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사랑, 불교가 자비, 유교가 인(仁)을 핵심적인 덕목으로 삼는다면, 이슬람교는 평화와 평등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610년 아라비아에서 무하마드를 교조로 하여 만들어진 이슬람교는 1400여 년이 지난 현재, 15억 추종자를 거느린 종교가 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이해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종교들이며, 창세기부터 구약 성서까지는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 이 세 종교가 나눠지는 것은 예수의 신학적 지위를 두고 다른 시각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예수를 위선자로 보고, 기독교는 하느님의 독생자이자 삼위일체에 따라 하느님과 동일시하였으며,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인간으로 보긴 하지만, 최상의 인격체이자 훌륭한 예언자로써 존중한다.
이처럼 기독교와 이슬람은 닮은 점이 많지만, 원래 비슷한 종교끼리 갈등과 반목이 많은 법이다. 교리에 유사성이 있음에도 역사적 앙금 및 지배-피지배 관계에 따른 서구 사회의 역사적 반목으로 인해 서로 가장 불편한 관계에 놓여있다. 이는 종교 외적인, 정치적인 국제관계의 파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교와 테러의 연관관계, 어떻게 보는가?
테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와 이슬람 세계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만 보아도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이지만, 한국이 일제 35년의 강점기에 따른 역사적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 않은가?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만을 잡더라도 1,200년간 지배-피지배의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711년 아랍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732년에는 지금의 프랑스 파리 교외 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로부터 800년간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의 땅이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남부 지역도 200년 이상 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또한 동부 전선에서는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였으며, 발칸 반도가 이슬람화되었다. 1683년에는 그 당시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심장부인 빈이 세 차례 공격 당한다.
다시 말하면 711년부터 1683년까지 약 1000년간 서구는 한번도 이슬람 세계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기독교 세계가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로부터 1000년간의 지배를 받으며 공포와 위협을 느끼며 살았던 것이며,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이 바로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 즉 이슬람 공포증, 이슬람 혐오증의 역사적 뿌리가 된다.
그 후 약 100년간 서구와 이슬람 사이의 냉전 시기를 거치고, 도리어 서구가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벌이다. 그로부터 200년 동안 전 이슬람 세계는 한 군데도 예외가 없이 서구의 지배하에 놓인다. 동남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필리핀 남부는 스페인,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는 영국, 북아프리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중동 전역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각각 지배를 받는다.
제1,2차 세계대전 동안에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이 독립하였다. 자신들이 과거 1000년 동안 지배하였던 세력으로부터 오히려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아랍 세계가 느꼈을 모욕감, 고통, 문화적 파괴에 대한 저항감이라는 것은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현재 90% 이상의 대다수 이슬람 세계의 국민들은 현실을 수용하고 서구와 협력, 공존하여 실리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화려한 과거를 못 잊는 약 5%밖에 되지 않는 일부 급진 세력만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극단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알 카에다, IS와 같은 세력은 57개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마저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있는, 반인륜적이며 반종교적인 테러집단이다.
그러나, 서구 언론에서는 테러가 좋은 뉴스거리이자 해외토픽이기 때문에, 이슬람 사회 주류의 생각 및 문화적 본질은 무시하고 사건, 사고, 뉴스 중심의 틀을 통해서만 이슬람 세계를 보고 있다. 이를 계속 보아온 우리 역시 해방 이후 60여 년 동안 축적된 지식의 편중이 이슬람 세계를 잘못 이해하는 지적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세계의 언론을 좌지우지하는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즈를 중심으로 AP, 로이터, CNN, 타임 등이 모두 유대인 중심의 언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아랍 이슬람 세계를 바라볼 때 전쟁 당사자의 시각과 의견을 통해서만 아랍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왜곡된 언론의 편중 및 적대적 이해 당사자의 시각을 통해 다른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우리와는 아무런 역사적 앙금이 없고 교류 및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들은 이슬람을 악이자 적대적 당사자로 보는 심각한 왜곡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일 관계와도 닮은 점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우리도 35년 일제 강점기의 일제 트라우마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영토 분쟁, 위안부, 교과서 왜곡 문제는 다른 갈등 관계에 있는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한일전 축구 경기에서 한국이 지면, 전 국민이 밤잠을 못할 정도라면, 이는 상당한 역사적 트라우마의 증거이다.
이와 비교해본다면, 1,200년간의 역사적 갈등 관계에 놓였던 서구와 이슬람 문화권의 갈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번째로는 이슬람 문화권의 57개 국가는 현재 수니파, 시아파와 같은 종파적 가치보다는 민족 및 부족주의를 더 상위 가치로 두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모든 국가가 자기 국가의 현안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57개 국가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이념이 이슬람의 이미지 개선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떠미는 상황이다.
두번째로는 아직도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제3세계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이 낙후되었기 때문에, 거대한 주류로 자리잡은 서구 세계의 매체에 대항할 만한 선전 매체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역량 및 인재 풀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 노력을 하여도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와 닿기가 힘들다.
세번째로는 이슬람교가 평등을 가치로 함에 따라 선교사 및 성직자가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체계적인 선교 체계가 없음에 따라 문화권 외부에 이슬람교를 선전 및 홍보할 수 있는 조직적 기구를 설립하기가 힘들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슬람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종파주의에 대해서는 어떤 오해가 있는가?
70, 80년대까지만 해도 이슬람주의 및 종파주의는 상당히 강력한 가치였다.
하지만 현재 21세기에는 어떠한 국가도 종교 및 종파를 위해 국가적인 가치를 희생하지 않는다. 철저히 개별 국가 중심주의 및 부족주의를 최상의 가치로 둔다.
이를 보았을 때 서구가 말하는 이슬람주의 및 수니파-시아파 사이의 종파적 갈등은 사실보다 훨씬 확대, 증폭, 과장되었다.
한국과 이슬람의 현재와 미래는 어떠한가?
실제로 한국과 이슬람 사회의 관계를 보면 현실적으로 천연 가스 및 에너지 자원의 90%를 이슬람 세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 기업이 지난 30여 년 동안 해외에서 벌어들인 건설 플랜트 수주 평균 70%가 중동에서 벌어온 것이다. 또한 아랍 문화권 대부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특히 IT, 가전, 자동차 분야에서는 한국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K팝,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대장금> 시청률이 90%를 상회할 정도이다. 그들은 ‘코리아’를 좋아하고 한국 물건을 열성적으로 구매하며 큰 공사는 한국인들에게 맡겨주고, 우리에게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국가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서구 언론이 만들어놓은 반이슬람적인 시각 때문에 인구 15억, 57개국에 달하는 거대한 문화권을 버리고 가는 것은 시장 관리를 넘어서서 국익의 차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슬람 문화권은 한국을 발전의 롤모델로 삼고 있다. 서구 세계는 여러 모로 앞서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200년간의 아픈 상처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70~80년대에 100만 명의 근로자들이 24시간 동안 3교대로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20년 동안 직접 봤기 때문에, 우리의 성실성과 노력이 그들의 문화 인프라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랬던 한국이 이제는 첨단 기술 및 정보 산업에 앞장서서,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으로 도약하는 자랑스러운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한국이야말로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본받아야 할 롤모델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좋아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하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서구의 왜곡된 시각 때문에 그들을 멀리할 생각을 하는가? 해외 무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이제는 문화적 편견 및 종교적 도그마를 벗어던지고 장기적 국익 및 시장이라는 측면을 생각하여 이슬람을 바라보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어느 사회나 급진주의자는 있고 그 사람들이 침묵하는 다수를 끌어가는 경우가 많다. 5%의 테러리스트는 우리가 국제 사회의 책임감 있는 일원으로서 물리치는 데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나 이 5%의 모습만을 보고 이슬람 전체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것만큼 아둔한 정책은 없을 것이다.
이는 선택적 전략이라고 본다. 5%의 테러리스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따라 궤멸해 나가고, 95%의 이슬람 문화권 다수는 협력적 동반자로 끌어안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과서, 언론에서 이슬람 사회 주류의 모습, 인문학적 가치, 역사, 문화, 그들이 현재 21세기에 살아가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소개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우리 역시 독자적인 안목을 갖추어 구조적인 문제를 타파하고, 우리의 국익과 시선을 추구하는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 대 민간, NGO 대 NGO의 학술 교류, 스포츠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여, 직접 사람을 만난다면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