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언어는 국력에 따라 좌우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 14억명의 중국인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당연히 영어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영어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어휘를 가진 언어이기도 하다. 웃고 들어갔다가 울고 나오는 이유다. 방대한 어휘의 바다에 빠져들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한편, 20세기초반까지만 해도 독일어의 위세가 대단했다. 각종 학술용어, 특히 과학기술과 관련한 용어의 상당수가 독일어였다. 그랬던 독일어의 위세가 꺾인 이유가 뭘까? 양차 대전 때문이고, 특히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과 깊은 연관이 있다. 히틀러의 나치가 저지른 죄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독일어의 권위를 추락시킨 것이다.
독일어가 히틀러 때문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면 반대로 영어를 획기적 발전시킨 사람도 있다. 정복자 윌리엄이다. 영어에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 단어가 많아진 것은 프랑스 북서구 노르망디(Normandy) 지방에 정착해 살던 노르만족(the Normans)이 윌리엄 왕(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의 지휘 아래 영국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서기 1066년의 일이다.
흔히 노르만 정복(the Norman Conquest)이라고 알려진 그 사건 뒤에 영국에서 프랑스어는 수백 년 동안 상류층의 언어가 되어, 뭘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영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어는 정복자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노르만족은 원래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게르만족의 일파이므로 굳이 인종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사람들보다는 같은 게르만족인 앵글로색슨족(the Anglo-Saxons), 즉 영국 사람들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10세기 이래로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에 동화되어 버렸다.
물론 이들이 사용하던 프랑스어는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사용되던 표준적인 고대 프랑스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일종의 방언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Norman French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들이 영국으로 건너간 뒤에 사용한 프랑스어는 그와도 또 달라서, 이 언어를 Anglo-Norma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Anglo-Norman이라는 말은 1066년 이래 정복자 윌리엄을 따라가서 영국에 정착한 ‘노르만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앵글로-노르만의 흔적
어쨌든 Anglo-Norman은 결국 프랑스어이고, 이들 정복자들이 그 프랑스어를 사용하다 보니, 프랑스어는 영국에서 커다란 위세를 갖게 되었다. 영국의 법정에서는 17세기까지도 프랑스어의 방언인 이 Anglo-Norman을 사용했을 정도다.
앙드레 모루아의 <영국사>(김영사 간)를 읽다보면 앵글로-노르만의 증거들이 엿보인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노르만 프랑스어의 흔적, 혹은 관용적 표현들이 그렇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짐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짐은 훌륭한 신하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그 선의를 가상히 받아들여 다음 일을 요망한다.” 어딘가 좀 느끼한 느낌이 든다. ‘짐은, 짐은…’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이밖에도 프랑스어가 영어로 변화한 예는 부지기수다.
prieur –> prior 수도원장
chpelle –> chapel 예배당
messe –> mass 미사
charite –> charity 자선
grace –> grace 은총
tour –> tower 탑
etandard –> standard 군기
chateau –> castle 성
paix –> peace 평화
cour –> court 궁정
couronne –> crown 왕관
conseil –> council 회의
preux(용감한 기사, 주인의 관점) –> proud(오만함, 하인의 관점)
지배자들이 영어를 쓰지 않고 이 프랑스어 방언을 사용했던 것은 물론이지만, 프랑스어는 또 하나의 하층민의 언어인 영어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쳐서, 영어의 역사에서는 이 Norman Conquest를 기준으로 해서 그 이전의 영어를 ‘고대 영어(Old English)’라고 부르고, 그 이후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영어를 ‘중세 영어(Middle English)’라고 부를 정도다.
특히 그 영향은 어휘 분야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에 언어 민족주의가 일어나고, 그래서 공용어(an official language)로서 프랑스어가 금지됐을 때는, 이미 영어 자체에 프랑스어 단어가 아주 많이 침투한 뒤였다.
여러 서양어에 남아 있는 라틴어의 위용
그런데 사실 프랑스어는 라틴어의 구어(입말)가 변해서 된 말이기도 하다. 또 그와는 별도로 라틴어의 문어(글말)나 고대 그리스에서 학자들이 차용한 낱말들을 많이 갖고 있기도 했다.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의 위세 때문에 그 말들에서 프랑스어를 거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차용된 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영어에는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낱말이 부지기수로 많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잡종 언어가 된 것이다.
영어에 편입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일일이 솎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중 어떤 특징적인 단어들의 쓰임새를 추적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오늘은 그중 ‘숫자 1에서 12까지’의 어휘 속에 들어 있는 각각의 어원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고종석 선생의 <7일간의 영어여행 ; 신화와 역사가 있는>(한겨레출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다.
먼저, 1부터 12까지의 숫자에 얽힌 배경을 살펴보자. 왜 하필 12까지냐고 묻는 분이 있을 듯하다. 그래서 미리 밝혀둔다. 12는 2와 3과 4와 6으로 나눌 수 있는 완전수이며, 보편성(generality, universality)의 수이다. 오죽했으면 바로 옆에 붙은 13을 불완전수의 대표라 하겠는가.
12는 실로 다양한 역사적, 학문적 의미를 지닌 수이기도 하다. 12진법의 수이면서 선택된 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결정한 야곱의 열두 아들은 선민(the chosen people)의 상징이고, 예수는 열두 명의 사도(the Twelve Apostles)를 선택했고, 제우스의 궁전에는 열두 신(the Twelve Great Olympians)이 있었으며, 샤를마뉴 대제에게는 열두 명의 중신이 있었고, 원탁의 기사도 열두 명이었고, 성 프란체스코의 친구도 열둘이었다고 한다.
숫자
아주 옛날부터 열둘은 시간적 사이클의 숫자였다. 한 해의 열두 달, 수대의 12궁, 낮과 밤의 열두 시간 따위에 의해서 12라는 숫자는 시간의 완성을 상징한다. 자, 이제 열둘까지 세어보자. 우선, 영어다.
One, two, three, four, five, six, seven, eight, nine, ten, eleven, twelve.
이번에는 ‘그리스어 기원’의 접두사(prefix)들이다.
mono-하나
di-둘
tri-셋
tetra-넷
penta-다섯
hexa-여섯
hepta-일곱
octa-여덟
ennea-아홉
deca-열
hendeca-열하나
dodeca-열둘.
소리 내서 읽어 보자. 모노, 디, 트리, 테트라, 펜타, 헥사, 헵타, 옥타, 엔네아, 데카, 헨데카, 도데카.
여기에 ‘셋 이후의 접두사’에 -gon을 붙여서 읽어보자.
trigon(삼각형)
tetragon(사각형)
pentagon(오각형, Pentagon 미국방부)
hexagon(육각형, Hexagon은 고유명사 ‘프랑스’)
heptagon(칠각형)
octagon(팔각형)
enneagon(구각형)
decagon(십각형)
hendecagon(십일각형)
dodecagon(십이각형).
참고로, 이중 trigon은 잘 안 쓰는 대신 triangle(삼각형, 타악기)을 주로 쓴다. 또한 구각형인 enneagon도 nonagon을 주로 쓰는 편이다.
trigon –> triangle
enneagon –> nonagon
내친김에 mono(하나)의 반대말이 ‘poly(많다, 그리스어)’라는 것, mono와 같은 뜻을 가진 라틴어는 uni(하나)이며, 그리스어에서 온 poly(많다)와 같은 뜻을 가진 라틴어는 multi-라는 것도 알고 가자.
mono(uni) <–> poly(multi)
접두사
이번에는 ‘라틴어 기원’의 접두사들을 살펴보자.
uni-하나
bi-둘
tri-셋
quadri-넷
quint-다섯
sext-여섯
sept-일곱
oct-여덟
nona-(novem-)아홉
decem-열
undec(a)-열하나
duodecim-열둘.
이제는 위의 접두사에 기원을 둔 다양한 단어들을 알아볼 차례다.
unicameral (국회) 단원제의
bicameral 양원제의
trinity 삼위일체
quadrilingual 네 나라의 말을 쓰는, 네 나라 말로 된
quintet 오중주, 오중창
sextet 육중주, 육중창
septet 칠중주, 칠중창 September 9월
octet 팔중주, 팔중창 October 10월
nonet 구중주, 구중창 November 11월
decemfoliate 잎이 열 개인 December 12월
undecagon 11각형
duodecimal 12진법의
어차피 오중주에서 구중주까지 나왔으니, 이쯤 음악가들의 목록을 완성해보자.
solo 독주(독창)
duet 이중주(이중창, 듀엣)
trio 삼중주(트리오)
quartet 사중주
quintet 오중주
sextet 육중주
septet 칠중주
octet 팔중주
nonet 구중주
12개월
1년은 12개월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유별나다. 유래를 살펴보자. 라틴어의 숫자들을 보면 septem, octo, novem, decem은 각각 일곱, 여덟, 아홉, 열의 뜻인데, 거기에 -ber을 붙여 12개월의 달 이름이 되면 9월(September), 10월(October), 11월(November), 12월(December)이 된다. 숫자와 달 이름이 안 맞는다. 이유가 뭘까? 다음과 같다.
원래 로마의 달력은 1년이 10개월, 304일이었고, 그 1년은 3월인 Martius(영어로는 March)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로마 달력에서 Martius는 3월이 아니라 1월이었던 거다. 거기서 셈해보면 당연히 September는 일곱 번째 달, October는 여덟 번째 달, Nobember는 아홉 번째 달, December는 열 번째 달이 된다.
그런데 훗날 10개월이던 1년이 12개월로 바뀌면서 Junuarius(영어의 January)와 Februarius(영어의 February)의 두 달이 맨 앞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연스럽게 위의 네 달은 두 칸씩 밀려 9월~12월로 바뀌게 됐다.(참고로, 1월인 January는 ‘관문의 신’이자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신’인 ‘야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럼 라틴어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은 왜 달력(특정 달의 이름)에서 사라진 걸까? 원래대로라면 ‘다섯을 뜻하는 quint-‘와 ‘여섯을 뜻하는 sext-‘가 등장해야 하잖은가. 그 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원래 다섯 번째 달(지금의 7월)의 이름은 Quintilis이고, 여섯 번째 달은 Sextilis였다. 물론 그 이름은 사라진지 오래고, 우리가 알고 있는 7월은 Jury이고, 8월은 August이지만 말이다.
알다시피 두 달의 이름은 로마의 영웅들 이름이다. 7월에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와 8월에 태어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Octavius Augustus Caesar에서 따온 것이다.
달력에 얽힌 뒷얘기를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은 애초 10개월이었는데, 거기에 July와 August가 끼어드는 바람에 12개월로 늘어났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말해 그건 잘못된 정보다. 정확하게는 애초 10개월에 1월인 January와 2월인 February가 끼어들어 12개월이 된 것이고, 단지 7월과 8월의 이름은 숫자를 뜻하는 말 대신 로마의 두 영웅의 이름으로 교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