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역일간신문이 해온 가장 ‘뻘짓’ 중 하나는 서울지역일간신문(소위 중앙지 또는 전국지)을 흉내내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서울지와 비슷해보여야 촌스럽지 않고 ‘뽀대’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위 ‘중앙지’에 대한 컴플렉스를 갖고 스스로를 ‘지방지’라 비하해온 지역신문 종사자들의 심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일선 기자 시절 들었던 가장 당혹스러웠던 덕담(?)은 ‘지방지에 있을 기자가 아닌데…’라는 말이었다. 나름 지역에 애정을 갖고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제역할을 해보고자 하는 내겐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상대는 선의에서 하는 말이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독자가 아니라 취재원의 관심이 중요했다
각설하고, 어쨌든 그러다보니 전국지와는 차별되는 지역신문만의 특화된 지면 구성이나 콘텐츠를 만들어내지도 못했고, 지역지만이 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공론장 역할도 하지 못했다. 기자들은 정치인이나 단체장, 기관장, 출입처 공무원, 기업체 홍보담당자들, 시민단체 또는 문화예술단체 간부 등 이른바 ‘취재원’들과 관계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되는 걸로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기삿거리가 될 정보를 놓치지 않고 낙종의 위험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재원과 네트워크가 잘 되어있는 기자’가 곧 유능한 기자로 통했다. 그러나 이 또한 전국지 방식이었다. 기자의 네트워크엔 독자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은 그 지역의 독자들이 지역신문 지면에서 어떤 콘텐츠를, 어떤 정보를, 어떤 스토리를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과거부터 내려오는 ‘기사 밸류(가치)’에 대한 관성이 뭘 취재하고 뭘 크게 편집할지 유일한 기준이었을뿐이다. 이 기준은 옛날부터 취재 일선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고참기자와 데스크(부장급)들이 자신들도 과거 선배들에게 배운 감각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한국의 지역신문이 오랜 군부독재 치하에서 당근과 채찍에 길들여져 왔고, 권력의 눈밖에 나지만 않으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지역신문은 ‘먹고 살만’ 했다. 특히 전두환 일당의 언론통폐합으로 1개 시·도에 1개 신문만 남게 된 이른바 ‘1도 1사’ 시절은 더 그랬다. 해당지역에서 경쟁이 없으니 정부와 지방행정기관, 기업, 대학 등 광고를 줄 주 있는 출입처 관계자들과 잘 지내기만 하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의 관심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역신문에 실리는 기사는 출입처 중심, 공급자 위주로 지면을 장식했고, 그 틀과 체계, 구성, 편집은 철저히 ‘중앙지 흉내내기’였다.
6월항쟁 이후에도 관성대로 만든 지면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신문사 설립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전국에서 우후죽순 지역신문이 창간되었다. 이제 경쟁 체제가 다시 형성되었으니 당연히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을 방책이 모색되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 창간한 신문사들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있었던 ‘1도 1사’ 시절의 그 신문, 이른바 ‘춘추사’라는 신문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뿐이었다. 그렇게 숟가락을 얹어 기존 신문이 독점하고 있던 광고주 또는 지방행정기관이 던져줄 당근을 나눠먹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교차로> <벼룩시장> 등 생활정보지들이 창간하면서 10만 원 이하 생활광고 시작을 공략하기 시작했지만, 지역일간지들은 그 시장을 우습게 봤다. ‘저게 신문이야? 저러다 곧 망하겠지’라고 방심하다가 저가 광고 시장마저 생활정보지에 선점당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지역신문의 지면에는 지역시민들의 삶을 담아내는 기사 대신 기자들의 ‘출입처’에서 나오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그나마 ‘출입처’를 벗어난 기사라 해도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집회 또는 기자회견 기사 정도였다.
그렇게 지역신문은 독자들의 생활과 점점 유리되어 갔고, 지역주민들 또한 지역신문에서 멀어져 갔다.
(여기까진 1990년부터 기자노릇을 해온 내 경험을 바탕으로 거칠게 정리한 것이다. 반론이나 고쳐야 할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댓글 주시기 바란다.)
시민 속에서 나온 기사, 시민의 삶을 담아낸 기사로
그러나 유럽의 지역신문들은 달랐다. 거긴 가판대에서 신문의 90% 이상이 소비된다. 한국처럼 집에서 배달받아 보는 정기구독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신문은 가판대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철저히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으로서 신문을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출입처’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기사를 그들은 고민했고, 그 결과 유럽 신문에는 시민들의 시시콜콜한 모임이나 행사가 수십 건씩 실린다. 한국 지역신문의 ‘게시판’이나 ‘사람’ ‘인물’란에 실리는 기사들과 비슷한듯 하지만 다르다. 한국은 거기 실리는 기사들조차 대부분 기관, 단체, 학교 등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이지만, 유럽은 진짜 시민들 속에서 나온 것이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기자 인력이 그리 많지 않은데, 어떻게 시민들의 시시콜콜한 계모임까지 취재해 보도하는 게 가능할까? 그 의문은 프랑스 남서부지역에서 발행되는 <수드 우에스트>라는 신문사에서 풀렸다. 신문사에 소속된 기자는 280명이지만, 1050명의 지역통신원(시민기자)들이 자기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신문사에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시민기자들처럼 직업기자들이 쓴 기사를 흉내내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주변의 친구들이나 이웃의 행사, 모임을 알리는 식으로 글과 사진을 보낸다. 덕분에 지면에 실리는 기사는 행정기관이나 정치권, 기업에서 나오는 것보다 시민의 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 많다.
그야말로 지역밀착, 시민밀착, 생활밀착이다. 지역신문이 지역공동체의 공론장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유럽 신문의 광고면도 말 그대로 생활밀착이었다. <경남도민일보>의 ‘자유로운 광고’ 또는 생활정보지의 줄광고와 비슷한 시민들의 개인광고가 무려 6개 지면에 걸쳐 실려있었다. 내용은 주로 애인 구함, 미팅 제안, 모임, 결혼 70주년 알림, 감사, 축하, 생일, 부음, 애견 판매 등이었다. 사진과 함께 10×7cm 정도 크기로 실린 결혼 70주년 알림 광고의 경우 100유로, 그보다 좀 작은 광고는 40유로(5만 4000원) 정도 받는다고 한다.
이런 광고가 지역신문에 안착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신문이 지역주민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지역신문에도 이것만 안착하면 재정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설이 길어졌다. 그러면 어찌하면 될까? 우리도 유럽 신문들처럼 하면 독자에게 사랑받는 신문이 될 수 있을까?
여러가지 시도를 해봤다. ‘동네사람’ ‘우리 이렇게 결혼했어요’ ‘그 사람 그 후’… 이런 코너를 만들어 평범한 시민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계속하여 취재 보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또한 기존의 ‘기고’나 ‘독자투고’처럼 논리를 갖춰 써야 하는 코너와 달리 생활 주변의 자잘한 경조사나 축하, 격려, 칭찬할만한 일을 간단히 스마트폰 사진과 함께 메시지 형식으로 보내주면 1면에 싣는 ‘함께 축하(기뻐)해주세요’ 코너도 운영해봤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광고 또한 생활밀착광고 안착을 위해 최소 1만 원에서 30만 원까지 형편대로만 내면 실을 수 있는 ‘자유로운 광고’란도 운영하고 있고, 개인사업자들을 위한 ‘자영업자 광고’란도 있다.
‘자유로운 광고’란은 민간 시민사회단체나 개인의 행사 알림 및 의견광고로 정착하여 매일 2개 면에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유럽의 신문들처럼 장례식 알림 광고나 결혼 00주년, 애견 분양, 애인 구함 같은 다양한 생활광고, 개인광고는 정착되지 않고 있다. ‘함께 축하해주세요’ 지면도 1년 넘게 그럭저럭 유지되다가 독자의 관심과 참여가 저조해 결국 지면에서 사라졌다.
또한 제주도의 일간지(한라일보, 제민일보, 제주일보)에 정착되어 있는 결혼 알림 광고, 남해군 지역주간지(남해신문, 남해시대)에 정착된 각종 축하광고도 우리에겐 잘 안 된다.
<수드 우에스트>처럼 생활 주변의 소소한 소식을 전해줄 시민통신원 제도도 아직 요원하다. 이걸 어떻게 우리에게도 성공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이 글을 보신 분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