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의 와인 칼럼니스트인 에릭 아시모프(Eric Asimov)의 2008년 칼럼으로, 당시 거센 논란을 불러온 문제작 <와인 재판 The Wine Trials>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습니다.
<와인 재판>은 “사람들이 좋은 와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가격에 대한 정보”라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화제를 일으켰던 책이죠. 이 글에서 아시모프는 대중들의 인기도로 와인의 질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취향에 자신감을 갖기 위해 ‘지식’이 필수적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와인 속물(wine snob)이 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말이죠. 글의 원제는 “You Can Please All the People , Or You Can Make Great Wine”이며, 원문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와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반지성주의적 노력의 일종일까요. 와인의 가격은 품질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그리고 와인 전문가들이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만 늘어놓는다고 주장하는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 500여명의 자원 테스터들을 대상으로 540여 종의 와인을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본 결과가 그 증거라고 하는군요.
우선 나는 로빈 골드스타인(Robin Goldstein)의 이 책 <와인 재판 The Wine Trials>을 읽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내가 이 책에 대해 처음 알게된 것은 <뉴스위크 Newsweek>지의 4월 7일자 기사를 통해서입니다. 기사에 나온 책의 내용에 따르면, 100종 가량의 15달러 이하 저가 와인이 대부분 고가 와인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두 가지 비교 실험이 눈에 띄는데, 그중 하나는 워싱턴에서 생산되는 9달러 99센트짜리 스파클링 와인인 ‘도메인 세인트 미셸 브뤼(Domaine Ste. Michelle Brut)’가 돔 페리뇽(Dom Perignon)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그리고 2달러짜리 ‘투 벅 척 까베르네 쇼비뇽(Two-Buck Chuck cabernet sauvignon)’이 나파 밸리산 까베르네(Napa Valley cabernet)로 만들어진 55달러짜리 ‘아르테미스(Artemis, Stag’s Leap Wine Cellars)’보다 우위를 보였다는 겁니다.
기사는 저자의 말을 인용해서 이 실험 결과가 “와인 평론가들이 거드름 피우면서 남발하는 전문용어 따위는 무시해도 된다, 사람들은 싸구려 와인을 대접하는 것을 미안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허수아비 논법(straw man: 논쟁에서 상대를 공격하기 쉬운 가공의 인물로 슬쩍 바꿔놓은 뒤 상대방의 주장이 무너진 것처럼 기정사실화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와인 평론가가 싸구려 와인을 대접하는 것에 대해 맹렬한 비난을 했답니까? 와인 평론가 중에 누가 가격과 품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던가요? 전문용어 남발하며 거만을 떤다? 뭐, 그럴지도 모르죠.
인기 = 품질?
사실 와인 평론가들이 무슨 용어를 사용하든 그건 중요한게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와인을 추천하고 애정을 표시할 뿐이죠. 하지만 내가 정말로 반박하고 싶은건 다른 부분입니다.
이 실험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테스트 참가자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죠. 제가 책을 읽지 않아서 뭐라 말하긴 좀 그렇지만, 뉴스위크에서는 참가자 그룹에 전문가와 매일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해 보죠. 대체 언제부터 인기가 품질의 표시가 된 겁니까?
한번 50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분석한다고 칩시다. 죄다 앉혀놓고 코미디 영화 <포키스 Porky’s>와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의 <페르소나 Persona>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포키스> 쪽을 더 좋아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키스>가 더 좋은 영화가 됩니까? 더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 됩니까? 인기투표는 상업적인 전망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단지 그뿐입니다.
마찬가지로 500명의 사람을 대상으로 비슷한 조사를 하면 사람들은 토마스 핀천(Thomas Pynchon)의 소설보다는 존 그리샴(John Grisham)의 흥미진진한 법정 드라마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나 역시 둘 중 어느 쪽엔가 속하겠죠. 그렇게 해서 증명되는 게 무엇일까요?
일반의 잣대를 갖고 예술 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하자면,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자의에 의해 핀천 소설을 택한다는 게 드러날 겁니다. 하지만 <포키>가 <페르소나>보다 좋다거나, 그리샴이 핀천보다 낫다는 식의 주장은 예술성을 판단하는 기준도 되지 못할 뿐더러, 그 사람들의 취향을 합리화할 아무런 근거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나는 와인 속물들 편을 드는게 아니라 ‘원칙’을 옹호하는 것 뿐입니다. 왜 그 실험에서 아르테미스보다 투 벅 척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는지는 내가 마음 쓸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투 벅 척이 얼마나 끔찍한 제품인지, 왜 그런지에 대해서 당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요. 많은 이들이 다른 음식보다 패스트푸드 햄버거를 더 즐겨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샤토 세인트 미셸 브뤼가 돔 페리뇽보다 낫다구요? 부디. 이건 샤토 세인트 미셸에 대해 비평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투 벅 척이랑 동급으로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예요. 그리고 돔 페리뇽이 보기보다 대중적인 상품이라고 ‘강추’하려고 드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말해 돔 페리뇽은 아주 훌륭한 대중용 샴페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하려는 주장은 와인의 가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10달러~20달러 짜리 와인 중에서 500달러 짜리보다 훨씬 더 좋은 제품을 수십 가지는 찾아낼 자신이 있어요. 뉴스위크 기사에 보니 35~40달러짜리 캘리포니아 샤르도네 와인보다 포르투갈 비뇨 베르데(Portuguese vinho verde)산 와인이 더 호평을 받았다는데, 나 역시 거기에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습니다.
무지와 미덕, 지식과 속물근성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격표와 라벨, 와인 평론가들의 별점은 좋은 와인을 선택하는데 있어 적(enemy)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짜 적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싸구려인 와인을 주문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두려움은 중산층 소비자들이 메뉴에서 제일 값비싼 와인 쪽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리는 이유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이 투 벅 척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고,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게 정말 좋은 와인이라고 고집을 피움으로써 자신들의 무안함을 만회하려고 들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신경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괜찮은 와인이라도 좋지 않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이곤 합니다. 당신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왜 그걸 좋아하는지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들면 막막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허나 와인에 대해 아는게 없다는 것은 조금도 문제될 게 없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와인에 대해 반드시 잘 알아야 한다고 강요받을 이유가 없으며, 잘 모른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도 없죠. 물론 그렇다고 무지가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니며, 지식이 속물근성과 동의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와인에 대해 남보다 많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그의 견해는 더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죠. 두 사람이 바에서 야구 중계를 시청하고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야구에 대해 잘 모르고, 다른 한 쪽은 오랫동안 야구를 봐온 사람입니다. 그들이 본 경기에서 타율 .240인 타자는 홈런 두 개를 쳐낸 반면, 슬러거로 유명한 어떤 선수는 세 차례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둘 가운데 더 좋은 타자는 누구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초심자라면 그날 두 방의 홈런을 쳐낸 타자를 더 높게 평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야구 매니아인 사람은 강타자가 오늘은 컨디션이 나쁜가보다 하고 이해할 것입니다. 누구의 견해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하겠습니까?
원문 : Med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