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Ulrich Stielike). 시대를 앞서가 외국에서 뛰었던 탓에 자국에서 외면 받았던 인물이다. 선수생활의 초반부를 자국 최고의 팀인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에서 보내고 전성기에는 레알마드리드에서 활약했다. 당시 라리가의 최우수 외국인상을 4연속 수상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레알마드리드에서 올타임 레전드는 아니지만 당당히 레전드로 대접받는 그. 이건 레알마드리드의 갈락티코 정책으로 인해 화려한 이름의 플레이어가 많은 탓도 있다.
울리 슈틸리케는 명성에 비해 A 매치 출전수가 적다. 이것은 슈틸리케가 레알마드리드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 독일은 분레스리가 이외의 팀에서 뛰는 선수를 대표팀에 뽑지 않는 쇄국정책을 펴던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래서 그는 독일인이지만 은퇴후에 스페인에서 연수를 받았고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이번 수석코치가 아르헨티아인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독일 외의 인맥이 많은 편이다. 2000년대 중반 독일 국가대표팀의 코치와 유소년 감독을 맡은 것 외에는 모두 독일 외 국가에서 감독생활을 했다.
그는 전성기 때는 미드필더로,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스위퍼로 활동했으며, 이를 통해 수비에는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기술했듯이 자국 대표팀에서 외면했던 탓에 국내 기반이 아닌 이방인의 신분으로 감독생활을 하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게 되면서 그는 거처를 한국으로 옮기겠다고 했으며 한국이 자신의 마지막 감독경력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연봉과 국내거취문제로 감독직을 거절한 네덜란드의 판 바르마이크과 아주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열의에 찬 모습이다.
감독의 역량이 선수시절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중 선수생활을 가장 화려하게 보냈으며, 이는 차범근이나 박지성조차 비교될 수 없다. 국가대표팀 감독 연봉이 최대 15억원 이내일텐데, 이 기준에서 본다면 울리 슈틸리케는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의 선택이 맞는 것 같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최근 국제대회 축구 성적과 인프라는 월드컵 참가국중 최하위 수준이다. 히딩크를 섭외했던 이용수 기술위원장의 안목이니 믿어볼 만하다.
거창한 구호로 원팀을 외치지 않아도,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보여주는 희생과 헌신의 모습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어떻게 대표팀을 이끄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리더가 팔로워를 신뢰하고, 공정한 평가기준을 제공할 때 조직의 움직임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대표팀 경력이 끝난줄로만 알았던 차두리, 곽태휘가 수비라인 구성의 핵심요인이 되었고, 한계가 분명해보이던 재능으로 평가받던 남태희가 아주 좋은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그리고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해도 유난히 대표팀에서는 홀대받던 박주호가 중원의 핵으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분하는 안목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리더가 갖춰야 할 필수적인 자질 중 하나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전사적인 성과의 효과성을 담보하는 것인데 울리 슈틸리케는 이에 매우 능한 것 같다. 가장 눈여겨볼 점은 키퍼 포지션의 성공적인 교체다.
지난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브라질에서 보여준 플레이는 기대 이하였다. 이는 중계화면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경기장의 여러가지 수치들이 증명한다. 선수들의 히트맵과 점유율, 그리고 각종 패스의 기록들이 이를 보여준다.
주전과 비주전의 확연한 구분과 전술의 고착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요한 선수들이 빠져도 그것을 다른 선수가 메꿔내고, 그것이 전체적인 전술의 역량 하락이 아니라 적극적인 전술변화의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청용과 구자철의 공백이 기성용의 윙포워드 쉬프트나 남태희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수행 등으로 변환되면서 전술의 색깔이 달라졌다.
게다가 480분째 무실점이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최장시간 기록이다. 수비의 단단함은 전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제 결승이 남았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게 대단히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27년만의 아시안컵 결승진출이며, 2회 연속 우승 후 55년만의 재도전이다.
더군다가 6게임 연속 무실점의 연속이다. 골을 먹을 듯하며 전혀 허용하지 않는 질식축구이자 전방에서부터 강하게 압박하는 형태의 모습도 보인다. 딱히 어느 팀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본연의 색깔이 이제 나오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된다.
2002년레 히딩크가 이뤄놓은 대단한 업적은 오히려 기준치를 높여놓아 우리가 차근차근 시스템을 다져가는 데 해로 작용했다. 이제는 울리 슈틸리케에게 온전히 맡기면 어떨까. 아시안컵 결승까지 그가, 그리고 우리 대표님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바라고 그리던 게 아니던가.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인해 두근대고 기대되는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2002년은 유난히 뜨겁고 화려했다면, 지금은 야무딱지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진중하게 지켜보고 싶다. 제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함박웃음을 머금은채 보고싶다고나 할까. 울리 슈틸리케. 고맙다. 이렇게 다시 축구로 재미지게 해줘서.
원문: 지식을 연주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