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표에 맞춰 기계적으로 정량을 번역하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일부 인기 번역가를 제외하고는 늘 번역거리가 확보된 것도 아닙니다. 이래서야 저 같은 ‘대도시 거주 가장 신분의 전업 번역가’가 생존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변의 번역가 지망생들에게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고정 수입을 가진 반려자와 결혼해 맞벌이 생활을 하라고 권유합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지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거나,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맞벌이를 하기 위해 결혼할 만큼 이 번역가라는 직업이 신성한 것도 아닙니다. 저처럼 그냥 대책 없이 결혼하고 애를 낳고도 외벌이 번역가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번역가는 당연히 번역비로는 다 충당하지 못하는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그리고 다소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계속 번역가로 살아가기 위해 ‘돈 되는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러면 번역가의 아르바이트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편의점 알바나 과외 같은, 굳이 번역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번역가의 아르바이트는 어떻게든 번역과 관련이 있는, 궁극적으로 번역가의 경험과 소질을 제고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니까요.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대학 강의입니다. 물론 대학 강의는 박사 학위가 없는 번역가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겠지요. 사실 저는 어느 정도 시간적·금전적 여력이 있는 번역가 지망생에게는 번역하면서 따로 석·박사 진학을 통해 박사 학위를 취득하라고 권해왔습니다.
역시 대학 강의가 좋은 아르바이트 거리라는 점도 있지만 석·박사 과정에서의 인문학 공부와 독해력 향상이 번역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대학 강의 자체도 단지 아르바이트의 수단일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번역가의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대학 강의 과목은 초급 수준의 중국어 강의가 가장 많긴 하지만 독해, 문학사, 번역 등 상당히 다양합니다.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가치 있는 정보와 아이디어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번역 강의를 통해서는 학생들의 번역 문체를 교정하면서 자신의 문체를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고 문학사 강의에서는 차후 기획할 만한 새로운 작가, 작품과 조우할 수 있지요.
이 밖에 가장 중요한 아르바이트는 편집, 교정, 저작권 중개 같은 출판 관련 아르바이트입니다. 저는 번역가들이 최소한의 출판, 저작권 관련 지식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앎을 위해서는 역시 현장에서 뛰어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요. 기회가 된다면 출판사에 근무해보거나 직접 한국과 중국 간의 저작권 중개 실무를 맡아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외서를 번역하겠지만 이 일은 전체 출판 프로세스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작권 중개 역시 이 전체 프로세스에 속하지요. 어떻게 외서가 기획되는지, 또 어떻게 외서가 계약되는지, 그 후 번역 원고가 완성되고 출판사에 넘어가면 어떤 공정을 거쳐 한 권의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가 완성되고 유통되는지 전체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갖춘다면 번역가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출판 관련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시각을 갖추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편집 일을 해보면 출판사가 번역가에게 요구하는 번역 원고의 문체와 완성도가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이것은 단순히 띄어쓰기와 맞춤법의 정확성만 뜻하지는 않습니다. 대상 독자에 따른 글의 난이도와 호흡 조절, 맛깔 나는 서명 및 장절 제목 짓기, 인문서가 아닌 원고의 효과적인 첨삭 등과 다 관련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번역가의 입장과 편집자의 입장, 이 두 입장을 동시에 고려해 번역하게 됩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완성된 원고는 당연히 출판사의 환영을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좋은 번역 원고는 번역이 잘 된 원고가 아니라 출판사가 더 손을 볼 필요가 없는 원고입니다. 만약 이런 번역가가 저작권에 대한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지식까지 갖고 있다면 출판사로서는 더욱 금상첨화입니다.
사실 중국 출판계는 우리와 비교해 아직 저작권 개념이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도서를 두고 그 저작권이 작가에게 있는지, 출판사에 있는지 모호할 때도 있고 여러 작가의 글을 모아 놓은 앤솔로지가 저작권 계약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간된 경우도 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작가의 책인데 그 작가가 저작권을 위임한 에이전시가 어디인지 전혀 수배되지 않을 때도 있고요. 만약 한국 출판사가 기껏 기획한 책이 이 세 가지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한다면 시간만 날리고 허탕을 치게 되겠지요.
번역가가 이런 부분에서도 출판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출판사가 기획하려는 책을 면밀히 살펴 저작권 확보의 난이도를 미리 조언해주거나 심지어 중국의 지인을 통해 빠르게 희귀 도서를 공수해오고 작가와의 직접 연락 방법까지 수배해준다면 출판사로서는 상당히 도움이 되겠지요.그러면 그 출판사는 당연히 앞으로 진행할 중국 도서 번역은 도움을 준 그 번역가에게 맡기려 할 겁니다.
원문: 김택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