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던 <나는 시간강사다>라는 게시물이 있다. 지방대 시간강사였던 필자의 실상 얘기였다. 나는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 과연 독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나는 모종의 비관적인 결론을 가졌고, 반 정도는 확실히 현실이 되어 있었다.
부조리를 비판하려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 명제가 맞냐 아니냐와 무관하게, 최소한 한국인 중 절반이 이에 동의한다 여긴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면 그 명제는 한국 사회의 아주 일상적 질서 중 하나라고까지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상아탑이 결부될 경우, 그 명제는 더이상 일상적인 것이 아닌 ‘절대’를 논할 만한 질서다.
범죄가 된 과거의 무능
그 필자는 모종의 죄인이 되어 있었다.그 필자가 어떤 사람들에게 죄인이 된 건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돈이 없었다. 그냥 책을 좋아했고, 모든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실 공부를 눈에 띄게 잘 하지는 않았다.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의 시각에선 잘해야 ‘적절히’ 노력했고, ‘평범한’ 결과를 얻어 대학에 들어왔다.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그는 그래서 ‘당연히’ 그런 처지에 빠진 것이다. 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누구의 탓을 했다! 구조의 탓을 했다. 자신이 ‘착취당함’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떼를 쓰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 그것은 오롯이 그가 선택한 것이기에 누구도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시간강사는 오히려 자신의 판단력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해 사회를 시끄럽게 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항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인터넷의 동료가 많다는 환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이미 10년 가까이 진전이 없고, 오히려 매체의 성향과 구독자의 주된 성향을 따져 본다면, 너무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가 빠진 상황에 대해서 별다른 진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었다. 말은 길고 지점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수렴하는 결론은 단 한 가지였다.
감히 그 정도의 기량과 준비를 갖고 상아탑에 끼어들어 한 자리 해보려 했느냐?
항변을 위해 필요한 것
한국 사회에서 뭔가를 바꾸려는 사람들은 모종의 장벽에 부딪힌다. 진정성이다.
연봉이 너무 적다고 하면 어김없이 더 가난한 사람이 나타난다.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항변하는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은 ‘어디까지 아끼려고 했는지’를 항목별로 검사받는다. 비정규직이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하면,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지나간 인생을 검토받는다.
김영오 씨의 경우, 세월호 특별법을 해보겠다고 자신이 좋은 아버지였는지 아닌지를 시험받았고 덕분에 통장 내역을 손에 들고 국궁이 귀족적 취미가 아니라 그냥 동네 동호회에서 할 수 있는 것임을 직접 가르쳤다. 모두 진정성이란 같은 맥락에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부조리를 비판하거나 고발하는 데 있어 갖춰야 한다고 평가받는 모종의 ‘진정성’이라는 건, 자신이 당한 부조리한 질서에 자신이 시비를 걸었을 때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냐에 달렸다. 부조리 하에서 견디면 언젠가 얻을 대우, 부, 계급을 그만두면 비로소 진정성이란 신기한 칩이 생겨난다.
비정규직이 자신의 처우에 불만을 드러내면 그것은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을 중지하라 요구하면 그것은 연대다. SKY 출신이 학벌주의에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지만, 그 당사자인 지방대생과 고졸이 문제를 제기하면 깨인 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진다.
시간강사에게 비웃음이 넘실대는 이유
그 차이는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유리한 상황에서 그것을 포기하고 비틀린 질서에 항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리한 상황이라서 싸우는 것인지에 있다. 차별과 부조리를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상대적으로 갖고 있던 ‘편함’을 던져 스스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비로소 진정성이란 칩이 손에 들어오고, 그 칩을 써서 부조리에 대한 항변을 할 권리가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사장님은 돈과 휴가를 풀어 착한 사장님이 되지만, 일하는 사람이 돈과 휴가를 달라고 하면 ‘근태’가 등장한다. 곧바로 진정성의 보유량을 의심받는다. 어김없이 “회사도 문제지만 노조도 문제죠”가 뒤따라 나온다.
사람 사는 게 아니라고 대학 시간강사 문제를 고발한 지방대 시간강사에 대한 비웃음이 넘실대는 이유도 이 흐름에 있다. 그 사람은 수학을 잘 못했고, 지방대 출신이며, 그런 고발이 철저하게 ‘개인적 이익추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뭔가를 함께 추구하거나 나눠주지 않는다. 그냥 자기가 힘들다고 하며, 그는 자기가 얼마나 그런 처우를 피하려고 밑바닥까지 노력했는지, 그 진정성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항변은 그저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다수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면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지만,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단순히 일베뿐만이 아니라 대략 한국인의 3할 이상이 그것을 ‘루저의 떼법질’로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이다.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분수’를 어겼다. 그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강대하고 엄격한 관습법이다.
행복해질 권리는 모두에게 다르게 존재한다.
예전에 고대 학생이 사회를 거부한다며 대학을 자퇴한 것이 뉴스가 되었다. 그 학생이 분교 출신이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이슈가 되었을까? 최경환을 협박했던 대자보가 신촌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지잡대’의 게시판에 붙었다면? 흔해 터진 주거 문제를 논하는 학생이 신촌에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지방 구석 대학가에서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다른 한국인에게 ‘문제’로 비쳐졌을 것인가?
그것은 정말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같은 무게를 갖는가’? 그리고 주변 사람도 그 판단에 동의할까?
최저한이 없는 사회
부조리와 압박에 대한 항변에 진정성이라는 화폐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결론도 명확해진다. 사회의 루저들은 동시에 루저이기 때문에 그 사실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자신이 ‘무능력해서’, 혹은 어찌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몰려서 루저가 된 것이 아님을 밝히지 않는다면.
단순히 당신이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나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돈으로는 월세를 해결하면서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겪는 고충을 해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문제제기에도 모종의 스펙은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개개인이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답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비판에도 ‘자격증’이 있어야 함에 공감하느냐 아니냐는 곧 개인이 얼마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질서와 먼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는 가장 확고한 바로미터 중 하나다. 그 명제가 가진 막강한 당위와 중량감이 곧 수많은 사람들과 담론을 분리했고,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막았으며, 비판이라는 것을 대중과 멀어지게 했다.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을 지식인과 중산층의 특권 또는 현실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룸펜들의 인터넷 놀음으로 여겨지게 만들었고, 다수에게는 박탈감을 선사했다.
그런 박탈감의 기운이 주변을 짙게 감돈다. 그런 공기 속에서 사람은 지난하고 끈기있는 싸움을 포기하고 속물이 되거나, 모든 것을 기득권으로 파악하고 파멸적인 욕망을 품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인간의 최저한이 없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의 존중을 받고, 뭐든 일을 하고 산다면 최소한의 존엄은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 없기에, 사람들은 언제나 패배자를 보고 패배했음을 탓한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서 애도를 받고, 죽었다는 사실이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애도를 거두고 장사치를 보는 표정을 짓는다. 진정성이란 자산 앞에서 모든 비극과 고통은 손쉽게 저울에 달아진다.
이 나라는 왜 사람을 궁지로 모는가?
시간강사는 그래서 누군가에겐 머저리 주제에 감히 학문의 길을 가서 파랑새 증후군에 빠져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죄인이 되었고, 세월호 유족은 그래서 누군가에겐 세월호 쇼크를 일으켜 ‘경제를 망친’ 경제사범으로 변했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서 산다.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살 필요는 없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언제든지 동물 이상 인간 미만이 될 이유는 없다.
한국 사회는 매번 패배자를와 약자를 아예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것으로 모두의 노력을 독려했다. 우리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 우주선 안에서 고립되어 물과 공기가 한정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겐 양보할 수 없는 존엄이 조금이라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사소하지만 한국 사회에게 가장 크고 절실한 진보다.
그것에서부터 모든 인간성은 시작한다.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다. 가진 것이 사람밖에 없다는 나라에서, 왜 이렇게도 사람을 궁지로 모는 해결책을 택하는가?
원문: 잉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