이다.
예전에 주목받던 팬택도 지금 빈사상태고 아이리버는 SKT에 인수됐고 예전에 뜨던 휴대폰회사인 VK는 사라졌다. 국산스테레오를 만들던 인켈이나 맥슨전자, 텔슨전자 등 이런 전시회에 나올만한 중견기업들은 다 사라졌거나 존재감이 없다. 그 많은 삼성, LG 협력업체들도 생각보다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반면 수많은 작은 심천출신의 중국중소기업의 창업자들에게는 열정과 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나가던 나를 불러세워서 열심히 제품을 설명하는 모습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비즈니스를 만들어내겠다는 열의가 보였다. 이런 그들을 더이상 짝퉁이나 만드는 싸구려 회사라고 깔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 중에서 또 몇년뒤에 제 2의 샤오미가 나올 수도 있다.
얼마 전 읽은 조선일보 위클리비즈의 뉴욕대 폴 로머교수 인터뷰기사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다. 혁신경제의 지표는 새로운 기업의 진입률로 따져야 한다는 얘기다. 기업생태계의 신진대사가 활발해야 한다는 얘기다.
선도자로 가기 위해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합니까?
“경제 운용의 스타일이 변해야 합니다. 각 부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더 많은 경쟁이 일어날 수 있게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업들이 등장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겁니다. 기존 기업들을 보호한다면 새로운 기업이나 새로운 혁신이 발생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기업을 보호하기보다는 사람을 보호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기업에서 새로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기업을 보호하려다 보면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정책의 핵심은 성공을 어떻게 측정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저라면 혁신 정책의 성공 지표로 특허에 집중하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기업들의 진입률을 지표로 삼을 겁니다. 나아가 새로운 기업에 밀려 도태되는 기존 대기업의 개수를 성공의 신호로 생각할 겁니다.”
이번 CES를 보면서 지나치게 대기업위주로 형성되어 새로운 기업이 나와서 성공하기 어려운 한국경제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한국에 일고 있는 스타트업붐이 희망적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다. 틀을 깨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새로운 한국기업들이 많이 나오길 기원한다.
원문 : 에스티마의 인터넷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