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나를 찾아준 한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글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내가 쓰는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별로 좋게 평가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주 많은 글이 있으니 내가 남의 글들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그 이유가 하나일 리는 없다. 또 어떻게 모든 글에 불만일 것인가. 그러니 세상에는 내가 불만을 가지게 되는 글들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고 그 이유도 여러가지이지만 그중에 자꾸 반복되는 것이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다. 나를 반복해서 찡그리게 만드는 것은 바로 객관적 글쓰기다. 나는 이것이 잘못되기 쉽고 실제로 종종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때로 객관적인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집중한다. 그런 생각이 만들어 내는 한가지 문제점은 소통의 핵심을 잊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의 논리적 소통이란 것에 빠져서 자기를 죽이고 자기 감정을 죽이고 자기 아이디어를 죽여버린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표현되지 않고 숨어들게 된다.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 관찰이 바로 객관적 관찰이라고 말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통이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글 안에 인간이 없다면 그 소통에는 핵심이 없다. 그것이 심해지면 아예 무의미해진다. 글의 가치와 매력이란 결국 대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 글은 객관도 없고 주관도 없는 글쓰기라는 주제를 통해서 글쓰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먼저 객관적 글쓰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전에도 이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다. 사실 객관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그 극단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전달할 수 없다. 왜냐면 객관이란 어느 한계를 지키는 한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그 극단에서 허구이기 때문이다. 모든 정보는 어떤 문맥안에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항상 아직 말하지 않은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서야 뭔가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객관적이기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경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우리는 점점 아주 무의미한 말만 늘어놓게 된다. 오늘 저녁은 뭘 먹고 싶냐고 묻는데 우주의 평화를 논한다면 도대체 저녁은 언제 먹을 것인가. 우주의 평화를 위해 오늘 저녁은 라면이라고 하면 이게 피부에 와닿을 것인가.
글쓰기가 절대적인 입장에 서고 쓸모없게 되기는 참 쉽다.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쓸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런 역사가 있고 이런 저런 의견이 있다 같은 말을 늘어 놓은 다음에 적당히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저런 의견들을 모두 참조하여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라던가 이런 저런 의견은 서로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런 점에서 공통되니까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잘 쓴 글이라고 평가해 준다. 더 많은 의견을 논평하고 종합하면 더 대단한 것으로 평가해 준다. 우리는 사실 이렇게 글을 쓰도록 교육받았다.
나는 이게 싫다. 나는 대화하는 글이 좋다. 자신과의 대화이든 독자와의 대화이든 대화하는 글이 좋다. 대화하는 글이란 싸우고 증명하는 글이 아니다. 그 본질은 나는 이런게좋다 혹은 싫다라는 것에 있다. 물론 거기에는 이런 저런 이유가 있지 않는가 라는 설명도 대개는 따라붙지만 대화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어도 두 존재가 하는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란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들어내는 것이다. 즉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고 내 말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려고 하는게 아니라 옳은 것 좋은 것에 대해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한 표를 던지는 것이다.
독자는 필자를 대개는 어느 정도 안다. 다시 말해 대화하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 이 사람의 말을 어느 정도의 무게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안다. 신뢰와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을 때 그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사 단 한 마디의 설명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 사람이 싫다던가 이 사람이 좋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때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백마디 천마디의 객관적 의견 뒤에 자신을 숨기면 글의 의미는 점점 줄어든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말이 된다.
특히 과학적 프로젝트가 아닐때 문제는 더 심각하다. 물리학 같은 엄밀한 과학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조합하고 그 위에 자신의 결과를 제시할 때도 나의 흔적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기여한 부분이 무엇인가가 비교적 명확하다. 엄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어로 표현되고 보다 애매한 정의를 가진 말들로 이뤄진 의견들은 그 해석을 조금식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남의 의견을 너무 많이 조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실은 자기 맘대로 말하는 것이면서 마치 그것이 남의 의견들을 조합한 것인 것처럼 말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말잘하는 지식인이라고 존경하기도 한다.
이제 주관에 대해 말해보자. 나는 객관적 글쓰기가 싫다. 그러나 무조건 주관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객관이던 주관이던 그 극단은 다 허구다. 앞에서 객관의 극단은 허구라고 말했거니와 주관적으로 말한다는 것도 극단에 이르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대화를 하면서 상식이나 공감을 얻는 말들에 기반하지 않고 순수히 주관일 수가 있겠는가. 그건 마치 독일어밖에 모르는 사람앞에서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만약 누군가가 그러니까 객관과 주관을 잘 구분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자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틀렸다. 사실 이 세상에는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없다. 그것을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우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아이디어가 순수히 내 안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주관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 아이디어란 세상이 우리에게 넣어준 것이다. 예를 들어 개념이나 언어의 형식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어떤 아이디어가 내 바깥에 있을 때 그것을 객관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모두 우리의 안쪽의 것에 의해 선택되고 변형된 것이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여 균형을 잡자라는 생각은 애초에 주관과 객관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틀려 있다.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다. 있는 것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객관적 글쓰기가 싫다고 먼저 말한 이유는 사회적 교육 특히 한국 사회의 교육이 개인을 압살하는 것의 흔적이 나타나는 글쓰기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사회는 어릴때부터 우리에게 끊임없이 네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 객관적인 진리라고 교육해왔다. 중요한 것, 진리는 우리 바깥에 있다고 가르친다. 바로 교과서 속이나 선생님이나 부모님이나 정부의 높은 지위에 계신 분들의 머리 속에 말이다. 선배나 상사나 상관의 머리속에 말이다.
그나마 서구에서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어릴때부터 무척 강조하기 때문에 그런 교육의 문제가 덜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은 쉽게 억눌러진다. 한국 사람들은 개개인의 취향이 서로 다른 것을 잘 용납하질 못한다. 그런 사회에서 객관적 글쓰기라는 교육은 설사 같은 것이 서구에서 성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장마철에 화분에 물 주는 것이나 건기에 물 주는 것이 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화적 환경이 다르면 약도 독이 된다.
이러한 교육은 식민지 인간 같은 지식인이라고 표현할 만한 사람을 사방에 만든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서 불행하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것은 좌파나 우파나 종종 마찬가지다. 진보인가 보수인가 하는 질문은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행복의 기준이 이미 너무나 객관적이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뿌리깊으면 진보고 보수고 간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미 인간의 가치가 성적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국영수만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체능의 성적도 중요하다고 싸우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는가. 인간중심을 말하면서도 이미 그 인간이란게 객관화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그는 인간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 사고나 글쓰기란 언제나 분석적이며 시스템 순응적이다. 그래서 나는 식민지 인간 같은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쓴다. 객관적 글쓰기는 문제를 전체로 보고 그 전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나 느낌을 말하지 않고 문제를 분해하고 다시 쌓아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글쓰기에서는 항상 뭔가를 옳은 것으로 전제한다. 어려운 학술용어를 많이 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뭔가를 전제하고 기반을 다지지 않으면 그 연장선상에서 말을 할 수가 없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것은 통상 객관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엽말단에 집중하기 쉽다. 학술지의 논문은 좋은 예다. 논문은 대개 아주 작은 것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논문은 엄밀성에 근거하여 그렇게 해도 되는 면죄부를 받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논리와 시야가 좁쌀이 되면 큰 그림을 늘상 놓치고 말며 핵심없는 말만 하게 된다.
이유와 근거를 대는 것은 훌룡한 것이지만 그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면 문제를 전체로 보지 못하게 된다. 나는 이유는 제대로 못대지만 아무튼 이게 좋다라던가 이게 싫다라던가 이게 옳지 않다고 느낀다던가 이게 옳다고 느낀다고 말하지 않게 된다. 지엽말단만 보게 된다. BMW타고 다니는 걸보니 그 사람 훌륭한 사람인가보네 하는 식으로 말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 무서운 것이다. 세계의 질서와 문맥을 제공하거나 지키려고 하는 쪽은 언제나 주류 혹은 기득권이다. 누군가와 긴 논리쌓기를 한다고해보자. 이러니 저렇고 저러니 이렇고 하는 식으로 시스템을 쌓아올리면 나중에는 애초에 이 시스템이 왜 이렇게 되었더라하는 것도 기억이 가물가물할만큼 복잡해지고 기억이 흐려진다. 가끔이지만 제정신이 돌아올 때 좀 크게 시스템을 보면 그것이 매우 흉칙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착취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 시스템이 싫어라고는 말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면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큰 그림인데 자꾸 지엽말단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야 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지적할 수 없다면 침묵하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객관적 글쓰기의 교육이다.
사실 객관적 글쓰기의 극단은 대개 완전한 침묵이다. 이 세상에는 잘나고 똑똑한 천재들이 어딘가에서 우리 대신에 말을 하고 있다. 세상이 객관적으로만 흘러간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에 대해 말할 것이 없으니 침묵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 대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어리던 나이가 많던 아무 것도 글을 쓰지 못한다. 쓸 가치가 있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그러면서 그런 자신의 상태가 병든 상태라는 것도 자각하지못한다. 그게 병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지식인도 드물다. 사람들은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글솜씨의 문제인줄 안다. 그게 아니라 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유는 잘 못 말해도 나는 이게 싫어라고 외치는 것은 대개 도덕적 탈선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거짓은 아니다. 주관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전체를 보고 느낀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가 언제나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압도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 이유는 나중에 온다. 말로는 할 수 없어도 어딘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누군가가 그걸 정리하여 단어들을 만들어 정리하면 비로소 이유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성공하면 그 때 그렇게 한 것은 사실 자명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게다가 사실 이류를 말한다고 해도 주류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한 말인데도 이해를 못한다. 가치관이 다르고 기본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류문화에서 이탈하고 시스템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그 자체로 잘하는 일도 못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여러가지에 달려있고 특히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법 같은 거 몰라도 인간으로서 괜찮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 때 법이 가로막고 있던 정의와 행복을 실현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즉 더 큰 정의와 더 큰 행복을 법을 뛰어넘음으로써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사는 것은 그저 방종이나 범죄 혹은 자기 파괴가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단련하고 자신을 믿어야 한다. 시스템을 새로 만들고 새로 가입하기도 해야 하지만 언젠가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 껍질을 깨고 벗어던져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린이는 청소년이 되어야하고 청소년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회사원도 언제나 회사의 그늘에서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언젠가는 자신을 믿고 비약해야 한다. 무한정 계속해서 하나의 시스템, 하나의 껍질에 갇히면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진다.
주관적 글쓰기란 나에게 있어 자기와 대화하는 글쓰기고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다. 사실은 객관도 주관도 아니지만 세상이 객관에 지우쳐 있을 때 그것은 주관적 글쓰기라고 불려야 할 것이 될 것이다. 적어도 시스템을 벗어나는데 있어서 객관적이기만한 글은 아무 쓸모도 없다. 그것은 시스템으로 우리를 다시 가둬버린다. 스스로가 개혁가나 혁명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써야할 것이 객관적인 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혁명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글이 참 많다. 한국에는 더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런 글들이 싫다. 특히 좋은 선의를 가지고 그런 글들을 써대는 사람을 보면 때로는 답답하여 화도 난다. 뜻은 좋지만 방향은 반대니 그들은 오히려 세상이 좋아지는데 방해만 된다. 좁쌀 같은 지식으로 세상사람들을 자꾸 구속하려고 하니 조금 하다가 지쳐서 세상을 저주하기 쉽다.
남의 글을 비판하면 내가 비판받기 쉬워진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것이 한국의 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던 진보던 정치에 관심이 있던 없던 많은 사람들이 걸려 있는 병이다. 바로 객관과 주관 사이에서 자기를 잊어 버린 병 말이다. 세상에는 객관도 주관도 없다. 있는 것은 하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