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6년 가을,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노숙인 이 씨가 자신의 쪽방에서 책 한 권을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책을 모르고 살던 지난 세월이 후회됩니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이 씨는 최초의 노숙인 인문학강좌인 성프란시스대학의 1기 수료생이다. 2005년 9월 문을 연 성프란시스대학은 이듬해 입학생 22명 중 13명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그중 11명이 일자리를 얻어 자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TV에 나온 이 씨 역시 1기 수료생 중 한 명이다.
2. 2007년 봄, 일군의 중년 남성들이 강원도 홍천강변의 펜션에 모였다. 성프란시스대학의 졸업생과 수강생이 함께 한 MT자리였다. 깊은 밤 누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16년 만에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 같이 무뚝뚝하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 건 인문학 덕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그런 것입니다.”
3. 2009년. 노숙인 출신 작가 안승갑씨, 11년간의 노숙생활 경험을 수기로 발간하다. <거리의 남자, 인문학을 만나다>를 펴낸 안 씨는 이후 노숙인 쉼터 등을 돌며 자신의 경험담이 담긴 잔잔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필자의 졸저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인문과 자연 간, 2010)에 등장하는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서 길어 올린 사례들이다. 얼핏 감동적으로 보일 듯하다. 이밖에도 노숙인 인문학의 성과를 보여주는 예는 차고 넘친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하나 같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다. 어느덧 ‘거리로 나선 인문학’(이하 ‘거리의 인문학’)은 답답하고 갈증 나는 현실사회에 훈훈한 미담을 제공해주는 옹달샘이 된 듯하다. 실제 큰 성과를 냈고, 지금도 감동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인문학 열풍 10년, 그 양적 성장
2005년 노숙인인문학으로 시작된 시민인문학은 날로 수강대상을 넓혀 왔다. 노숙인을 필두로, 자활참여자, 교도소 재소자, 여성가장 혹은 어르신, 탈학교 청소년과 미혼모 등등. 소외계층(?) 전반을 아우르는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기업체 CEO와 임직원, 주부, 공직자, 국군장병을 위한 인문학 강좌 등도 속속 개설되고 있다. 바야흐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할 만하다.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2005년 9월에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한 성프란시스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듬해부터 여러 곳(노원성프란시스대학, 제주희망대학, 관악인문대학 등)의 자활지원센터에서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 2007년에는 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도 시작됐다.
사회적 관심과 지원도 잇따랐다. 성프란시스대학은 기업의 후원에 힘입어 운영할 수 있었고, 이후 개설되는 인문학 강좌들 역시 공공기관과 기업의 지원을 통해 설립, 운영됐다. 한국연구재단이 시민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서울시를 비롯한 각급 지자체와 대학에서도 인문학 프로그램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특히, 경희대학교는 지역주민과 노숙인 인문학을 위한 별도의 기구인 ‘실천인문학센터’를 꾸렸으며, 이후 형식적이던 재학생 교양강좌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인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개설했다.
필자는 초창기 성프란시스대학에 참여한 이래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로 각종 인문학 강좌에 참여하고 있다. 각급 인문학 강좌의 운영상황과 특성, 현실적인 문제를 비교적 자세하게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 그렇기로, 거리의 인문학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에 나설 입장은 아니다. 노숙인 인문학 10년을 맞아 지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그간의 성과와 의미를 살피며, 내외부의 비판을 갈무리하려 한다.
거리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란 단기성과에 주목하는 학문이 아니다. 섣불리 성과를 논하기보다는 본연의 의미와 거리의 인문학을 통해 확장된 의미를 되새길 일이다. 거리의 인문학은 어떤 의미인가?
우선은 현실문제의 해결수단으로서 인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한 의미이다. 남미 민중교육의 상징인 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은 “세계(현실)를 매개로 교사와 학생이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시민인문학 역시 프레이리의 철학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다. 거리의 인문학은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는 인문학이어서는 안 된다는 성찰의 결과였다. 즉,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시도였다. 거리의 인문학은 현실과의 소통의 장을 만드는 의미 있는 경험을 축적했다.
두 번째는 빈곤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의미이다. 그간 빈곤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그야말로 ‘빈곤’하기 그지없었다. 빈곤을 경제사회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태도를 견지했던 탓인다.
이쯤 빈곤은 보다 총체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경제사회적 관점에서 빈곤은 ‘비용’ 혹은 ‘분배’의 문제로 인식된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은 ‘관계’의 문제이다. 관계란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관계의 산물이다. 사람과 사람의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빈곤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으로 끌어올릴 때 비로소 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신적 삶을 회복시키는 의미이다. 얼 쇼리스가 <희망의 인문학>에서 들려주는 흑인 여죄수와의 대화는 듣는 이를 전율시킨다. 교도소를 방문한 얼 쇼리스가 흑인 여죄수에게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다.
여죄수는 “저희에겐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부자들처럼 박물관, 음악회, 미술관 등을 다니며 정신적 삶을 살았더라면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여죄수의 말이 얼 쇼리스를 움직였고, 최초의 홈리스(Homeless) 인문학 강좌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1995년)으로 이어졌다.
제도교육이 삶의 방편을 습득시키는데 주력해 왔다면, 인문학은 삶의 의미를 고뇌하게 한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동물이 생존에 목을 매는 데 비해 인간은 생존의 의미를 성찰한다.
거리의 인문학 최대 수혜자는, 인문학자 자신이었다
어찌 보면 인문학은 편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역설적으로, 그 점이 바로 강단 밖으로 뛰쳐나온 인문학이 의미 있는 사회교육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노숙인 등 빈곤층에게 인문학은 끝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하라, 고뇌한 내용을 글로 옮기라.”고 주문한다. 정신적 삶을 일깨우기 위한 전제로서 성찰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노숙인인문학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고 나아가 인문학 열기를 선도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10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10년의 경험은 낙관과 안주의 근거이기보다는 새로운 성찰의 계기이다. 그간의 성과에 도취해선 안 된다. 지나친 긍정은 외려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흐를 수 있다. 긍정주의의 도그마에 빠져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은폐해선 안 된다. 내외부의 비판을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야 한다. 그게 바로 인문정신이다.
이쯤 묻지 않을 수 없다. 거리의 인문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획이었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거리의 인문학은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성찰을 통한 자활과 자립의 의지를 북돋우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한 목적은 앞서 소개한 일화들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전혀 엉뚱한 현상도 발견하게 된다.
일테면 이런 진술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인문학의 최대 수혜자는 인문학 그 자신이거나 강의에 참여한 인문학자들이다.” 대체 무슨 말인가. 문학평론가 오창은의 <절망의 인문학>(이매진 간, 2013)의 한 구절을 옮겨 보자.
“한 연극평론가는 실천 인문학을 향해 의외로 매섭게 질책했다. 미술, 문학, 문화, 연극평론가가 함께 모여 행동주의 미학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강의가 활발히 전개돼 인상적이지만 그 진상은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노숙인이나 교도소 재소자가 인문학 수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노숙인과 재소자가 아니에요. 그 강의에 나선 인문학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 감동에 겨워하는 것 아닌가요?’”
“강의에 나선 인문학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 감동에 겨워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죽비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철학 없는 실천이 빗어낸 우화라고나 할까. 국외자의 시선이 그러할진대 막상 강의에 나섰던 필자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좀 얄궂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거리의 인문학’(오창은은 ‘실천인문학’이라 불렀던)의 최대 수혜자는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문학 그 자신과 강의에 나섰던 강사들이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노숙인 강의가 사회적 화제가 된 뒤 곳곳에서 인문학 강좌들이 속속 개설됐다. 앞서 살펴봤듯이 기업과 한국연구재단, 지자체가 나서는가 하면, 대학들도 연거푸 인문학 강좌 개설에 발 벗고 나섰다. 그 결과 인문학 강좌의 수가 전국적으로 1백여 개를 넘어설 만큼 활성화됐고, 그것은 곧 대학 내에서 불안한 신분에 처해 있던 일군의 인문학자들에게 강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효과를 낳았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의 비정규교원들이었다. 간혹 정규교원 즉, 전임교수들이 나서기도 했지만 그들은 곧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실제로 2009년 ‘서울형 시민 인문학 강좌’에 참여했던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경우 교내 인문대학 소속 전임교수 위주로 강의계획을 꾸려 의욕적으로 거리의 인문학에 참여했으나 이듬해 스스로 사업 참여를 포기하고 말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전임교수들에게 거리의 인문학은 ‘얼핏 의미는 있어 보이지만 솔직히 귀찮고 골치 아픈 부가적인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면 비정규 교원들에게 거리의 인문학은 실로 기회의 바다였다.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 대학 강의보다 높은 강사비(교내 강의의 경우 시간당 5만원 내외를 받는데 비해 시민인문학에선 시간당 최소 7만원에서 15만원을 받는다.)를 받는 강의였다. 둘째, 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할 기회, 즉 상징자본을 축적할 기회였다. 셋째, 드문 경우이긴 했지만 만년 비정규교원에서 전임교수로 계층상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쯤, 거리의 인문학이 최소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의미 있고 보람차며 삶의 활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실로 강의에 참여한 인문학자들이 감동에 겨워할 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근원적 성찰이 필요할 때
거리의 인문학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기본적으로 강의에 참여하는 수강생들의 기대심리는 매우 높다.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동경과 존중의 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분이다. 아울러 거리의 인문학이 표방하는 것의 순기능과 순수성에 대한 동의와 응원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거리의 인문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 여러 지점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필자가 제기한 ‘전도된 현실’ 혹은 ‘효과의 전도’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도 있다.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이어서 간과하기 힘들다. 일테면 어느덧 인문학조차 시장주의의 상품으로 전락돼 버렸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수유너머’의 연구원들이 펴낸 <불온한 인문학>(휴머니스트 간, 2011년)은 그러한 비판의 시발점이었다. 그 자신들이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인문학 열풍이 불러온 왜곡과 변질에 대한 경계를 모토로 하고 있다.
<불온한 인문학>은 작금의 “‘지금의 인문학(인문학 열풍)’은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가 하면 외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봐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라고 꼬집는다. 아울러 책은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거리의 인문학은 어쩌면 오창은이 <절망의 인문학>에서 주장대로 ‘철학 없는 실천이 빚어낸 우리 시대의 슬픈 초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주된 목적은 그것의 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발전적 해체를 위한 것일 테다. 그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거리의 인문학은 다양한 비판의 도마 위에서 스스로 몸부림쳐 도마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쯤이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철학 없는 실천이 문제를 야기했지만 실은 그 이전의 고민들에 대해 새삼 되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실천 없는 철학’이 빚어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말이다.