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말콤 X의 1963년 연설을 번역한 것입니다.
만약 주인의 집에 불이나면, 집 노예는 주인보다도 불을 끄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겁니다. 주인이 아프면, 집 노예는 “뭐가 문제이기에 우리가 아픈걸까요?” 라고 말할 겁니다. 우리가 아프다고!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하는 것 이상으로 주인에게 자신을 동화시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집 노예에게 가서 “도망가자, 탈출하자, 여기서 벗어나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집 노예는 여러분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할겁니다, “미쳤구나. 벗어나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보다 더 좋은 집이 어디있지? 여기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데가 어디야? 여기보다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어디있어?” 이것이 집 노예입니다. 오늘날 집 노예는 “집 깜둥이”로 불립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를 부르는 말 입니다. 왜냐면 우리 중엔 여전히 집 노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집 노예들은 주인을 사랑합니다. 주인의 곁에서 살고자 합니다. 단지 주인 곁에서 사는 것으로, 3배의 봉급을 받을 겁니다, 그리곤 “난 이곳에서 예외적인, 유일한 노예야” “난 내 직장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라며 자랑하겠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집 노예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지금 당장 다가와서, “여기서 벗어나자”고 말합니다. 대농장에서 일하던 집 노예와 정확히 같은 말을 합니다. “벗어나다니 무슨 말이야? 미국으로 부터? 이 좋은 백인 남자로 부터 말이야? 여기보다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지?” 여러분이 하는 말 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프리카로는 떠나지 않을거야,” 이것이 여러분이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왜 여러분의 정신을 아프리카에 남겨 놓았습니까.
같은 대농장에 들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럿이 모여 살았습니다. 집에 사는 노예들 보다 들에 사는 노예들이 항상 많았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웠습니다. 남은 음식 찌거기를 먹었습니다. 집 노예들은 잘 구워진 돼지를 먹었지만, 들 노예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돼지의 내장만 있었습니다. 오늘날 돼지항문이라 부르는 겁니다. 들 노예들은 그들이 먹던 것을 내장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내장을 파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몇몇은 여전히 내장을 파먹는 사람들입니다.
들 노예는 아침부터 밤까지 두들겨 맞았습니다. 판자집, 오두막에 살았습니다. 낡고, 헤진 옷을 입었습니다. 주인을 증오했습니다. 주인을 증오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리했습니다. 집 노예는 주인을 사랑했지만, 들 노예는 기억합니다. 그들은 주류에 속해있고, 그들은 주인을 증오한다는 걸요. 집에 불이 났을 때, 불을 끄려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고 나옵니다.
들 노예는 불이 잘 붙도록 바람이 불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이 아프면, 들 노예는 주인이 죽기를 기도합니다. 누군가 들 노예에게 와서 말합니다, “여기서 벗어나자. 도망가자.” 그는 “어디로 간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든 여기 보단 나을거야”라고 말할 겁니다.
오늘날 미국에도 들 노예들이 있습니다. 저는 들 노예입니다. 아주 많은 들 노예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집이 불타는 걸 볼때, 여러분은 “우리 정부가 곤경에 처했다”는 몇몇 노예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합니다, “정부가 곤경에 처했다.” “우리의 정부!” 라고 말하는 노예를 상상해 보십시오.
전 누군가가 “우리의 우주비행사들”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습니다. 비행사들은 그가 주변에 있길 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우주 비행사들!” 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해군” 정신나간 노예입니다. 정신나간 노예에요.
당시 노예 주인들이 톰을 이용했듯, 집 노예들은 들 노예들을 잡아둡니다. 오늘날 그와 똑같은 늙은 노예 주인에겐 아무것도 없는 노예들과 엉클 톰이 있습니다. 20세기의 엉클 톰들은 여러분과 나를 잡아두고, 지배 하에 두려 합니다. 우릴 수동적이고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으로 두고자 합니다. 톰은 여러분을 비폭력적으로 만듭니다.
여러분이 치과의사에게 갔는데, 여러분의 이를 몽땅 뽑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치과의사가 여러분의 이를 뽑으려 할때, 여러분은 그와 싸우려 할 겁니다. 그래서 치과의사는 마취제라 불리는 것을 여러분의 턱에 주입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단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은 그곳에 앉아, 마취제를 주입당했기에, 평온하게 고통받을 겁니다. 턱에서 피가 쏟아져 내려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여러분이 매우 평온하게 고통받고 있다는 걸 가르쳐줘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책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코란이라 부르는 꾸란이 우리가 평온하게 고통받는 걸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종교는 지적으로 거듭나도록 우릴 가르칩니다. 평온해라. 공손해라. 법을 준수해라. 모든 사람을 존중해라. 그러나 만약 누가 너에게 손을 대면, 그를 묘지로 보내버려라. 이것이 좋은 종교 입니다.
사실, 이는 오래된 종교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유일한 종교입니다.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머리엔 머리, 목숨엔 목숨. 이것이 좋은 종교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복속시키는 종교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여러분을 먹이로 삼았죠. 이것이 미국에서 백인들이 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늑대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양입니다. 양치기, 목사는 언제나 여러분과 저에게 백인에게서 달아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동시에 백인들과 맞서선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를 배반한 반역자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맡기지 마세요, 안됩니다.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세요. 그것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포기하려 한다면, 차라리 그들과 동등해 지십시오.
원문: 홍신해만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