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 요약
- 독서를 하는 목적은 사람 마다 다를 수 있으니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러한 방식으로 책을 고르는구나 정도로 양해 바람.
- 픽션(소설)과 논픽션(소설 이외의 책)이 고전의 목록에 절반씩 차지하는 이유는 전체와 개별의 조화가 필요하기 때문.
- 논픽션 도서는 세상의 일반적인 구성 원리, 운동 법칙을 도출하고자 함
- 픽션은 개개의 존재가 그렇게 일반론으로 환원될 수 없고 고유하고 개별로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
나의 독서 성향 중에 뚜렷한 경향성을 띄는 것은 바로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균형이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비율이 5:5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그 균형이 중요할까? 사실 두루두루 읽고 만물상 같은 지식이나 감성을 가지는 것 보다 하나의 분야를 진지하게 파서 어떤 정수를 맛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게 낫다. 그러니 내가 픽션과 논픽션의 균형을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던) 유지하는 이유는 분명 이유가 있다.
“여기저기서 발표되는 (이를테면 서울대 권장 도서 100선이나 미국 유명 대학의 권장 도서 100선) 목록에는 대체 왜 문학 작품이 절반쯤 포함된 것일까?”
이와 같은 의문을 품어본 사람이라면 나의 이야기가 도움 될 거라 기대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 가운데 문학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서점의 전체 섹션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1/10도 되지 않는데 인류 문화의 정점이라는 고전에는 문학이 절반 가량이나 포함된다. 이에 반해 철학, 물리학, 수학, 경제학, 심리학 같은 분야는 인류의 지적 여정이 축약되어 겨우 학문별로 두세 권의 책이 그 목록에 오른다. 그런데 문학이 대체 뭐라고 1/3 내지 절반을 점유할까?
누군가는 먹물들의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며, 그 목록을 폄하할런지도 모르겠다. 논픽션, 이를테면 뉴턴의 『프린키피아』든 맑스의 『자본론』이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든 무슨 잘 팔리는 비지니스 마케팅 책이든, 심지어 자기 개발 서적까지 모든 논픽션은 세계 혹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물리적 세계든, 생물학적 인간이든,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든 그 이해의 결과는 어떤 종류의 보편적 법칙 혹은 구성 원리라는 형태로 제시된다. 한마디로 ‘세상은 이렇다’는 주장들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각 개인은 혹은 사물은 다 고유한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 뒤에 숨은 운동의 법칙 혹은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다. 그 방법으로 종종 통계를 사용하기도 하고 실험이나 관찰을 하기도 하고 사고 실험이나 논리학에 기대기도 할 뿐이다.
반면 픽션은 그 개개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결코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 고유함은 사라지고, 전체 경향 속에 또 다른 사례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진보를 전체에서 개별로의 이행이라고 할 때 가장 진보적인 것은 바로 가장 문학적인 게 된다.
근대 이성의 극치에서 모든 것이 ‘이해’되고 ‘처리(processing)’되고 인과 관계 속에서 파악될 때, 문학은 멈추어 서서 조용히 어루만지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개개인과 그 개인이 겪은 경험과 슬픔과 끔찍함은 트렌드를 나타내는 전체 중에 하나의 점이나 데이터로 인식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고. 타인을 가장 존중하는 방법이 바로 그 개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파시즘과 문학은 애당초 모순된 관계에 선다.
20대에 삶의 모토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문화적으로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여기서 정치란 현실 정당에 투표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이해 혹은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논픽션은 바로 첫 번째 항목인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견지해 나가기 위해서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에 더하여 두 번째 항목인 ‘문화적으로 세련된’을 견지하기 위해 읽는 책이 바로 픽션이다. 여기서 세련되었다함은 겉멋이나 패션이 아니라 예민하고 깊이 있는 안목에 가깝다. 정책의 입안자, 행정가, 학자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새로운 종류의 인류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픽션을 쓰는 소설가다. 그리하여 오에 겐자부로, 쿳시를 읽어댄다.
세상에 위대한 책을 두 권 고를 수 있다면, 한 권은 세상의 운동 법칙/구성원리와 같은 보편적 진리를 이야기하는 책을 고르고, 나머지 한 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개개인과 개별 사건, 현상이 가지는 고유함에 대한 존중이라면 당연히 절반 정도씩 할애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이 저 목록들의 비율이 가지는 비밀일 테다.
P.S.
1. 그리하여 볼품 없는 소설이란 소설을 빙자해 세상을 해석하려는 짓거리를 하는 책들이다. 은유와 상징은 얄팍하여 고유함이 없이 어떤 사상이나 주장의 대용품에 불과하고 인물은 특정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꼭두각시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정성일 씨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가 정치(필자 주석: 세계관)을 담고 있지 않을 때 영화는 공허해진다. 하지만 영화가 정치를 대상으로 할 때(필자 주석: 특정 정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대용물이 될 때)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촌스러워진다.
2.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이유로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픽션에 관한 말을 거의 그대로 한 바 있다. ‘시스템’이 ‘프로세스’로, ‘개별적인 영혼의 존엄성’이 ‘개개인의 고유함을 존중하는 것’ 정도의 차이 밖에 없다.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되고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죽이게 만듭니다. 차갑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영혼의 존엄성을 표면으로 끄집어내어 조명하는 것입니다.”
아래는 하루키의 수상 소감 발췌이다.
(전략) 그러나 한 가지 굉장히 개인적인 메시지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 조각에 적지도 벽에 붙여 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니까 그건 내 마음의 벽에 각인된 말인데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높고 단단한 벽과 그것에 부딪쳐 깨진 계란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계란 쪽에 서겠다.”
그래요, 그 벽이 얼마나 옳거나 그 계란이 얼마나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계란을 지지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결정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시간이나 역사가 그렇게 하겠지요. 만일 어떤 소설가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벽을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 작품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이 메타포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몇몇 케이스에 있어서는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죠. 폭탄과 탱크와 로켓과 소이탄은 높고 단단한 벽입니다. 그것들에게 으깨어지고 불태워지고 사격당하는 비무장한 시민들은 계란입니다. 이것이 그 메타포의 한 가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느 정도는 우리들 개개인이 계란이라고. 우리들 각자가 독특하고 대체불가능한 영혼을 담은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이라고. 이것이 나의 진실이고 여러분 각자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정도야 어떻든 모두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벽의 이름은 뭘까요? 바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되고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죽이게 만듭니다. 차갑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영혼의 존엄성을 표면으로 끄집어내어 조명하는 것입니다. 소설의 목적은 소리쳐 경고하고 그 시스템에 계속 빛을 비추어 그것이 우리들의 영혼을 자신의 그물로 얽어매어 훼손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저는 소설가들의 일은 이야기를 통하여 각각의 영혼의 유일함을 명백하게 드러내고자 끊임없는 시도라고 전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 사람들을 울게 만들고, 공포로 전율하게 만들고 웃음으로 포복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로 말입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매일매일 그토록 심각하게 이야기를 지어내는 이유인 것입니다.
(중략)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며,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개인들이며 시스템이라는 단단하고 높은 벽과 마주하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계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우리에게 승리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강력하며, 그리고 너무나 차갑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타인의 영혼의 절대적인 유일함과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온기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후략)
원문: darrel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