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의 본문 외 번역
번역에 돌입한 첫 날, 원서를 책상 위에 놓고 펼쳤다고 상상해봅시다. 흥분된 마음에 직접 본문 번역부터 시작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을 펼치기 전, 먼저 살펴야 할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바로 앞뒤 표지, 앞뒤 날개, 그리고 띠지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도서 콘셉트 소개, 유명인의 추천사, 작가 약력, 홍보용 카피 등이 적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작가 약력은 꼭 필요하다고 쳐도 다른 글들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본문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글들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 책을 출간할 출판사의 편집자 및 마케터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꼭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은 번역가가 하지만 도서 출간 직후, 언론 매체에 신간 정보를 전하는 보도자료는 편집자가 작성하고 각종 광고 및 서점 영업은 마케터가 담당합니다. 따라서 편집자와 마케터에게는 그 책의 주제와 특성을 제삼자에게 요약적으로 알릴 수 있는 특정 정보와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곧 그 책의 ‘마케팅 포인트’를 잡는 것과도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번역가는 설사 본문 밖에 기재된 문구라 하더라도 그것이 책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반드시 번역하여 출판사에 전달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처음 원서를 펴자마자 표지와 날개, 띠지에 적힌 글부터 번역합니다. 그 일을 본문 번역 종료 후로 미루면 혹시 까먹고 빠뜨리지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저자 약력
저자 약력은 원서에 적힌 내용만을 기계적으로 번역해서는 곤란합니다. 원서의 약력은 현지 독자들을 대상으로 기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서의 번역서를 읽을 우리 독자들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약력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출판사의 편집자와 마케터에게 저자의 약력과 관계된 새로운 마케팅 포인트를 환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중톈 중국사 7권: 진나라의 천하통일』 원서의 저자 약력은 간소하기 그지없습니다.
“1947년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신장(新疆)에서 일했다. 이후 우한(武漢)대학, 샤먼(廈門)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현재는 장난(江南)의 어느 마을에서 이 책의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중톈은 중국을 대표하는 지식계의 명사입니다. 아마도 더 요란하게 소개할 필요가 없어 약력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국에서의 이중톈은 그 위상이 다릅니다. 중국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만 알려진, 따라서 더 홍보가 필요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번역가는 약간의 조사를 통해 그가 중국 지식계에서 얼마나 유명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그의 책이 중국에서 어떤 반향을 얻었고 우리 문화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한 그의 기존 저서 중 어떤 것이 한국에 이미 출간되었으며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정보를 덧붙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일부 독자들이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다가 저자 약력을 보고 흥미와 신뢰감을 느껴 구매할 마음이 생기겠지요. 편집자와 마케터도 그 책을 홍보하고 판매할 자신감이 더 늘어날 겁니다.
역자 약력
번역가는 기본적으로 저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출판사도 저자 약력은 신경 써도 역자 약력은 어떤 식으로 써달라고 주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번역가는 스스로 역자 약력을 챙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역자 약력은 의외로 중요합니다. 일부 예민한 독자들은 책을 사기 전에 역자 약력을 꼼꼼히 봅니다. 자기가 살 책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역자 약력을 통해 가늠해보려 합니다. 또한 출간 예정 외서의 역자를 찾는 편집자들도 역자 약력을 검색하곤 하지요. 요컨대 역자 약력은 책의 판매뿐 아니라 번역가가 새 일거리를 찾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번역가는 어떤 점에 유의하여 역자 약력을 작성해야 할까요? 물론 개개인의 특성과 장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태어난 연도와 출신지, 학력, 경력, 기존 역서나 저서, 그리고 작업 방향 등으로 구성될 겁니다. 먼저 태어난 연도와 출신지는 굳이 자기 나이와 고향을 밝히고 싶지 않다면 생략해도 됩니다.
학력은 해당 외국어에 대한 번역가의 전문성과 연관이 있다고 여기므로(저는 사실 꼭 그렇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꼭 기재해야 합니다. 최종 졸업 학력과 전공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고, 해당 외국어와 전혀 무관한 학과 출신이라면 외국 연수 경력이나 그에 상응하는 학습 경력을 넣으면 됩니다.
혹시 기계과나 전자공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출신 학과 자체를 적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텐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번역 계에는 이과 출신 번역가가 태부족이어서 그런 학력이 오히려 도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 경력은 번역과 직, 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대표적인 것들만 기재합니다. 대학 출강, 해외 근무, 문예지 및 신춘문예 등단 등이 있겠지요. 마지막 순서로 기존 역서나 저서를 열거해야 하는데 전체 숫자가 서너 권 정도라면 전부 열거해야겠지만 혹시 그 이상으로 많다면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것들만 뽑아 대여섯 권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역자 약력이 인터넷 서점과 포털에서도 노출되므로 번역가는 일종의 ‘자기 PR’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합니다. 새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변동 사항을 역자 약력에 반영하고 인터넷 서점에 밝혀진 역자 약력이 틀린 경우에는 출판사를 통해 수정을 요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자신의 약력을 관리하고 업데이트함으로써 번역가는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개선해갈 수 있습니다.
매절, 인세, 반인세
번역가의 생활은 늘 단조롭기 그지없지만 간혹 살 떨리는 ‘베팅’의 순간도 있습니다. 새 번역 계약의 조건을 정할 때가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앞에 앉은 출판사 사람이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바로 매절, 인세, 반(半)인세입니다. 매절은 책 판매 부수와 상관없이 200자 원고지 1매당 가격을 기준으로 전체 번역비를 산출해 지급받는 방식입니다.
책이 1천 부가 팔리든, 1만 부가 팔리든 매절 번역비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세는 책 인쇄 부수와 연동해 번역비를 받는 방식이지요. 보통 번역가의 인세율은 5% 정도입니다. 즉 1만 원짜리 책 한 권이 팔리면 그중 500원이 번역가의 몫입니다. 저자 인세는 보통 10%이지만 번역 인세는 5%를 넘기 힘듭니다. 외국의 원저자에게 6-8%의 인세가 먼저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인 출판제도 속에서 번역가의 존재는 원저자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번역가는 번역 계약을 할 때 매절과 인세 중 한 가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책의 성격에 따라 다릅니다. 여러분은 우선 번역 일의 의뢰자인 출판사의 입장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판사가 계약할 책이 많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매절 계약을 선호할까요, 인세 계약을 선호할까요? 당연히 일정 금액만 주면 번역 판권을 완전히 손에 넣을 수 있는 매절 계약을 선호할 겁니다. 반대로 계약할 책이 분량만 많고 많이 팔릴 희망이 적다면 어떨까요? 번역가에게 인세 계약을 제시해 번역비를 줄이려 할 겁니다.
물론 잘 팔릴 것 같은 책을 신뢰할 만한 번역가에게 인세 조건으로 의뢰해 성공의 과실을 나누려는 출판사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가능한 한 수익은 극대화하고 비용은 최소화하려고 하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판매 전망이나 해외 저작권 구입 가격이 보통인 대중서의 경우, 많은 출판사들이 번역가에게 매절 조건을 제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역만으로 생활하는 번역가가 그런 책들을 인세 조건으로 계약하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원고지 1천 매 분량의 책을 원고지 1매당 4,000원 기준으로 매절 계약을 맺으면 번역비는 400만 원입니다. 그런데 같은 책을 5% 인세로 계약하고 판매 부수가 초판 2,000부 이하에 그친다면 책 정가가 1만 5,000원인 경우 번역비는 150만 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컨대 안 팔릴 책을 인세로 계약하면 매절로 계약했을 때보다 반 이하의 번역비밖에 못 버는 것입니다.
특히나 베스트셀러가 극히 드문 중국어 번역계에서는 이 점에 매우 유의해야 합니다. 중국어 번역가들은 웬만한 경우에는 매절 계약을 해야 합니다. 애초에 매절 계약이 불가능한, 분량이 많은 학술서 번역은 시간과 돈이 넉넉한 교수님들에게 양보하십시오. 물론 자신의 번역 생애에 기념비로 남기고 싶은 학술서가 있다면 한두 권 정도 인세 계약을 해도 무방합니다. 제게도 그런 책이 한 권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반인세’에 대해 얘기해야겠군요. 반인세라는 것은 적당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 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입니다. 이것은 매절과 인세의 중간 정도에 해당합니다. 사실 계약 조건을 매절할지 인세할지 결정 내리기 힘든 책들이 있습니다. 원저자가 지명도 있거나 책도 재미있는데 정작 판매가 잘 될지는 미지수인 책들이 그렇죠.
일부 출판사들은 이런 책들을 인세로 계약하자고, 자신들이 잘 팔아보겠다고 번역가를 유혹합니다. 그러면 번역가는 고민에 빠집니다. 안정을 지향한다면 당연히 매절을 고집해야 하지만 베팅을 해보고픈 생각도 떨치기 힘듭니다. 이럴 때 반인세를 고려해보기를 권합니다. 반인세는 인세로 계약하긴 하되 선인세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겁니다. 즉 책이 많이 팔리든 적게 팔리든 일정 이상의 선인세는 반드시 지급하도록 출판사로부터 확약을 받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원고지 1천 매 분량의 책을 반인세로 계약할 경우, 선인세를 원고지 1매 4,000원 기준 매절 번역비의 70%를 요구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최소한 280만 원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번역 원고를 완성해 넘기고 그 판매 추이를 봐서 잘 팔리면 발생 인세가 선인세 280만 원을 초과하는 시점부터 추가 인세를 받는 것이고, 안 팔리면 이미 받은 선인세 280만 원으로 만족하는 것이죠.
보통 매절 계약을 고수하는 저로서는 이런 반인세 조건도 꺼리는 편입니다. 하지만 친분이 깊은 출판사나, 새로 관계를 맺고 싶은 출판사가 부탁하면 승낙할 때도 있습니다.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지요.
번역 스케줄
번역가는 날품팔이 노동자에 가깝습니다. 글자 그대로 하루 단위로 품삯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생활을 조직화해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저는 번역 계약을 맺으면 즉시 전체 번역량을 계산해 일 단위, 주 단위, 월 단위로 계획표를 짜서 원고 파일 맨 마지막에 배치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 1(목): 4[-9] / 8[-10] / 12[-11] / 16[-12] / 20[-2] / 24[-3] / 28[-4] / 32[-5]
- 2(금): 36[-9] / 40[-10] / 44[-11] / 48[-12] / 52[-2] / 56[-3] / 60[-4] / 64[-5]
- …
- 28(수): 644[-9] / 648[-10] / 652[-11] / 656[-12] / 660[-2] / 664[-3] / 668[-4] / 672[-5]
가상의 그 책을 대중 인문서로 상정하면 시간당 번역량은 4매 정도입니다. 그러면 하루에 32매 정도를 마치는 것이 정량입니다. 그러면 하루 작업 시간이 8시간인 것 같지만, 휴식과 식사 시간을 빼면 실제로는 10-11시간 정도 번역에 매달려야 합니다. 이런 매일 매일의 번역 진도를 한 달 단위로 정리한 것이 위의 표입니다.
2018년 2월을 기준으로 삼아보았습니다. 일요일과 설날 연휴를 제외하면 작업 가능 일수는 21일이고, 예정 번역량은 672매로군요. 토요일은 조금 여유 있게 일하기는 하지만, 역시 작업일에 넣습니다. 번역가로 살면서 토요일을 마음껏 쉬어본 게 며칠이나 되는지 모르겠군요. 번역가에게 토요 휴무는 사치 중의 사치입니다.
만약 위의 계획표대로 번역을 진행할 수만 있다면 원고지 1,400매 분량의 인문서 한 권을 두 달 남짓에 끝낼 수 있겠군요. 편의상 교정 작업에 소요되는 며칠은 제외합니다. 사실 저는 그때그때 교정을 하기 때문에 따로 교정에 날짜를 할애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번역비를 산정해보면, 번역업계의 표준 원고료를 원고지 1매당 4,000원으로 계산했을 때(사실 4,000원은 꽤 높은 금액입니다) 1시간에 1만 2,000원, 하루에 12만 8,000원, 한 달에 268만 8,000원입니다. 괜찮은 금액인가요? 썩 흡족하지는 않지만 이런 시대에 글쓰기로 한 달에 이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으니 스스로 만족해야 하나요? 솔직히 대도시에 사는 세 가족의 가장인 저로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위의 계획표는 언제나 잠정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끊임없이 변경 사항이 생기고 수정됩니다. 예상보다 번역 진도가 빨라서요? 그런 경우는 극히 적습니다. 보통은 돌발 변수의 출현으로 진도가 느려져서 계획을 수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계산한 번역비도 줄어들게 마련이죠. 물론 그 돌발 변수는 ‘다른 돈 되는 아르바이트’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고정적인 것이든 잠정적인 것이든 번역가는 계획표에 따라 살아갑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작업한 양을 체크하고 계획표의 해당 수치를 지웁니다. 그리고 일과를 마쳐도 역시 그 하루의 수치를 지우고 오늘은 얼마치 번역을 했나 속으로 계산한 뒤 자책하거나 희희낙락합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도, 한 달이 지났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가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현재까지 마친 번역 원고 매수와, 그로 인해 확보한 번역비와, 번역 마감일까지 남은 날짜가 빙빙 맴돕니다. 어쩌면 그는 아라비아 숫자의 종신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원문: 김택규 님의 페이스북
※ 편집자 주: 글쓴이의 번역서 목록은 여기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