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76년 11월 7일, Christian Century 에 기고된 글로 Christian Century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목사안수 문제 만큼 오늘날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큰 이슈도 없을 것이다. 한 세기 전 노예에 대한 이슈가 그러 했듯이 동성애자 목사안수 문제 또한 교단분열의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노예 문제와 마찬가지로 성서 해석을 둘러싼 논쟁들 역시 되풀이 되고 있다.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뭐라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를 적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소돔과 관련한 구약과 신약의 모든 진술들을 제거하는 데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돔 사람들의 죄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자를 강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들은 이성애자였으며 나그네들을 여성에게 하듯이 대하며 남성으로서 치욕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의도적으로 행해졌다(사사기 19–21[1]장의 경우가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소돔 사람들의 짐승 같은 강간 행위는 일반적인 동성 간의 사랑이 이치에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런 점에서, 신명기 23:17–18 [2]역시 성서의 동성애 비난 리스트에서 제거 되어야 한다.
이 구절은 풍요를 비는 가나안의 제의들이 유대 예배 의식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이성애적인 “번식(stud)”을 가리키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킹 제임스 성서는 부정확하게도 동성애자를 “소돔 사람” 으로 낙인찍었다.
몇몇 다른 구절들은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고린도전서 6:9[3]과 디모데전서 1:10[4]절의 경우 “passive”와 “active”가 나타내는 것 이 동성간 사랑을 나누는 동성애자 커플 인지 동성애자와 남성 이성애자 매춘부 인지 분명하지 않다.
요컨데 동성애에 대한 이슈가 동성애 그 자체에 관한 것인지, 난교와 성관계를 위해 사람을 고용한 것 인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백한 비난
앞서 언급한 구절들을 제거하면, 동성애에 대한 명백한 3가지 비난들이 남는다. 레위기 18:22는 그 원리를 말하고 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과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라니.”
다음으로(레위기 20:13) 처벌을 더한다 :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여기서 언급되는 행동이 “가증한 것”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근대 이전의 히브리적 사고에서 남자의 정액이란 생명을 발생시키는 모든 것을 품은 것 이었다. 그 당시에는 난자와 배란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여성의 몸은 아이를 품기위한 공간만을 제공한다고 추측 되었다.
따라서 생명을 만들어내지 않는 목적을 위한 질외사정 (창세기 38:1–11), 남성간의 성행위나 자위는 낙태 혹은 살인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여성간의 성행위와 자위는 진지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히브리 민족이 출산이라는 높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점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구 과밀로 인해 총체적 위기를 맞은 세계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가치들은 의문스러워 진다.
한 남성이 여성처럼 성적인 행위를 할때, 남성의 권위는 실추된다. 이는 이 남성 한사람에게 뿐 아니라 모든 남성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반면 여성끼리의 동성애 금지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없다. 이는 히브리 문화에서 가부장 제도는 매우 권위적이었고, 주도권이 남성에게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것에 더해서 이성애자들은 그들이 보기에 생소한 행위나 성향에 대해 보편적인 혐오증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여러 문화권에서 보여준 왼손잡이에 대한 혐오는 이와 맥을 같이한다)
어떤 논리적 근거든 성서 본문을 합리화 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동성애 하는 사람들은 처형되어야 한단 본문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구약 성서의 모든 말씀이 완전 무결하며 모순점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동성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형벌을 요구한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정당화 되는 경우가 있다.
‘호모 (faggots-동성애자들을 경멸해 부르는 말)’라 불리는 동성애자들을 모두 화형시켜버려야 한다고 하는 이것이 단적인 예이다. 재판 조차 없이 동성애자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동성애자 살인은 매년 이 나라에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세번째 본문은 로마서 1:26–27로 레위기 18장과 20장 같이 분명하게 동성애에 대해 비난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바울이 성적 지향성과 성적인 행동의 차이를 몰랐음은 분명하다. 성적 지향성이 선택인 경우는 거의 없다. 바울이 비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일반적인 성적 지향성을 버리거나 포기하거나 바꿈으로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이성애자들이다.
바울은 현대 심리학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이 아주 어릴 때 고정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 했다. 또한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그들이 가진 일반적인 성적 지향성을 버리고 포기하거나 바꾸는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성욕에 대해서 강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동성 간의 사랑 관계는 아니다. 바울은 추측하기를 성병은 동성간의 성 행위(모든 성적인 난교와 연관된 위험성으로서) 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성 간에 성 행위를 했다고 해서 바울이 추측하는 하나님의 처벌이 따라붙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난교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동성애를 본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구 과밀화의 압박 속에서 보다 넓은 차원에서 종의 다양성이 분명해 진다는 것을 동성애를 통해 배운다. 동성애는 종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의 메카니즘으로 나타난다.
다른 실천들
성서가 아주 분명하게 동성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진 않다. 그것에 대해 언급한 사례도 거의 없다. 동성애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단지 동성애가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또한 유대인의 삶에 침투하는 이교 문명의 침략이라는 반유대적 이해에 기반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으로는 오늘날 동성애에 대한 성서 해석학적 문제를 풀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성서적 기준에 근거한 태도와 실천, 제약 들도 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은 성서적 규범으로서 받아들일수 없는 것들도 있다.
1.
에덴동산의 특징이었던 벌거 벗음은 유대 사회 안에서, 심지어 한 가족 안에서 조차 비난의 대상이었다. (레위기 18:6–19; 에스겔 22:10; 사무엘하 6:20; 10:4; 이사야 20:2–4; -47:3) 아들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는 건 명백한 범죄였다. (창세기 9:20–27)
죄악의 범위는 확장되어, 죄악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조차도 (벌거벗음을) 금지하였다. (이 문제는 여전히 유대교 안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는 누드 비치는 모르겠지만 라커룸이나 혹은 집에 있는 오래된 수영장에서는 벌거벗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성서에는 죄라고 규정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2.
구약성서에 의하면 7일의 월경기간 동안은 엄격하게 성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레위기 18:19;15:18–24), 그리고 이를 범한 사람은 누구라도 즉각 처형하도록 되어있다 (레위기 18:29, 15:24와는 모순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월경기간 중에도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죄인들인가?
3.
성서에서는 명백하게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의 성적인 관계를 어디서나 금지하고 있다. –별로 놀랍지 않게도 칼빈에 의하면, 시편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두 사람의 확고한 사랑에 찬사를 보낸다. 몇몇 학자들은 알레고리칼 한 해석에 의해서 이러한 사실을 덮으려고 할지라도, 천년 동안 교회는 결혼이란 범주 안에 있지 않은 섹스에 대해서 금지해왔다.
오늘날 많은 십대들, 싱글들, 과부들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을 오직 결혼이라고 하는 범위 안에서만 성관계를 해야한다고, 그리고 계속 믿어야 한다고하는 성서적인 입장으로 바라 보았을때, 이것이 과연 옳은 관점인가?
4.
성서에는 성 기관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부족하다. 생식기라고 하는 말은 발 혹은 넓적다리 라고 하는 말로써 완곡한 용어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성교라고 하는 말은 그가 여자를 알았다라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청교도주의적인 혹은 금욕주의적인 어떤 언어들과는 상반되게 창조의 좋음을 선호한다.
5.
정액과 월경 기간 중의 피를 만진 모든 사람들 부정하다고 여겨졌다.(레15:16–24) 성관계는 해가 질 때 까지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월경은 7일간 여성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정액이나 월경 중 피에 닿으면 부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몽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 당시에는 난잡한 것으로 여겼지만, 이 사람들은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간음, 매춘, 일부다처제
6.
간음, 근친상간, 강간 그리고 매춘은 구약성서 안에서 사회 규정상 여성들 위에 서있던 남성들의 소유 권리으로 규정 지어졌다. 매춘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를 보호하기 위한 보호 수단으로써, 남편들의 소유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써, 본래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었다. (창38:12–19; 수2:1–7) 남자는 매춘부와 만나도 죄가 되지 않았지만, 매춘한 여성은 죄인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바울은 매춘에 대해 공격하는 이유들을 지지한다.(고전6:12–20) 바울은 간음의 범주에 있는 매춘에 대해 참지 못한다.(고전 6:9)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함께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해가고 있다. 여기서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동등한 자리에로 나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
사랑, 정절과 상호 간의 존중이 남성의 소유권과 같은 여성을 두고 벌이는 경쟁을 줄이는 것에 대체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매춘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의 변화 속에서 거의 진전하지 못했다. 도덕적인 토대가 변화하였는데, 여전히 같은 도덕적 잣대를 남겨두고 그것으로 재단한 것인가?
7.
간음에 대한 처벌은 남성과 여성 양쪽으로 부터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다. (신명기 22:22) 그러나 여기서 간음은 결혼한 여성로 정의 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성관계를 한 유부남은 간음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또다시 이중 잣대가 발생한다. 결혼 할 신부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다(신명기 22:13–21), 그러나 결혼함에 있어 남성의 순결은 언급된 적이 없다.
오늘날 몇몇 기독교인들은 간통은 구시대적인 것이라는 데, 반대해 간통과 피임의 발달을 사회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남성에게 자유롭도록 허용된 특권을 여성에게 까지 확대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성관계는 진실한 사랑과 번영을 위한 일부다일제의 상황속에서 요구된다고 믿는 사람들 조차도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돌을 던지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질색한다.
8.
일부다처제는 구약성서에서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이는 신약성서에서도 계속 언급된다. 많은 학자들이 현재 믿고 있는 것 처럼, 신약성서의 디모데전서 3:2,12 그리고 디도서 1:6 는 분명하게, 주교들과 집사들은 오직 한명의 아내만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홀아비가 되었거나 재혼한 주교는 허락되지 않았다) 주교와 집사를 제외한 남성들은 일부다처제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일부다처제는 초대 교회에서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부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미시니와 탈무드에 신약성서에 뒤따르는 수 세기 동안 유대교에서 일부다처제가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시행 되었음을 알고 있다.
몇 세기전 아프리카로 간 기독교 선교사들은 부족의 족장들에게 한명의 아내만 남기고 모두 이혼할 것을 무자비하게 강요하였다. 이는 무자비한 정복과 함께 이루어졌다. 초기 신앙인들이 일부다처제를 받아들였다해도, 오늘날엔 다른 방식들이 더 인도적일지 모른다고 여겨진다.
더이상 속박해선 안된다
9.
일부다처제의 형식은 레비레이트혼이라고 하여 죽은 남편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는 관습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없이 결혼한 남자가 죽었을 때, 그 형제는 과부와 결혼하도록 되어있고, 죽은 형제를 위해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예수도 이 관습을 비판없이 언급하였다. (마태 2:23–33) 오늘날 독실한 유대인이 아닐지라도 이 명백한 계율은 주의해서 본다. (신25:5–10)
10.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결혼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밝힌다. (고린도전서7장)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이런 자신의 충고가 적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충고를 명백히 무시한다. 권위있는 가르침, 성서가 가르치는 남성 중심 사고, 남성 중심적인 호전적인 관계들은 규율로써 여기에도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한 가르침들이 계속 유효하도록 지속시키길 원하는가?
11.
유대인들은 종족 결혼을 하게 끔 되어있었다. 이스라엘 12지파 안에서만 혼인하는 것 이다. 최근까지 이와 비슷한 법이 미국 남부 지역에 널리 퍼져있었다, 다른 인종간의 결혼에 반대하는 법들이 그러했다. (흑인과 백인, 다른 인종끼리의 결혼, 혼혈 아이 출산) 우리는 일생 속에서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주 법을 무효화 시키기 위해 합법적인 투쟁을 했다.
관용을 향해가는 사회적 자세의 변화에 공적으로 다른 인종끼리 교제하는 연인들을 받아들이는 점진적인 변화들도 목격해왔다. 성적인 관습은 한 사람의 일생동안, 완전하게 그리고 급진적으로 변화 될 수 있다.
12.
구약성서에서 독신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예레미야의 독신의 명령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파멸의 신호였다 예레미야 16:1–4) 그리고 디모데 전서 4:1–3에서 독신을 강요하는 것은 이단이라 불렸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독신을 성직자들과 수녀들의 규범으로 만들었다.
13.
우리는 성서에 기댄 입장과는 다른 방법들을 발전시켜 나간다.
“두 남자가 싸울 때에, 한쪽 남자의 아내가 얻어맞은 남편을 도울 생각으로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상대방의 음낭을 잡거든, 당신들은 그 여인의 손을 자르십시오” (신명기 25:11 f.)
성서에는 이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는 정 반대로 우리는 이 여인에 잘했다고 갈채를 보낼것이다.
또한 구약과 신약성서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우린 더 이상 여성 노예들, 내연녀, 포로들을 성적인 노예로 이용하거나 남성 주인들이 아이를 낳는 기계로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레위기 19:20f. , 사무엘하 5:13과 민수기 31:17–20에서는 허용되었다. 그리고 많은 미국의 노예주인들은 100년이 약간 넘게 그렇게 했다.
권위의 문제
이러한 경우들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특히 구약성서의 경우가 그러한데, 우리는 구약성서의 규정들을 더이상 속박 할 수 없는 것으로 분명히 간주한다. 구약성서 안에서 우리를 속박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규정들의 경우 신약성서 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부분에 있어서 그 원리는 대체 뭘까? 우리 대부분은 동물과의 성행위, 근친상간, 강간, 간음, 매춘, 일부다처제, 레비레이트혼과 내연관계를 금지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구약성서가 마지막에 열거한 네 가지를 허용한다 할 지라도 신약성서에서는 이것들 중 대부분에 대해 침묵한다.
우리는 어떻게 금지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까?
우리들 중 상당수는 성서적인 태도들을 거부한다. 발가벗고, 생리기간중 성관계를 한다. 성 기관과 성적 행위 에 대해 말할 때 고상한 척 하고, 동족결혼, 레비레이트혼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의 성적인 소유물이 되는 것에 근거한 규율 등 분명히 열거한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을 재량 껏 선택한다.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는 미국에서 금지되었다,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몰몬교의 일부다처제가 지배적인 기독교 문화의 감수성에 폭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에 대한 명확한 성서적 금지 근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예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예외가 아니다. 예수가 그의 권위로서 창세기 2:24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문은 일부다처제에 대한 배제로 이스라엘 안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한 명 이상의 여성과 성행위를 통해, 한 남성은 한 육신이 될 수 있다)
이 권위의 문제는 구약성서의 광신적인 요구들이 신약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교리로는 완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구약성서의 도덕적인 명령들만이 효력으로 남아있다는 교리로도 완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적인 관습의 대부분은 도덕적인 명령들 가운데로 전락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지막이라면 (롬 10:4), 만약 우리가 율법을 섬기는 일을 장려하지 않아왔다면, 과거에 기록된 핵심들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로운 삶 가운데 있는 것이라면 (롬7:6), 이러한 구약 성서의 모든 성적인 관습들은 성령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된다.
우리는 심지어 새로운 법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들을 취할 수 없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관철할 법만을 선별하여 수호한다. 그러나 그들 중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성애 하는 것을 죄로 비난한 바울은 아니타 브라이언트 처럼 여성들은 교회에서 침묵하라고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전 14:34)
만약 아니타 브라이언이 변함없이 성서적이었다면, 그녀는 게이들은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교회에서 그와 같은 말을 결코 할 수 없었다!
옳은 일을 스스로 판단하라
이 문제의 핵심을 간단히 말하자면, 성서는 성윤리 책이 아니라는 거다. 성서적인 성윤리는 없다. 성서에는 오직 사랑의 윤리만이 있고, 그 사랑의 윤리는 어떤 나라 혹은 문화, 시대 속에서 그에 따른 성적인 관습들이 지배적이라도 견딜수 있도록 한다.
규율 보다는 사랑의 관점에서 접근했을때 동성애에 대한 문제는 즉시 변화가 가능하다. 지금 우리의 질문은 “무엇을 허용하는가?”가 아니라 “동성애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다.
과업이라기 보다는 신앙의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우리의 질문은 “무엇이 성적인 영역 안에 거룩한 규율을 파괴하도록 조성하는 가?” 대신에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편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하는가?”가 될 것이다.
문자 보다는 성령의 관점에서 접근 했을 때, 우리의 질문은 ‘성서가 무엇을 명령하는 가?’가 아니라 ‘성서, 전통, 신학, 심리학, 유전학, 인류학 그리고 생물학의 빛 가운데서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 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말씀 중,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어찌하여 너희는 옳은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완전한 자유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공포로 다가온다. 기독교인들은 꽤나 규율 아래 놓이기를 원하고, 무엇이 옳은지를 스스로 판단하기 보다는 남으로 부터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바울 자신은 동성애에 대한 그의 가능성 중 하나에 선행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되풀이한다.
“우리가 천사들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지못합니까? 그런데, 하물며 이 세상 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고전 6:3).
바울이 마지막으로 원한것은 돌판에 새겨진 새로운 율법으로, 그의 도덕적 조언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스스로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노력했다. 오늘날 동성애에 대한 것이 새로운 징표이든 아니든 우리가 이용 가능한 모든 자료와 결론을 활용해 빛을 하나님 아래서 이와 관련한 모든 이슈에 대해 재검토할 의무가 있지 않은 가? 이것은 복음을 세워가는 순종을 위한 급진적 자유가 아닐 까?
물론 성서를 지나치게 미시적으로 끌어와 분석하는 것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다. 성서는 분명히 동성애는 죄로 여긴다한들, 이것이 3번 언급되든 3000번 언급되든 핵심은 아니다.
우리 중 몇몇은 동성애에 대한 지식이 자라남으로 더 이상 죄라는 말을 할 수 없다. 누구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지라도 성서를 전체적으로 볼때 동성애는 죄라고 하는 것이 틀렸다는 걸 안다.
나는 자유로이 그 모든걸 인정한다. 이 문제는 성서적인 판단이 어떻든 정확히 고쳐야 한다. 성서 전체는 노예제도 등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부정한다. 우리는 오늘날 노예를 성서적으로 정당화 해야하는가?
성서 메시지에 함몰 되면 여성을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한 견해를 지속시켜야 하는 걸까? 예수 자신은 어떠한 경우의 이혼도 금지했다 (마태는 “간음을 제외한다” 라는 말을 더했다) 우리는 이혼을 금지해야 할까? 모두가 합당하다고 여긴 결혼인데도 재혼이란 이유로 금지해야 하는 걸까?
깊은 선입견
한 가지 사실은 성서의 율법주의적인 부분 이면에, 보다 깊은 차원의 성서가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해한 성서의 깊은 차원 그리고 매춘부, 세리, 병자들 , 불구인 사람들과 소외 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정의 속에 있는 숭고한 현상들에 의한 깊은 차원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힘 없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시고, 모든 것을 화해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분이란 걸 말해준다. 하나님으로 부터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빛 속에서 게이들에 대해 우리의 위치가 어떻든간에, 사랑과 돌봄, 그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 복음의 명령인 건 분명하다.
우리 중 상당수는 동성애에 대해 개인적으로 강한 혐오감을 갖는다. 이러한 혐오가 본능적으로 우리를 뒤로 물러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동성애는 본성에 어긋난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본다. 나의 경우는 우월감에 맞서 왔고, 게이들에 대한 편견에도 맞서 오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본인들의 성적 지향성만이 본래적인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혐오 혹은 외계인을 보는 듯한 느낌, 단순한 무관심은 근거가 되지 않는다. 동성애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윤리적 결정들이 근거가 된다. 대다수가, 선천적으로 이성애자인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적용할 때 느끼는 감정들은 선입견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확실히 성서적인 근거도 아니고 도덕적인 정의도 아니다. 이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방식이다. 만일 우리가 깊은 선입견을 알 수 있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허용하기 시작할거고 그들의 선호 또한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캘리포니아의 주교인 C. Kilmer Myers가 1977년에 말한 내용 중 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예수님은 참 인간의 모델입니다. 나는 매우 인간미 있는 동성애자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들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스승, 내가 믿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됩니다.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감독으로 이러한 동성애자들을 마주할 때, 이 사람들은 나를 하나님 안에 아버지, 그리스도안의 형제, 그들의 친구로 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들에게
“너희는 새로운 이스라엘에서 저 바깥편으로 밀려나있어야 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 부터 거부당했다. 너희의 사랑과 돌봄, 자상함은 동의, 머뭇거림, 너희와 접촉하는 것, 너희의 눈물들, 너희가 찾는 사랑, 폭력으로 인한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넌 저주 받았다! 하나님의 집에서 네가 있을 곳은 없다. 너희는 너무나 천해서 사제직 가운데 혹은 그 어디에도 너희를 위한 자리는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까!
이러한 목소리들은 오늘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도편추방제입니다. 무엇이 주교의회(the House of Bishops) 안에서 이러한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이 이슈는 우리가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는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이 올바른 우리의 응답이 될 수 있을까?
원문 : Medium
- 사사기의 마지막은 동성강간, 집단 강간, 시체 토막 사건, 동족상잔, 집단 납치 등을 언급한다. 성읍에서도 불량배들의 동성강간과 집단 강간이 성행했고, 베냐민 지파는 집단 납치라는 방법을 이용해서 민족의 대를 잇는다. ↩
-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남창(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명기 23:17,18) ↩
-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린도 전서 6:9-10) ↩
-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them that defile themselves with mankind)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는 위함이니…’
영 : for adulterers and perverts, for slave traders and liars and perjurers–and for whatever else is contrary to the sound doctr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