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적인 것은 유럽에 있는 무슬림 2세, 3세들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 조건이 핵심이다. 이런 불만을 가진 무슬림들이 종교, 또는 문화를 매개로 하여 국제정치 세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과의 관계 등에서, 역학적으로 약자인 아랍 세계가 당하고 있는 것이 접목된 상황이다.
으로 약자인 무슬림과 만나 생긴 현상으로 봐야 한다.
테러를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는 모두 샤를리다”라며, 각국 정상들이 손잡고 파리에서 시위하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그게 얼마나 웃기는 것이냐면, 바로 그들이 이라크, 아랍에 폭격 등 공격을 도모하고 있는 세력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테러를 통해 똘레랑스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으로 입지를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 제대로 짚어내지 않고, 마치 유럽 사회가 테러 반대로 똘똘 뭉치고, 다 똘레랑스 있는 것처럼 형상적인 부분만 보도하고 있다. 이거 다 허위고, 허상이다. 실제 비판적인 분석이나 이런 기사들이 칼럼이나 이런 게 프랑스, 영국에서 나오고 있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소개되거나 하지 않는다.
언론의 객관성은 환상이라는 것인가?
언론이 가진 위상에 대해 우리가 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게 어릴 때는 교육, 나이 들면 뉴스다. 그런데 교육은 국가권력이 지배하고 있고, 언론은 자본의 논리가 들어간다. 때문에 우리는 제도교육과 뉴스에 의해 우리 의식이 지배당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기본적 인식이 필요하다. 교육의 속살을 보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에 대해서도 같은 시각이 필요하다.
국내 언론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정치화를 가로막거나, 애초에 정치화를 할 수 없게끔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남쪽과 북쪽의 권력집단은 적대화하며 자신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사실상 적대적 공생관계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는 바깥에 북한을 두고, 국내에서는 종북 이야기를 끊임없이 꺼내며 자기 위치를 강화시켰고, 사회적 불만을 자기들에게 들어오는 걸 피해 왔다. 남북뿐 아니라 국제세계에서도 극단적이고 과격한 세력이 자기 세력 키우기 위해 바깥에 적을 만들고, 적을 통해 자기 입지 강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샤를리 상황을 보자. 내가 보는 르몽드를 포함해, 마치 유럽 매체들이 객관적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런가? 유럽인 아닌 아시아인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르몽드는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고 사설을 썼다. 그만큼 동일시가 된다. 그런데 부시가 이라크 침공했을 때 어떤 매체도 “우리는 이라크인인다”라고 쓴 곳은 없다.
무슨 뜻이냐? 절대 객관적인 게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 기울었는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잡힌 섬세한 시각을 갖기는 매우 어렵다. 약자 자리에 끊임 없이 서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조금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깨어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섬세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국제 뉴스를 받아볼 때 두 가지 어려운 장벽이 있다. 하나는 출처라는 장벽이다. 한국 언론은 대개 미국 일변도, 외신을 벗어날 수 없는 형편이다. 이에 의해 세계에서 정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조감하기가 어렵다.
참 부끄러운 일인데 우리가 보는 외신도 거의 다 선정적이다. 이것은 한편 한국의 대중의 일상 층위를 그대로 보여주는데, 외신 토픽이나 이런 거 관심 갖지, 실제 정치나 사회 경제가 어떤 모습 보이는지 관심이 없다.
이 두 장벽 때문에 더 비판적 시각을 갖기가 어렵다. 총체적 인식 속에 한국의 위상, 남북관계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각 자체가 비어 있다. 아무튼 이런 비판적 시각을 갖기 위해서라도 이런 책은 좋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